이런저런 이야기들

마이클 무어..누락된 이야기(4)

bluefox61 2013. 7. 1. 17:18

올해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떨어진지 68년이 되는 해입니다. 원자폭탄을 폭격기에 싣고 날아가 민간인들이 사는 도시에 떨어뜨렸던 미국인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과연 자신이 떨어뜨린 폭탄이 어떤 폭탄이었는지 알았을까요. 그들이 비행에 나서기전 상관으로부터 들었던 주의사항은 무엇이었을까요. 당시 원자폭탄에 축복을 내렸던 한 종군신부가 어떻게해서 미국의 가장 급진적인 반전주의자 신부가 됐는지 마이클 무어를 통해 들어봅시다.

 

축복(A Bressing)

 

조지 자벨카 신부가 어느날 내게 고백할 것이 있다고 말했다.

마이클, 나는 손에 너무 많은 피를 묻혔다네.” 자벨카 신부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자네에게 말해주고 싶어.”

자벨카 신부와 나는 신문사 사무실 현관에 앉아있었다. 그는 플린트의 세이크리드 하트 성당 신부였다(나중에 내가 결혼하게 될 교회이다). 자벨카 신부는 은퇴했지만 플린트 보이스 자원봉사를 포함해 플린트 지역의 모든 문제에 간여하며 일하고 있었다.

플린트 시내에 살고있었던 나는 6년전 미사에 참석하기 위해 세이크리드 하트 성당에 들른 적이 있었는데, 아직도 가톨릭 교의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내게 자벨카 신부는 이상적인 신부상에 가장 가까운 존재였다. 서로 사랑하고, 적까지도 사랑하며, 내가 대접받고자 하는대로 다른 사람을 대접하는 그런 분이었다. 사람은 가난한 이와 약한 자, 죄수와 미천한 자를 도와야할 책임을 가지고 있다는데 동의한다. 하지만 나는 특정 이슈, 즉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거나(게이) 다른 이를 2등 시민 (여성)으로 만들고, 성문제와 관련해 지옥불로 사람들을 겁주는 그런 문제에 대해서 만큼은 교회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나는 매주 또는 매월 자벨카 신부와의 만남을 즐겼고, 그가 진시 카운티에 있는 교회에서 이끄는 기도회에 참석한 적도 있었다. 그는 나의 실질적인 담당 신부가 됐다.

하지만 이제 그가 내게 뭔가에 대해 말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와 알게 된지 몇 개월밖에 되지 않은 시점이었는데, “손에 많은 피를 묻혔다는 말을 하니 다소 충격적이었고 즉시 기분이 편치않아졌다.

 

그는 오래된 사진 한 장을 꺼내더니 손으로 가르켰다. 사진 중앙에는 비행기 한 대가 있고, 그 앞에는 공군 몇사람이 서있었다. 군인들 한가운데 있는 사람이 바로 군목, 자벨카 신부였다.

이 사람이 나라네.” 그는 지금보다 훨씬 젊은 모습의 자신을 가르켰다. “이게 나야.”

그는 내가 뭔가 눈치채질 않았는지, 또는 뭔가 말하려는게 있지 않냐는 듯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나는 좀 당혹스러웠고, 무슨 사진인지 이해하려고 애쓰면서 그를 마주 쳐다봤다. 그때 갑자기 감이 왔다. 내 아버지처럼 그도 전쟁의 상흔을 가지고 있는 것이었다. 이 착한 신부는 엄청난 죽음의 한부분이었음을 아직도 자각하고 있는 듯했다. 이해가 됐다.

신부님도 2차세계대전에 참전하셨군요. ” 동정심을 나타내면서 내가 말했다. “제 아버지도 그랬어요. 너무 많은 죽음과 파괴를 경험하셨지요. 끔찍한 광경이었을 겁니다. 어느 지역에 배치되셨나요?”

그는 내가 감을 잡지 못하고 있다는 표정으로 쳐다봤다.

비행기에 뭐라고 씌여있는지 보게나.” 그가 물었다.

나는 비행기 앞부분에 씌여진 글씨를 자세히 들여다봤다.

.

에놀라 게이요.”

맞아.” 자벨카 신부가 말했다. “나는 티니안섬 509부대의 군목이었다네. 군인들의 신부였지.”

그리고 계속 말을 이어갔다. “194586, 내가 히로시마에 떨어진 폭탄에 축복을 내렸네.”

 

나는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사진을 들여다봤다가, 다른 곳을 멍하니 쳐다보다 그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그의 검은 눈동자가 더욱 검게 보였다.

나는 에놀라 게이의 군목이었어. 194585일 군인들을 위해 미사를 올렸지. 그리고 다음날 아침 2000만명을 학살하는 임무를 위해 떠나는 군인들에게 축복을 내렸다네. 나의 축복, 예수 그리스도와 가톨릭 교회의 축복을 말이야. 내가 그랬어.”

나는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몰랐다.

그는 계속 말했다.

“3일 후, 나는 나가사키에 폭탄을 떨어뜨린 비행기와 대원들에게도 축복을 내렸어. 나가사키는 가톨릭 도시였다네. 일본에서 유일하게 기독교 신자가 인구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곳이었지. 우리는 가톨릭 신자 4만명, 73000명의 생명을 말살한거야.”

공포스런 사실을 이야기하는 그의 눈에 눈물이 어른거렸다.

일본에는 수녀회 3곳이 있었는데, 모두 나가사키를 기반으로 한 것이었어. 그 모든 수녀들이 공중으로 사라져버렸지. 단 한명도 살아남지 못했어. 내 축복으로 말이야.”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몰랐다. 나는 손을 뻗어 그의 어깨에 올려놓았다.

조지, 당신이 폭탄을 떨어뜨린건 아니잖아요. 그 도시들을 파괴하는 계획을 세운 것도 아니고요. 당신은 거기서 당신의 일, 젊은이들을 돌보는 일을 했을 뿐이예요.”

아니야.” 그가 말했다. “그렇게 간단한게 아니라네. 나는 그 일의 한 부분이었어. 아무런 비판도 하지 않았지. 나는 전쟁에서 우리가 이기길 바랬고, 그것을 위한 노력에 동참했던거야. 모두가 역할을 한거지. 내 역할은 예수의 이름으로 용서를 해주는 것이었던거야. ”

그는 그날 오후 히로시마에 대한 뉴스를 들었을 때 대부분의 미국인들처럼 안도감을 느꼈다고 말했다. 이로서 전쟁이 끝나게 되겠구나 생각했다는 것이다.

나는 그 일로 군목직을 떠나지 않았다네.” 그는 강조하면서 말했다. “종전 이후에도 주, 연방정부 방위군의 군목으로 일했어. 22년동안이나 말이야. 군목으로는 드믈게 중령으로 은퇴했지.”

 

자벨카 신부는 원자폭탄이 떨어진지 약 1개월 뒤, 항복한 일본에 군인들과 함께 들어갔던 일을 회상했다. 그는 나가사키에서 원자폭탄에 살아남은 사람들이 겪고 있는 고통을 직접 목격했다. 무너져버린 수녀회 본부건물들도 발견했다. 성당의 잔해더미에서 향로를 파내어 보니, 사용하지 않은 향이 가득 들어있었다고 한다. 구호활동에 참여하면서 양심의 가책이 조금은 나아졌다는 이야기도 했다.

“86일 아침에 에놀라 게이가 그 폭탄을 투하랄 것이란 사실을 알고 계시지 않았나요? 그게 어떤 폭탄인지는 아셨어요?”

아니, 우리는 몰랐다네. ” 자벨카 신부가 말했다. “ 우리가 알고 있었던 것은 특별한폭탄이란 점뿐이었어. 성능을 좀 좋게 만든 폭탄이란 말을 있었지. 하지만 폭탄의 능력에 대해선 아무도 몰랐어. 대원들은 폭탄을 투하한 다음 가능한 빠르게 투하지점을 빠져나오고 절대 내려다보지 말라는 특별 지시를 받았었어.”

모르셨다면 책임은 없는거네요.”

아니, 그렇지 않아.” 자벨카 신부가 강하게 말했다. “그렇지 않아. 모든 인간은 자신의 행동과 행동의 결과에 책임이 있고, 잘못된 일이 생겼을 때 질문을 해야할 책임이 있어.”

하지만 조지, 전쟁이었고, 어떤 질문이든 용인되지 않는 상황이었잖아요.”

바로 그런 태도 때문에 우리가 계속 전쟁 속으로 끌려 들어가는거야. 누구도 질문을 하지 않는 태도말이야. 특히 군대에서는 그렇지. 맹목적인 복종말이야. 우리가 독일인들에게는 변명을 허용하지 않잖아?”

하지만 조지, 우리는 좋은 편이고, 공격을 받은 입장이었다는 점에서 다르잖아요.”

모두 맞는 말이야. 그리고 역사는 승자의 편에서 기록되는 법이지. 일본이 이미 항복을 결정한 상태였는데도 우리는 그 폭탄을 떨어뜨리고 싶어했다는게 좋은 예가 될걸세. 우리는 러시아에게 메시지를 보내고자 했던거지. ”

그는 나를 똑바로 쳐다봤다.

내가 히로시마 이전에는 아무 것도, 폭탄이 뭐하는 것인지 몰랐다고 했었지. 하지만 3일뒤에도 그랬을까? 그때는 알고 있었어. 다음 차례인 나가사키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고 있었다네. 그런데도 나는... 폭탄과 대원들에게 축복을 내렸어. 73000명의 학살을 축복했던거야. 주여, 제게 자비를 베푸소서. ”

 

조지는 60대 중후반의 나이에 자신이 어떻게 사도 바울이 말에 떨어지는 순간( 사도행전에 따르면 유대교 율법학자이자 핍박자였던 사울은 말을 타고 가다가 천상의 빛과 주님을 만나 놀라 떨어져 눈이 멀었다가 개종을 하게 된다 - 역자 주)을 맞았는지, 고통을 겪는 것은 언제나 가난한 자들이란 사실을 깨닫게 됐는지에 대해 이야기해줬다. 그는 자신의 삶을 완전히 평화주의에 바치기로 결심했고, 일요 설교를 통해 베트남 전을 비판했다. 플린트의 민권운동에도 참여했다. 그는 명백한 급진파 신부였다. SDS(Student for Democratic Society : 1960년대 뉴레프트 계열의 전미학생회 - 역자 주)를 지지했고, 웨더멘(Weathermen : SDS의 한 분파 - 역자 주)1969년 플린트에서 악명높은 전쟁위원회 회의를 열었을 때에도 참가자들(분명 모두 평화주의자는 아니었다)을 위해 교회문을 활짝 열어 잠자리를 제공하기도 했다. 그는 전쟁과 인종, 계급 문제에 관한한 포기도, 양보도 모르는 신부로 알려지게 됐다. 나는 오래전부터 자벨카 신부에 대해 들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왜 그렇게 됐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다. 이제는 이해가 됐다. 평화를 위해 그 많은 일을 해왔지만, 그는 폭탄에 축복을 내린신부였던 과거를 지울 수는 없었던 것이었다.

천국의 문 앞에서 성베드로를 만나게 되면 대답해야 할게 많을거야. 그가 내게 자비롭기만을 바랄 뿐이야.”

나는 그런 이야기를 털어놓아준 신부에게 감사해했고, 신문에 그에 대한 기사를 썼다. 그는 계속해서 플린트 보이스를 도와주면서, 플린트 북쪽 끝 지점에서 신문 꾸러미를 배달하는 등 필요한 일이라면 아무리 비천할지라도 마다하지 않고 했다.

4년 뒤, 자벨카 신부는 더욱 참회하고 평화 복음을 퍼뜨려야할 때라는 결심을 했다. 그래서 미 대륙을 횡단해 성지까지 걸어서 가기 시작했다. 말 그대로 시애틀을 출발해 뉴욕까지 걸어간 다음 비행기를 타고 바다를 건너( 물 위를 걷는 기적을 행하지는 못했다) 베들레헴까지 갔다. 12874km 길이였다. 그는 약 2년만에 그 일을 완수했다. 중간에 머물게 되는 곳에서 그는 전쟁을 지지하는 원자폭탄 군목이었던 자신이 어떻게 해서 강경 평화주의자가 됐는지에 대해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해주곤 했다.

 

플린트로 돌아온 자벨카 신부는 어느날 플린트 보이스에 들러 나를 만나고 싶었다고 했다.

마이클, 자네가 왜 신학교를 떠나 신부가 되지 않았는지 가끔 궁금한 생각이 들곤 했어.”

글쎄요.” 내가 말했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었어요. 우선 신학교에 들어갈 때 제가 14살밖에 안됐거든요. 15살이 되니 호르몬이 치받쳐 오르더라구요. 게다가 저는 제도와 위계질서엔 관심이 없었고 지금도 그래요. 그리고 신학교에서 말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는 너무 다르더라고요.”

, 그리고 그 사람들이 자네에게 다음 학기에는 들어오지 말라고 했다면서.”

자벨카 신부는 급진파이긴 해도 여전히 신부였고, 가톨릭 교회에 아직도 매우 충실한 분이었다.

자네가 플린트 보이스에 교회와 교황에 대해 쓴 글을 읽었어. 자네가 걱정이 돼. 자네 영혼이 말이야.”

내가 웃었다. “조지, 저나 제 영혼 걱정하실거 없어요. 저는 잘 지내요.”

하지만 자네는 교회를 떠난 것같은데.”

믿음을 되찾아야하는 가톨릭신자라고 해두죠.”

그것으로 토론을 끝내려던 내 의도가 잘 먹히지 않았다.

지금 나와 함께 기도하지 않겠나?”

진심이세요?”

그래. 자네가 꼭 괜찮아지게 하고 싶네.”

전 괜찮아요. 저도 필요할 때는 기도해요.”

지금 나와 함께 주기도문을 올리세.” 신부는 시작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조지, 그만해요. 이럴 필요없어요.”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조지! 그만해요! 제가 불편해요!‘

마이클, 주기도문을 그렇게 말하지 말게.” 주기도문을 중단하고 자벨카 신부가 말했다. “자네에겐 이게 필요한 것같아.”

필요없어요. 싫어요. 왜 이러시는지 모르겠어요. ”

그는 침묵 속에서 나를 바라봤다.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뭐라고 말해야할지 몰랐다. 고통스러운 침묵이 흘렀다.

꾸준히 계속하는게 중요해.” 그가 마침내 말했다. “하던 일을 계속하는게 중요해. 하지만 교회없이는 할 수없어. 자네는 교회가 필요하고 교회는 자네가 필요해 . 미사로 돌아오게나. 평화를 찾을 수 있는 교회 안에서 자네의 자리를 찾는 게 중요해.”

나는 그가 자기 자신에 대해 말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티니안 섬에서 일어났던 일에 대해 그는 아직도 자책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일로 자신에게 채찍을 가하며 가톨릭교회에서 속죄의 기회를 얻었고 , 여전히 사제로 남아있었다. 신앙으로 선을 행할 수있었고, 아마도 마음 속으로는 충분히 많은 선을 행하게 되면 심판의 날에 구원을 받을 수있을 것으로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나는 이 노인을 바라보면서, 그가 아직도 짊어지고 있는 악마를 이해했다. 나를 어떤 구원이 필요한 존재로 생각하는 데에 대해서도 기분이 상하지 않았다. 그를 용서하기란 쉬운 일이었다.

내가 말했다.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아멘.”

그가 미소를 지었다. “거봐, 그렇게 어렵지 않지?”

, 조지. ” 내가 상냥하게 말했다. “어렵지 않네요.”

좋아! 이제 다음주 신문을 위해 내가 뭘 해줬으면 좋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