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따라가는 여행-벌교 보성 고흥
오래 전부터 벌교에 꼭 가보고 싶었습니다. 꼬막 때문은 아니고, 벌교를 찾는 타지 사람들 대부분이 그렇듯 소설 <태백산맥> 때문이었지요(오래전 완독을 하지 못하고 숙제처럼 미뤄뒀던 이 소설을 다시 읽고 있습니다. 워낙 늦되는 사람이어서인지, 핑계거리를 찾고 싶은 건지, 이제야 이 소설을 읽기에 적당한 나이가 된 느낌이 듭니다). 사실 제게 벌교는 매우 낯선 이름이었는데, <태백산맥>에서 이야기가 펼쳐지는 벌교는 어떤 곳인지 늘 궁금했습니다. 두번째 이유는 '사람' 이었습니다. 벌교 출신의 천연염색가 한광석 씨가 서울에서 염색전시회를 열었을 때 직접 만난 적이 있는데, 그 분이 만들어낸 쪽빛과 함께 사투리가 매우 인상적이었어요. 우리나라 출판과 언론, 그리고 문화의 한 획을 그은 '뿌리깊은 나무'를 펴낸 한창기 발행인의 조카인 그는 전통 염색을 되살려낸 예술가로 유명하죠. 요즘도 왕성하게 작품활동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근데, 그 분의 벌교 사투리가 제 귀에는 마치 판소리 가락처럼 너무나도 찰지고 리드미컬하게 들렸던 겁니다. 평소 사투리에 특별히 관심이 있었던 건 아닌데 유난히 그 분의 사투리가 재미있었던 게 생각납니다. 너무 재미있던 나머지 저도 모르게 그 분 앞에서 좀 웃었던 것도 같습니다. 혹시나 실례가 되지 않았을까 아직도 맘에 걸리는데, 폄하하려던 뜻을 전혀아니었습니다. 벌교에 가보고 싶은 세번째 이유는 보성여관입니다. <태백산맥>에는 남도여관으로 등장하지요. 문화유산국민신탁이 인수해 관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예전부터 알고 있었는데, 그래서 직접 내부를 살펴보고 기회가 되면 언젠가는 한번 숙박도 해보고 싶었습니다.
아무튼, 오랫동안 맘에만 두고 있던 벌교와 보성, 고흥을 다녀왔습니다. 목적지를 향해 가던 도중에 들렀기 때문에 제대로 보지는 못했네요. 가을 쯤에 다시 가볼 계획을 또 세워봅니다.
벌교 '태백산맥 거리'의 랜드마크인 보성여관입니다. 일본식 건물로, 지금은 작은 공연장과 찻집, 그리고 숙박시설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소설 속에서는 이 여관의 주인이 좌익세력에 의해 죽임을 당한 후 그의 아들이 비슷한 처지의 동료들과 함께 밤마다 좌익세력 가족들에게 보복테러를 자행하지요. 제가 이곳을 찾았을 때는 마침 자그마한 공연이 진행되고 있었어요. 소리의 고장 남도 답게 관객들의 반응이 뜨거웠습니다. 저도 잠시 서서 구경했는데, 공연자 분들의 성함은 알 수없었지만, 귀기울여 듣노라니 참 좋더군요.
이 공연장 옆으로 난 복도를 지나 안쪽으로 들어가면 정원과 숙박할 수있는 방이 나옵니다. 한창 시절엔 오성급 호텔도 부럽지 않은 곳이었다고 하지요.
숙박동의 이층 다다미 방의 모습은 이렇게 생겼습니다.
제겐 이런 일본식 복도와 나무 문 등이 아주 익숙합니다. 어렸을 때 부모님을 따라 갔던 할아버지 집이 바로 적산가옥이었는데, 이층 복도가 딱 이런 모습이었거든요. 어린 눈에는 좀 무서웠던 것도 같습니다. 특히 오실(이부자리 등을 넣어두는 깊숙한 방) 을 무서워했는데, 오실 문을 스스르 열고 귀신이 나올 것만 같았거든요. 일본 영화에 유난히 귀신이 많이 나오고, 또 잘 만든 귀신영화가 많은 이유는 바로 구석과 문이 많은 일본 집 구조 때문이란게 저의 뇌피셜입니다. ㅎㅎ
보성여관과 조금 떨어진 곳에 금융조합 건물이 있습니다. <태백산맥>에도 자주 언급되지요.
벌교금융조합은 일제강점기 시절 농어민들에게는 수탈의 상징과도 같았던 곳입니다. 금융조합의 돈을 빌렸다가 소작농으로 전락하는 농민들도 많았고요. <태백산맥>에는 금융조합에서 일하는 송기묵이란 인물이 '멋부리기 보다 이재 솜씨가 한 수 더 앞서는' 사람으로 묘사되고, 그가 좌익에 죽임을 당한 후엔 아들 송성일이 동료들과 보복테러를 벌이다가 좌익 하대치의 아버지 하판석을 죽이는 장면이 나오지요. 지금은 화폐의 역사 등을 다루는 전시공간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벌교의 전성기는 일제 강점기입니다. 일제의 수탈을 위한 목적으로 벌교가 개발되면서, 돈과 사람들이 이곳에 몰렸다고 합니다. '벌교에서 주먹자랑하지 말라'는 유명한 말이 있을 정도로 당시 벌교에는 깡패들도 많았다고 하지요. 일제가 왜 벌교를 개발했는지는 <태백산맥>에 여러차례 언급됩니다. 낙안 들녘 아래에 있는 벌교는 바닷물이 드나드는 하천을 중심으로 형성된 가난한 갯마을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일제는 왼쪽으로는 광주, 오른쪽으로는 순천과 여수의 사이에 자리잡은 벌교를 내륙과 해안지역의 물자를 집중시켜 유출할 수 있는 최적지로 주목하고 개발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뿌리깊은 지주-소작인 갈등에다 민족갈등, 이념갈등까지 혹독하게 치러야만 했던 듯합니다. <태백산맥>은 1948년 여순사건의 여파로 벌교를 장악했던 염상진의 좌익세력이 불과 며칠만에 패퇴하면서 시작되지요. 소설이 끝나는 곳도 역시 벌교이고요. 실제로, 제주도 4.3 좌익 토벌 명령을 거부한 국군 14연대 내 좌익세력과 토착 좌익세력은 여수, 순천, 보성, 광양을 거의 장악했고 구례, 곡성, 남원, 하동 일부까지 장악했다고 합니다. 이런 와중에서 벌교를 장악한 좌익에게 100여 명의 우익인사들이 처참하게 죽임을 당했고, 진압군이 들어온 이후엔 이전 보다 더 끔찍한 복수극이 벌어졌지요. 그로부터 2년 뒤인 1950년에는 전쟁이 벌교는 물론 전 국토를 휩쓸게되지요.
지난해 6월 국회가 여순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을 통과시켜 올해부터 조사가 추진 중입니다. 여수와 순천 뿐만 아니라 벌교 보성 광양 고흥 등에서 이뤄졌던 군경에 의한 민간인 학살에 관한 진상이 이번에 규명될지가 관심사입니다.
아쉬움을 남기고 보성으로 향합니다. 소설에 등장하는 소화의 집, 현씨 부자 집, 정하섭 집, 김범우 집,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던 소화다리, 중도 방죽 등도 가보고 싶었지만 다음 기회로 미뤄둡니다.
보성 대한다원의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TV 화면으로 봤던 것보다 훨씬 가파른 차밭의 모습에 깜짝 놀랐네요. 보성 차의 역사는 약 16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합니다. 일제강점기 때 녹차를 즐겨마시는 일본인들에 의해 보성과 정읍, 광주 등에서 차 산업이 발전하게 됐습니다. 광주의 무등다원, 정읍의 소천다원, 보성의 보성다원이 유명했다고 하네요.
다음 여행지는 고흥입니다. 사실 고흥에 대한 사전 정보라고는 나로우주센터 뿐이었습니다. 이번에 가보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고흥반도란 말처럼 정~~말 넓은 곳이더라고요. 소록도가 아름답다는 말은 들었지만 코로나사태로 아직도 폐쇄돼 들어가볼 수는 없었습니다. <태백산맥>에는 염상구가 좌익세력을 피해 도망친 곳으로 잠시 언급됩니다. 고흥반도의 끝자락 외나로도 역시 벌교처럼 일제강점기 때 개발됐다고 합니다. 특히 삼치가 많이 잡혀서, 당시 전국 최대 규모의 삼치 어시장이 열리던 곳이었습니다. 지금도 삼치구이를 간판으로 내건 식당들이 눈에 띄는데, 아쉽게도 맛 볼 기회는 얻지 못했네요. 나로도항은 일제강점기에 전기와 수돗물이 공급됐던 부자마을이었다고 합니다. 1970년대 말부터 수산업이 쇠퇴기를 맞으면서 조금씩 잊혀져가다가 나로우주센터를 계기로 다시 관심을 받고 있는 추세라고 합니다. 아직은 관광 인프라가 그리 잘 갖춰져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외나로도 쑥섬을 찾았습니다. 나로도 여객센터에서 배를 타고 5분만에 도착할 수있는 작은 섬입니다. 주민들이 고양이들을 거둬 키우고 있는데, 50여마리가 있다고 해도 잘 눈에 띄지는 않더군요. 섬의 나즈막한 산 정상의 작은 꽃 정원과 산책길, 바닷가 절벽 등이 아기자기합니다. 동백나무가 지천이라, 제 철에 오면 붉은 동백숲이 퍽 아름다울 듯 싶습니다. 하긴 남도 곳곳에 아직도 동백꽃이 참 많이 피어있더군요. 배에 타기 전에 쑥섬에 대해 안내와 주의사항을 설명해주는 사람도 있고, 시스템이 잘 갖춰져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쑥섬 선착장의 고양이 조형물
선착장 카페의 벽에 걸린 그림
꽃정원의 의자에 고양이 한 마리가 따사로운 햇볕을 쬐고 있습니다. 건너편에 나로도 여객센터가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