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이란은 왜 앙숙이 됐나...길고긴 '갈등 역사'
미국과 이란 간의 갈등이 한치 앞을 내다보기 힘들만큼 악화일로로 치닫고 있다. 자칫 불씨 하나에도 전쟁이 터질 듯 일촉즉발의 분위기이다.
두 나라의 관계가 이처럼 극도로 악화된 직접적인 원인은 도널드 트럼프 미 정부의 핵합의 파기와 초강력 제재, 그리고 이에 맞서 시리아, 예멘, 이라크, 레바논,팔레스타인 등에서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이란의 끝없는 시도 때문이라고 할 수있다.
하지만 좀더 깊이 들어가 보면, 미국과 이란의 뿌리깊은 상호불신이 현재와 같은 상황이 전개된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전 세계에는 미국과 사이가 나쁜 국가들이 적지 않지만, 미국과 이란 사이만큼 불화와 불신의 역사가 길고 끈질긴 경우를 찾기가 힘들다.
두 나라의 악연은 100여년 전부터 시작된다. 1921년, 이란에서 카자르 왕조를 뒤엎는 쿠데타가 발생했다. 쿠데타 주역은 군인출신의 레자 칸. 군사를 이끌고 정권을 잡은 레자 칸은 1925년 카자르 왕조의 폐지를 선언하고, 의회의 추대를 받는 형식으로 이란의 새 황제 즉위했다. 이란의 마지막 왕조 팔레비 왕조가 열린 것이다.
레자 칸 국왕은 미국 재정고문관을 고용하고 근대교육제도를 도입하는 등 친서방 노선을 취하는 듯했지만,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미국 등 서방국가들과의 관계가 틀어지게 된다. 중립을 선언하면서, 연합국에 대한 협력을 거부한 것. 이에 독일이 이란 유전을 차지할 것을 우려한 영국과 소련이 이란을 침공했고, 레자 샤는 왕세자 모하마드 레자 팔레비(팔레비 2세)에게 왕위를 넘기고 남아프리카 공화국으로 망명했다. 이에 따라 미국 등 서방국가에 대한 이란 국민들의 반감이 싹트게 됐다.
양국 관계가 결정적으로 악화되는 사건은 1953년에 발생했다. 1951년 총선에서 민족주의와 석유 국유화를 주장하면서 이란 국민들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아 출범한 무함마드 모사데크 정권을 전복시키기 위해 미국 중앙정보국(CIA)가 영국 정보국 MI6와 손잡은 것. 이른바 ‘아작스 작전’으로 이름 붙여진 이 작전의 핵심은 군부 쿠데타를 일으켜 팔레비 왕조를 복원하는 것이었다.
같은 해 8월19일 결국 쿠데타는 성공했고, 모사데크 정권 출범 후 국민 저항에 부딪혀 이탈리아로 쫓겨 나갔던 레자 샤 팔레비 국왕이 귀국했다. 팔레비 왕정이 이후 강력한 친미주의로 치닫게 된 것은 왕권을 되찾게 해준 미국에 대한 ‘보은’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란 국민들은 지금도 모사데크 총리를 몰아낸 미국 주도의 쿠데타에 치를 떨고 있다. 지난 2018년 자바드 자리프 이란 외무장관이 트위터를 통해 "오늘로부터 65년 전 미국은 이란 국민에 의해 선출된 모사데크 박사의 민주정부를 전복하고 독재를 복원한 뒤 이란인들을 25년간 예속시켰다"고 주장했을 정도이다.
1979년 11월4일, 미국 국민들을 경악시키는 사건이 이란 수도 테헤란에서 벌어졌다. 대학생들이 미 대사관 담을 넘어가 건물을 점령하고 90명을 인질로 잡은 것이었다. 앞서 10월 아야톨라 호메이니가 이끄는 이슬람 혁명으로 권좌에서 쫓겨난 리자 샤 팔레비에 대해 미국 정부가 췌장암 치료를 이유로 입국허가를 내준 것이 문제였다. 이들은 여성과 흑인을 풀어준 뒤 52명을 인질로 잡고, 미국 정부에 레자 샤 팔레비의 즉각적인 인도를 요구했다.
1980년 4월24일 지미 카터 당시 대통령은 이른바 ‘독수리 발톱 작전’을 승인했다. 특공대원 90명이 테헤란 남동부 타바스 사막에 침투한 다음 헬리콥터를 이용해 대사관 안으로 전격 투입, 인질을 빼내오는 작전이었다. 하지만 헬기 8대 중 2대가 고장을 일으킨 데다, 헬기 1대와 수송기가 모래폭풍에 휩싸여 충돌하는 바람에 승무원 8명이 사망하고 4명이 부상하면서 작전은 처참한 실패로 끝났다. 결국 이듬해 1981년 1월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취임식에 맞춰 인질들이 풀려나면서 테헤란 미대사관 점거 사태는 444일 만에 종결됐다.
이 사건을 계기로 단절된 양국 외교관계는 40년이 넘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양국 관계는 2001년 9.11 테러 뒤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에 있는 탈레반을 축출할 때 이란이 협력하는 등 일부 개선 조짐도 보였지만, 이란 핵개발로 다시 냉각됐다. 2009년에 출범한 버락 오바마 행정부가 대이란 정책의 변화를 추진하면서 2015년 드디어 이란 핵협상이 타결됐다. 하지만, 2017년 취임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오바마 행정부의 이란 정책을 완전히 뒤엎고 핵합의 파기를 선언하면서, 두 나라의 관계는 현재의 상황에 이르게 됐다.
현재 벌어지고 있는 미국과 이란의 충돌은 트럼프 행정부에게 책임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핵합의를 깨고, 중도파인 하산 로하니 이란 대통령의 입지를 약화시키며, 이란 내부 강경파들을 자극하고, 이란 최고지도자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를 정조준해오고 있기 때문이다.
트럼프 정부가 원하는 것은 결국 미국의 보수세력이 오래 전부터 원해온 이란의 '레짐 체인지(체제 교체)'란 말이 나오는 이유이다.
미국은 1979년 이란에서 이슬람혁명이 일어났을 당시 테헤란 주재 미 대사관이 시위대에 점령당해 자국인들이 인질로 억류됐던 사건을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다. 당시 겪었던 치욕은 이란 체제에 대한 미 보수진영의 거부감 또는 증오의 뿌리라고 할 수 있다.
이란이슬람공화국은 이슬람 법학자 통치론과 민주주의를 조합한 독특한 정치 구조를 가지고 있다. 행정부의 수반은 4년마다 한 번씩 국민들이 직접 선거로 뽑는 임기 4년의 대통령이지만, 국가 원수는 종신직인 최고지도자이다. 즉, 세속 정치세력과 이슬람교 지도자가 권력을 나눠 갖는 일종의 과두 통치체제라고 할 수 있다.
이슬람법학자인 최고지도자는 행정부와 협의해 모든 정책을 결정·감독하며 군통수권, 전쟁 및 종전 선언권을 가지고 있다. 대통령은 정규군에 대한 통수권을 가지고 있는 반면 최고지도자는 정예군 혁명수비대와 준 경찰조직인 바시즈 민병대에 대한 통수권을 가지고 있다.
또 국민이 선출한 대통령에 대한 임명권, 대법원 판결이나 국회가 재적 3분의 2 찬성으로 탄핵한 대통령에 대한 최종 해임권도 갖고 있다. 최고 권력기구이자 대선 후보 심사권을 가진 혁명수호위원회의 위원 12명 중 6명에 대한 임명권, 사법부 수장인 대법원장 및 국영언론사 사장 임명권 역시 최고지도자의 몫이다. 국회를 통과한 법률이 이슬람법에 맞는지 여부를 다시 심사한 후 통과 또는 거부할 수 있는 권한 역시 가지고 있다.
종신직인 최고지도자는 국민 직선으로 선출된 86명의 이슬람법학자로 구성된 국가지도자운영회의에 의해 선출된다. 임기 8년인 국가지도자운영회의 위원은 최고지도자를 선출하고 감독하며, 해임할 수도 있지만 실제로 감독 및 해임권을 행사한 적은 아직 없다. 최고지도자의 유고로 자리가 비게 되면, 새로운 지도자가 선출될 때까지 대통령, 대법원장, 헌법수호위원회의 이슬람법학자 3인으로 구성된 운영회의가 직무를 대행하게 된다.
초대 최고지도자는 1979년 이슬람 혁명의 중심이었던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이다. 1989년 호메이니가 사망하자 국가지도자운영회의는 고인이 자신의 후계자로 사실상 지목했던 사예드 알리 하메네이를 최고지도자로 선출했다.
하메네이는 1960년대부터 반 샤(이란 국왕)운동에 뛰어들면서 호메이니의 최측근 인사 중 한 명이 됐다. 1979년 혁명 후 이슬람공화당 사무총장과 혁명수비대 차관 등 요직을 거쳤다가, 1981년 무함마드 알리 라자이 당시 대통령이 폭탄테러로 살해된 후 치러진 선거를 통해 대통령에 당선돼 1989년까지 재직했다. 1981년 폭탄테러 당시 현장에 있었던 그는 오른팔에 심한 상처를 입어 아직도 잘 쓰지 못한다.
종신직인 최고지도자는 파르시어(이란어)로 ‘벨라야트 이 파키흐’로 부른다. ‘벨라야트’란 수호자란 의미이고, ‘파키흐’는 이슬람 율법을 가리킨다. 즉 '율법의 수호자' , 나아가 '알라의 대리인'인 셈이다.
따라서, 트럼프 정부가 이란 이슬람공화국 체제를 부정하고 레짐체인지를 노리고 있다면 양국 간의 정면 충돌을 불가피할 수밖에 없다. 지금 국제사회가 미국과 이란간의 갈등을 크게 우려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