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여우의 영화 이야기/내가 사랑하는 배우들

랄프 파인스-차갑거나 혹은 뜨겁거나

bluefox61 2006. 6. 26. 23:54

13년전 ‘쉰들러 리스트’에서 랄프 파인스(44·사진)를 처음 보았을 때, 그의 혈관 속에는 뜨거운 피가 아니라 차가운 얼음물이 흐르고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 기억납니다. 

아우슈비츠 유대인수용소 소장이었던 그는 수용소 마당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저택의 2층 베란다에서 모닝커피를 마시면서 기분전환으로 눈에 뜨이는 유대인들을 총으로 쏴 죽이지요. 새하얀 피부, 여자 죄수들의 몸을 타고 흐르던 그의 투명하게 맑은 푸른 눈동자가 뱀처럼 얼마나 섬뜩했든지. 

 

불과 3년뒤 파인스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찾아왔습니다. ‘잉글리쉬 페이션트’에서 아름다운 유부녀에게 사로잡힌 영국군 장교였던 그는 사랑과 자신의 열정에 모든 것을 거는 남자 , 그 자체였지요. 아프리카 사막의 머나먼 동굴에 누워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여자를 구하러 가기 위해 적군 독일군에 영국군의 지도를 넘겼던 행동이 나라에 대한 반역행위가 아니라 가슴 아픈 로맨스로 각인돼있는 것은 파인스의 절절한 눈빛 때문이었을 겁니다. 


‘배우’의 ‘배(俳)’자가 ‘인간이 아닌’이란 뜻을 담고 있다고는 하지만, 영화마다 한 인간의 이미지가 이렇게 다를 수도 있는 것일까요. 영국 국립극단과 로열 셰익스피어 컴퍼니 등 정통연극무대 출신인 파인스는 동세대에서 연기폭이 아마도 가장 넓은 배우가 아닐까 싶습니다. 


어둠과 빛, 잔혹함과 부드러움, 증오와 사랑의 감정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그의 연기는 같은 영국의 선배배우인 제레미 아이언스에 비교될 만합니다. 국내흥행에선 철저히 외면당했던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스파이더’에서 유년의 정신적 트라우마(상처)로 분열된 정신 속에 매몰돼 살아가는 스파이더와 ‘레드 드래곤’의 너무나도 섬세한 감수성을 지닌 살인마 프랜시스를 생생하게 연기해냈던 것을 보면 , 파인스는 분명 빛보다 어둠, 기쁨보다 고통의 의미를 더 잘 이해하는 남자가 아닐까 상상해봅니다. 

 

파인스의 최신작 ‘콘스탄트 가드너’는 사랑을 위해 목숨까지 바치는 남자의 이야기란 점에서 ‘잉글리시 페이션트’와 맥을 같이 하는 영화라고 할 수있습니다. 여주인공 레이첼 와이즈가 이 영화로 올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받았지만, 파인스의 열연 또한 진정 아카데미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