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몰랐던 역사8- 지브롤터, 300년 넘게 계속되는 英-西갈등
2014년 4월 2일, 페데리코 트리요 Federico Trillo 영국 주재 스페인 대사가 긴장한 외무부 청사에 들어섰다. 2011년 부임한 이후 영국 외무부에 불려나온게 벌써 네 번째이지만, 그의 얼굴 표정에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영국 정부는 이베리아 반도 남단인 영국령 지브롤터 Gibraltar 갈등과 관련해 스페인 대사를 초치했다고 밝혔다.스페인 해양조사선이 영국 영해를 ‘도발적으로 침입’해 영국의 주권을 침해했기 때문이란 것이다.
그로부터 3년 뒤인 2017년 4월 4일, 이번에는 스페인 해군 소속 초계함 한 척이 지브롤터 영해에 진입했다가 영국 해군의 경고를 받고 물러갔다. 영국과 스페인은 이번 사태를 놓고 서로 다른 주장을 폈다.영국 외무부는 "해군은 영국령 지브롤터 영해에서 모든 불법 침입을 검문하고 있다"며 "이번 경우에도 마찬가지 대응을 했다"고 밝혔다. 반면 스페인 외무부는 함선이 자국 영해를 항해했을 뿐 영국 영해를 침범하지는 않았다고 주장했다.
스페인 속의 작은 영국
스페인은 브렉시트 Brexit (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를 앞두고 또다시 지브롤터 문제를 제기하고 나섰다. 2018년 2월 25일 알폰소 다스티스 Alfonso Dastis 스페인 외무장관은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와의 인터뷰에서 "스페인은 지브롤터 공항 공동관리와 탈세, 담배 밀수 등에 대한 더 큰 협력을 원한다"며 "주권도 포기할 수 없는 부분이지만 이번 협상 단계에서는 문제가 아니다"고 밝혔다. 스페인은 지브롤터 공항에 대해 "스페인 땅에 불법으로 지은 공항"이라고 주장하면서, 브렉시트를 앞두고 EU와 영국이 지브롤터 공항과 관련해 체결하는 협상에 거부권을 행사하겠다고 경고해왔다.1713년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을 마무리하기 위해 체결된 위트레흐트 조약 Treat of Utrecht에 따라 스페인이 영국에게 지브롤터의 항구과 마을을 할양한 것은 맞지만, 공항을 건립할 권리까지 준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반면 영국은 지브롤터 공항은 자국 땅에 지은 자산이라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브렉시트가 발효되기 불과 하루전인 2020년 12월 31일 영국과 스페인 정부는 지브롤터에 관한 성명을 발표했다. 양국이 장시간에 걸쳐 협상을 벌인 끝에, 영국의 EU 탈퇴 이후에도 지브롤터가 솅겐조약 Schengen Agreement 등 EU의 일원으로 누릴 수 있는 모든 프로그램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합의했다는 것이다. 솅겐조약은 EU 회원국 간에 체결된 국경 개방 조약이다. 1985년 프랑스 독일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5개국 대표가 룩셈부르크에 있는 작은 마을인 솅겐에 모여 국경검문소 철폐와 자유로운 왕래를 약속하고 최장 90일간의 비자없는 여행이 가능하게 되었다.지브롤터에 정기적으로 다니면서 일을 하고 있는 스페인 국민이 1만5000명이 넘고 실제로 이 영국령의 노동력 거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지브롤터에 대한 솅겐조약 적용 여부는 매우 중요한 이슈이다.
‘스페인 속의 작은 영국’으로 불리는 지브롤터는 스페인 이베리아 반도 남쪽 끝에 위치하고 있다. 여의도 면적의 3분의 2 정도인 6.8km², 총인구는 약 3만명. 스페인 안달루시아 지역의 카디스주에 위치한 라 리네아 데 라 콘셉시온 La Línea de la Concepción과 국경을 맞댄 이곳은 전 세계의 영국 속령(해외영토) 14개 중 유일하게 유럽대륙 내에 자리잡고 있다. '더 록(The Rock)'이란 별명으로 불리기도 하는 '지브롤터 바위산( 425m)'을 제외하면 인상적인 문화재나 지형지물은 거의 없다. 영국 정부가 파견하는 총독이 있지만, 외교와 국방을 제외한 모든 통치권한은 총선을 통해 선출된 자치정부가 갖고 있다.
지브롤터란 아랍어로 '타리크의 산 tariq’s Mountain'이란 뜻이다. 타리크는 무어인 지도자 타리크 이븐 지야드 Tariq ibn Ziyad 의 이름이다. 타리크가 이끄는 이슬람 세력은 711년 지브롤터를 차지한 후 스페인을 정복해 나갔다. 스페인은 1501년 지브롤터를 되찾았지만 200여년 뒤 다시 외세에 빼앗기는 수모를 당하게 된다.
영국과 스페인은 유럽과 아프리카 대륙, 대서양과 지중해의 관문인 이 지브롤터를 둘러싸고 지난 수백년간 치열한 영토분쟁을 벌이고 있다.스페인은 포클랜드 Falklands( 스페인어로 말비나스 Malvinas ) 때문에 반영감정이 높은 아르헨티나와 연대해 지브롤터 갈등을 끝임없이 이슈화하고 있고, 영국은 지브롤터를 건드릴 경우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자세이다.
한동안 잠잠한 듯했던 지브롤터 갈등이 수면위로 올라온 것은 2013년 지브롤터 자치정부가 수자원 보호를 명목으로 위해 최근 인근 바닷 속에 콘크리트 블럭 어초를 투하한 것이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 스페인은 지브롤터 측이 영해가 맞닿아있는 지점에 어초들을 투하하면서 사전 통보하지 않았고, 자국 어선의 어망이 어초에 걸려 찢어지는 등 피해가 잇따르자 보복조치로 국경검문검색 강화를 단행했다. 국경 검문검색 강화로 평소 몇분 밖에 걸리지 않던 국경통과 시간이 무려 5∼6시간으로 늘어났고, 30도가 넘는 한여름 땡볕아래서 통과 순서를 기다리는 사람과 자동차들이 몇 km 씩 뒤엉켜 아수라장을 이루는 일이 벌어졌다. 이런 와중에 영국은 해군의 지브롤터 지역 군함훈련을 예정대로 강행해 양국간의 대치 상황마저 벌어질 수있는 긴장된 분위기를 조성했고, 이에 맞서 스페인은 지브롤터행 비행기의 스페인 영공 통과를 불허하겠다며 으름장을 놓았다.
양국이 이처럼 치열한 신경전을 벌이고 있는 것은 지브롤터의 지정학적, 경제적 중요성이 결코 적지 않기 때문이다. 영국으로서는 지브롤터가 지중해로 들어가는 출입문인데다가, 이곳에 있는 해군기지를 통해 유럽본토에 군사적 영향력을 행사해왔다.영국이 지브롤터 영해권을 행사하고 있는 점은 스페인의 입장에서는 분통터지는 일이다. 스페인이 지브롤터의 콘트리트 어초에 그토록 민감한 반응을 나타낸 이면에는 영해권 문제가 있는 셈이다.스페인은 지브롤터의 너무 낮은 세율에 대해서도 못마땅해 하고 있다. 영국이 지브롤터에 낮은 세율을 부과해 스페인 부호들의 탈세를 부추기고 있다는 것이다. 스페인의 법인세율은 25%인 반면, 지브롤터의 법인세율은 10%에 불과하다.
지브롤터 갈등이 장기화될수록 피해를 보는 쪽은 사실 스페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페인은 아르헨티나와 손잡고 지브롤터 문제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상정하는 계획을 추진 중이다. 1960년 통과된 유엔 결의안 1514호에 "영토통합을 해하는 시도는 유엔 헌장 원칙과 불일치된다"는 조항을 근거로, 원래 스페인 땅이었던 지브롤터와의 통합을 영국이 막고 있다는 주장이다. 반면, 영국은 유엔 결의안 1514호가 자결권은 인정하고 있는데, 지브롤터 국민들이 영국 속령으로 남기로 스스로 결정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유럽의 역사를 바꾼 전쟁
지브롤터를 둘러싼 영국과 스페인의 갈등은 16세기로 거슬러올라간다. 당시 엘리자베스 1세 Elizabeth I 치하의 잉글랜드와 펠리페 2세 Felipe II의 에스파냐는 해상패권을 놓고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헨리 8세부터 시작된 종교적 갈등도 양국 관계의 악화 원인 중 하나였다. 잉글랜드가 가톨릭을 탄압하자 에스파냐는 아일랜드의 가톨릭교도들의 반란을 지원했고, 영국은 이에 대한 복수로 에스파냐령 네덜란드의 독립세력을 부추겼다. 에스파냐는 결국 1588년 8월 당시 최강전력을 자랑하던 무적함대 ‘아르마다 Armada’를 동원해 잉글랜드 토벌에 나섰다. 메디나 시도니아 Medina Sidonia 장군이 이끈 함대는 22척의 전함과 무장상선 108척으로 이뤄져 있었다. 영국해협에서 벌어진 해전의 결과는 에스파냐의 참패. 아르마다 함대는 잉글랜드 해군의 공격에 어이없게 무너졌을 뿐만 아니라 퇴각하던 중 큰 폭풍을 만나 그나마 남은 전함과 무장상선들을 잃기까지 했다. 이 전투로 에스파냐는 35척의 선박과 600명 이상의 군인들을 잃었다. 부상자는 800명 이상, 포로로 잡혀간 군인도 397명이나 됐다. 반면 잉글랜드는 화공선 8척을 소실하고 약 100명의 군인을 잃는 피해를 입는데 그쳤다. 이 해전은 유럽을 바꾼 역사적인 사건으로 평가받고 있다. 스페인 무적함대를 물리친 영국이 해상 패권을 장악하면서 ‘해가 지지 않는’ 대영제국으로 발돋음할 수있게 됐기 때문이다.
두 번째 충돌은 100여 년 뒤인 1704년 영국이 스페인 왕위계승 전쟁에 개입하면서 빚어졌다. 스페인의 카를로스 2세 Carlos II가 후계자 없이 죽자, 복잡하게 얽힌 혼맥 때문에 유럽의 전 왕실이 왕위계승권을 주장하고 나섰다. 이런 와중에 1704년 8월 4일 영국의 조지 루크 George Rooke 제독이 이끄는 영국-네덜란드 연합함대가 지브롤터를 전격 점령하는데 성공한다. 1713년 7월에 체결된 위트레흐트 조약에 의해 프랑스 국왕 루이 14세 Louis XIV의 손자이자 루이 15세의 숙부인 ‘앙주의 필리프(프랑스어로 필리프 당주 Philippe d’Anjou )’공작이 스페인 국왕으로 인정받게 된다. 스페인 보르본 Borbon(프랑스어로 부르봉)왕조의 초대국왕이 된 펠리페 5세 Felipe V는 왕좌를 차지하는 댓가로 프랑스 왕위계승권 영구포기는 물론 유럽 곳곳에 있던 영토를 포기했다. 이때 영국은 지브롤터와 메노르카 Menorca(영어로 미노르카)를 얻어 지중해에서 자국 해군이 활용할 수 있는 중요한 거점을 확보했다.영국은 1830년 지브롤터의 법적 지위를 직할식민지(Crown Colony)로 지정했고, 1946년에 ‘영국 해외령’으로 변경했다.
지브롤터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의 주요 작전기지로 이용됐다. 독일은 미군의 거점을 초토화 시키기 위해 지브롤터에 무차별 폭격을 가했고, 지브롤터를 점령하기 위한 계획도 수립했다. 그 계획이 바로 ‘펠릭스작전(Operation Felix)’이다.
1940년 6월 프랑스를 함락시킨 독일 나치군 내부에서는 영국을 견제하기 위해 영국령 지브롤터를 점령해 유보트 기지로 사용하자는 주장이 제기됐다. 나치 공군 총사령관이었던 헤르만 괴링은 아돌프 히틀러에게 영국침공 보다는 지브롤터 점령 필요성을 제안했고,알프레드 요들 장군도 스페인, 지브롤터, 북아프리카, 수에즈 운하를 점령하는 작전을 히틀러에게 보고했다.
1940년 8월 24일, 드디어 이 작전에 대한 히틀러의 공식 승인이 떨어졌다. 1940년 10월 23일 히틀러와 스페인 독재자 프란시스코 프랑코 Francisco Paulino Hermenegildo Teódulo Franco y Bahamonde가 프랑스 국경마을 앙다예 Andaye에서 은밀히 회동했다. 독일 육군이 국경을 넘어 지브롤터로 들어가려면 스페인의 협력이 반드시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히틀러는 프랑코에게 영국령 지브롤터를 점령했다가 스페인에게 돌려줄테니 ‘추축국 Axis Powers’ 일원으로 전쟁에 참여하라고 제안했다.
나치와 꽤 돈독한 관계였던 프랑코의 반응은 의외였다. 오랜 내전으로 인해 스페인이 피폐해졌기 때문에 다시 전쟁을 벌일 여유가 없다는 것이었다.프랑코의 속내는 독일을 애타게 만들어 경제적, 군사적으로 더 많이 뜯어내려던 것이었다. 그는 히틀러에게 참전하는 조건으로 영국에 빼앗긴 지브롤터와 북아프리카의 프랑스령 일부를 요구했다. 이에 열받은 히틀러가 이탈리아 독재자 베니토 무솔리니 Beniti Mussolini에게 보낸 한 편지에서 “프랑코와 다시 만나 협상하느니 차라리 내 이빨 서너개를 뽑겠다”고 토로했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히틀러와 프랑코가 결국 협력각서에 서명하기는 했지만 ‘펠릭스 작전’은 결국 현실화되지 못했다. 프랑코가 계속 애매모호한 태도를 나타내는 데다가 동부전선 상황이 악화되면서 지브롤터에 신경을 쓸 여유가 없어진 것이다.
2차세계대전 종전 후 지브롤터는 또다시 유럽의 골칫덩어리로 부상한다. 프랑코 총통은 영국을 상대로 지브롤터 반환을 요구하며 1969년 6월8일 국경봉쇄를 단행했다. 발단은 같은해 영국이 제정한 지브롤터 헌법이었다. 이 헌법은 지브롤터의 완전한 자치권을 보장하고, 주민들의 동의없이는 지브롤터의 지위 변경에 대한 어떤 협상도 할 수없도록 한 것이 핵심이었다. 스페인의 국경 및 경제봉쇄 조치에 맞서 지브롤터 자치정부는 같은해 9월 10일 ‘주권 주민투표’를 강행한다. 헌법에 따라 주민들이 직접 주권을 결정하겠다는 것이었다. 결과는 99.64%의 ‘영국 주권 찬성’. 스페인 주권을 지지한 주민은 0.36%에 불과했다. 영국의 뜻대로 된 셈이다.
그로부터 13년 뒤인 1985년 2월 5일에야 스페인과 지브롤터의 국경이 완전 개방됐다. 스페인 정부가 EU의 전신인 유럽공동체(EC)에 가입허가를 받는 조건으로 지브롤터 문제를 덮었던 것이다. 지브롤터 주민들은 2002년 7월 12일 치러진 주민투표에서도 영국의 손을 들어줬다. ‘지브롤터에 대한 영국과 스페인의 공동주권을 지지하는가’란 물음에 투표자의 98.97%가 ‘반대’표를 던졌다. ‘지지’는 1.03%였다. 2016년 주민투표에서는 96%가 EU잔류를 선택했다. 2016년 브렉시트 국민투표 당시에도 지브롤터 주민의 96%가 스페인이 아닌 영국령 존속을 지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