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여우의 세상 이야기

내가 몰랐던 역사7-이란과 미국, 길고 긴 앙숙의 역사

bluefox61 2021. 3. 5. 09:10

1953년 8월 쿠데타 성공 후 이란 수도 테헤란 경찰청 앞의 군인들. 

 

2013년 8월 미국 중앙정보부(CIA)는 60년동안 숨겨왔던 방대한 분량의 기밀문건들을 공개했다. 시민단체의 소송 제기 등 정보공개를 요구하는 끈질긴 활동의 결과였다. 공개된 문건은 1953년 이란 쿠데타 작전에 관한 것이었다. 이란 국민들이 뽑은 모하마드 모사데크 Mohammad Mosaddeq 총리를 쫓아내기 위해서 CIA가 쿠데타를 사주했다는 사실이 이 문건들을 통해 드러났다. 사실 미국이 1953년 이란 쿠데타의 주모자였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CIA가 내부기밀문서 공개를 통해 이를 사실로 인정하기는 처음이었다. 21세기까지 이어지고 있는 미국과 이란 간에 이어지고 있는 원한과 증오의 뿌리와 책임이 미국 정부에 있음을 비로소 시인한 것이었다.

 

갈등의 뿌리는 석유

 

미국과 이란은 대체 언제부터 철천지 원수 사이가 된 것일까. 모든 것은 석유 때문이었다.미국이 처음 시작한 일은 아니었다. 자동차의 보급과 1차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석유의 중요성이 크게 대두되는 가운데 1921년 이란에서 카자르 왕조를 뒤엎는 쿠데타가 발생했다. 쿠데타 주역은 군인출신의 레자 칸 팔라비 Reza Khan Pahlavi(또는 레자 샤 팔라비). 군사를 이끌고 정권을 잡은 팔라비는 1925년 카자르 Qajar 왕조의 폐지를 선언하고, 의회의 추대를 받는 형식으로 이란의 새 황제로 즉위했다. 이란의 마지막 왕조 팔레비 왕조가 열린 것이다.

 

미국 재정고문관을 고용하고 근대교육제도를 도입하는 등 친서방 노선을 취한 레자 칸 팔라비 국왕은 1933년 4월 영국 브리티시 페트롤리엄(BP)의 전신인 앵글로 이라니안 석유회사(AIOC)와 계약을 체결한다. 이 회사가 이란 유전에서 채굴하는 원유에 대해 가격변화와 상관없이 톤당 4실링의 로열티, 그리고 일정 기준 이상으로 발생하는 글로벌 수익의 20%를 왕실에 지불하는 조건이었다. 이밖에 AIOC는 이란 근로자 고용, 학교 건립 등도 약속했다. 대신 1993년까지 무려 60년간 이란에서의 석유채굴 독점권을 가졌다.

 

상부상조하는 듯했던 영국과 이란 왕실의 관계는 2차세계이 발발하면서 틀어지게 된다. 그 어느 때보다도 석유가 필요해진 상황에서 이란 국왕이 중립을 선언하면서 연합국에 대한 협력을 거부한 것이다. 그러자 독일이 이란 유전을 차지할 것을 우려한 영국과 소련은1941년 8월 25일~9월 17일 이란을 침공했다. 국왕은 왕세자 모하마드 레자 팔레비 Mohammda Reza Pahlavi(팔레비 2세)에게 왕위를 넘기고 남아프리카 공화국으로 망명했다.

 

2차세계대전이 끝나자 영국과 소련의 군대는 철수했지만, 이란 국민들의 대영감정을 더욱 악화된다. AIOC를 실질적으로 좌지우지하고 있는 영국 정부가 이란 원유 이익배분 비율 20%를 멋대로 어기는 등 1933년 체결한 계약조건을 지키지 않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됐기 때문이었다. 이런 가운데 1951년 치러진 총선에서 강력한 민족주의 성향의 야당 국민전선이 국민들의 지지를 받아 승리했고, 당수 모사데크가 총리에 취임했다. 모사데크는 AIOC의 국유화를 전격적으로 단행하고, 국왕의 권한을 일부 제한하는 정책을 폈다. 영국처럼 국왕은 통치하되 군림하지 않는 존재여야 한다는 것이 모사데크의 신념이었다.

 

 

1951년 총선 승리 후 모사데크

AIOC의 국유화에 영국 정부에는 초비상이 걸렸다. 클레멘트 애틀리 Clement Richard Attlee에 이어 총리가 된 윈스턴 처칠 Winston Churchill은 모사데크 정부의 제거를 결심하고 해리 트루먼Harry Truman 미국 대통령에게 SOS신호를 보낸다. 명분은 소련 공산주의의 차단이었다. 그러나 진짜 목표는 반외세 민족주의 정권을 함께 무너뜨리고 이란의 석유자원을 차지하자는 것이었다.

 

영국의 위와같은 제안에 당초 트루먼 미국 행정부는 회의적인 태도를 나타냈다. 괜히 휘말렸다가 이란 및 중동지역에서의 미국 위상이 흔들릴 우려가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게다가 미국은 한반도에서 전쟁 중이어서 중동정세에 몰두할 여유가 없었다. 하지만 1953년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Dwight Eisenhower 대통령이 취임한 후 미국의 대이란 정책은 변화하게 된다. 소련이 막후에서 이란 정치를 좌우하고 있다는 영국 정부의 설득에 미국이 귀를 기울이기 시작한 것이다.

영국의 대외정보국 MI6와 CIA는 드디어 이란에서 친국왕 쿠데타를 벌이기 위한 합동작전에 돌입한다. 작전명은 MI6가 ‘부츠작전(Operation Boot)’,CIA는 ‘아작스 작전(Operation Ajax)’.

 

1953년 8월 15일, 영국과 미국의 지원을 받은 파즈롤라 자헤디 Fazloooah Zahedi 장군이 친위 쿠데타를 일으켰다. 하지만 대대적인 반정부 시위가 벌어지자 자흐디 장군은 체포를 피하기 위해 모처로 도망쳤고, 친위 쿠데타를 지시한 국왕 팔레비는 이라크 바그다드를 거쳐 이탈리아 로마로 도망쳤다. 이렇게 쿠데타는 실패하는 듯했다. 하지만 판세는 나흘 뒤 바뀌었다. MI6와 CIA는 은밀하게 돈을 풀어 반모사데크 시위를 벌였고, 그 와중에 군이 질서회복을 명분으로 탱크들을 동원해 모사데크를 체포하면서 쿠데타에 성공한 것이다. ‘아작스 작전’의 책임자였던 커민 루즈벨트 2세는 1979년 출간한 ‘카운터쿠(Countercoup)’란 자서전에서 CIA 고위 요원이었던 자신이 1953년 이란 쿠데타 작전을 책임지고 진행했으며, 영국 MI6의 지원을 받았다고 밝힌 바 있다. 루즈벨트 2세는 시어도어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의 손자이다.

 

 

 

쿠데타로 체포된 후 법정에 출두한 모사데크
팔레비 2세와 아이젠하워

쿠데타가 성공하자 팔레비는 귀국해 권력을 다시 잡았다. 모사데크는 3년형을 살고 출감한 후 고향에서 사실상 연금상태로 살다가 1967년 생을 마감한다. 쿠데타로 강력한 왕권을 다진 팔레비 국왕은 철권을 휘둘렸다. 노골적인 친미 친서방 정책을 표방한 그는 비밀경찰을 동원해 민주인사들을 끔찍하게 탄압했다. 민주주의를 주장하는 대학생 및 지식인들과 반외세 이슬람원리주의를 주장하는 종교지도자들이 반왕실 반팔레비란 기치 아래 하나로 모이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세계를 경악시킨 테헤란 미 대사관 점거사태 

 

1979년 11월4일, 미국은 물론 전 세계를 경악시키는 사건이 이란 수도 테헤란에서 벌어졌다. 대학생들이 미 대사관 담을 넘어가 건물을 점령하고 90명을 인질로 잡은 것이었다. 앞서 10월 아야톨라 호메이니 Ayatollah Khomeini (본명은 루홀라 호메이니 Ruhollah Khomeini)가 이끄는 이슬람 혁명으로 권좌에서 쫓겨난 레자 샤 팔레비에 대해 미국 정부가 췌장암 치료를 이유로 입국허가를 내준 것이 문제였다. 이들은 여성과 흑인을 풀어준 뒤 52명을 인질로 잡고, 미국 정부에 레자 샤 팔레비의 즉각적인 인도를 요구했다.

 

 

1979년 이란 미국대사관 점령 사건 

1980년 4월24일 지미 카터 Jimmy Carter 대통령은 이른바 ‘독수리 발톱 작전 Operation Eagle Claw’을 승인했다. 특공대원 90명이 테헤란 외곽지역에 침투한 다음 헬리콥터를 이용해 대사관 안으로 전격 진입해 인질을 빼내오는 작전이었다. 하지만 헬기 8대 중 2대가 고장을 일으킨 데다, 헬기 1대와 수송기가 모래폭풍에 휩싸여 충돌하는 바람에 승무원 8명이 사망하고 4명이 부상하면서 작전은 처참한 실패로 끝났다. 결국 이듬해 1981년 1월 로널드 레이건 Ronald Reagan 대통령 취임식에 맞춰 인질들이 풀려나면서 테헤란 미대사관 점거 사태는 444일 만에 종결됐다.이 사건을 계기로 단절된 양국 외교관계는 40년이 넘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하메네이 최고지도자

 

 이란이슬람공화국은 이슬람 법학자 통치론과 민주주의를 조합한 독특한 정치 구조를 가지고 있다. 행정부의 수반은 4년마다 한 번씩 국민들이 직접 선거로 뽑는 임기 4년의 대통령이지만, 국가 원수는 종신직인 최고지도자 Supreme leader 이다. 즉, 세속 정치세력과 이슬람교 지도자가 권력을 나눠 갖는 일종의 과두 통치체제라고 할 수 있다. 이슬람법학자인 최고지도자는 행정부와 협의해 모든 정책을 결정·감독하며 군통수권, 전쟁 및 종전 선언권을 가지고 있다. 대통령은 정규군에 대한 통수권을 가지고 있는 반면 최고지도자는 정예군 혁명수비대와 준 경찰조직인 바시즈Basij 민병대에 대한 통수권을 가지고 있다. 또 국민이 선출한 대통령에 대한 임명권, 대법원 판결이나 국회가 재적 3분의 2 찬성으로 탄핵한 대통령에 대한 최종 해임권도 갖고 있다. 최고 권력기구이자 대선 후보 심사권을 가진 혁명수호위원회의 위원 12명 중 6명에 대한 임명권, 사법부 수장인 대법원장 및 국영언론사 사장 임명권 역시 최고지도자의 몫이다. 국회를 통과한 법률이 이슬람법에 맞는지 여부를 다시 심사한 후 통과 또는 거부할 수 있는 권한 역시 가지고 있다.

 

종신직인 최고지도자는 국민 직선으로 선출된 86명의 이슬람법학자로 구성된 국가지도자운영회의 Assembly of Experts에 의해 선출된다. 임기 8년인 국가지도자운영회의 위원은 최고지도자를 선출하고 감독하며 해임할 수도 있지만 실제로 감독 및 해임권을 행사한 적은 아직 없다. 최고지도자의 유고로 자리가 비게 되면, 새로운 지도자가 선출될 때까지 대통령, 대법원장, 헌법수호위원회의 이슬람법학자 3인으로 구성된 운영회의가 직무를 대행하게 된다.

 

초대 최고지도자는 1979년 이슬람 혁명의 중심이었던 아야톨라 호메이니이다. 1989년 호메이니가 사망하자 국가지도자운영회의는 고인이 자신의 후계자로 사실상 지목했던 알리 하메네이 Ali Khamenei를 최고지도자로 선출했다.하메네이는 1960년대부터 반 샤 Shah(이란 국왕)운동에 뛰어들면서 호메이니의 최측근 인사 중 한 명이 됐다. 1979년 혁명 후 이슬람공화당 사무총장과 혁명수비대 차관 등 요직을 거쳤다가, 1981년 모하마드 알리 라자이 Mohammad Ali Rajai 대통령이 폭탄테러로 살해된 후 치러진 선거를 통해 대통령에 당선돼 1989년까지 재직했다. 1981년 폭탄테러 당시 현장에 있었던 그는 오른팔에 심한 상처를 입어 아직도 잘 쓰지 못한다.

 

미국과 이란 관계는 2001년 9.11 테러 뒤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에 있는 탈레반을 축출할 때 이란이 협력하는 등 일부 개선 조짐도 보였지만, 이란 핵개발로 다시 냉각됐다. 2009년에 출범한 버락 오바마 Barack Obama 행정부가 대이란 정책의 변화를 추진하면서 2015년 드디어 이란 핵협상이 타결됐다. 하지만, 2017년 취임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오바마 행정부의 이란 정책을 완전히 뒤엎고 핵합의 파기를 선언하면서 양국 관계는 크게 악화됐다.

 

미국은 1979년 이란에서 이슬람혁명이 일어났을 당시 테헤란 주재 미 대사관이 시위대에 점령당해 자국인들이 인질로 억류됐던 사건을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다. 당시 겪었던 치욕은 이란 체제에 대한 미 보수진영의 거부감 또는 증오의 뿌리라고 할 수 있다. 반면, 이란 국민들은 1953년 자국의 민주정부를 쿠데타로 제거한 미국의 만행을 아직도 잇지 못하고 있다. 지난 2018년 8월 19년 자바드 자리프 당시 이란 외무장관은 트위터를 통해 “65년 전 오늘 미국은 이란 대중에 의해 선출된 모사데크 박사의 민주정부를 전복하고 독재를 복원한 뒤 이란인들을 25년간 예속시켰다“고 비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