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여우의 영화 이야기/내가 사랑하는 배우들

덴젤 워싱턴 -나를 영웅이라 부르지 말라

bluefox61 2006. 6. 26. 23:56

‘인사이드맨’은 모처럼 할리우드의 호화 캐스팅이 돋보이는 영화입니다. 덴젤 워싱턴과 조디 포스터, 웰렘 데포와 크리스토퍼 플러머, 여기에 최근 주가가 한창 상승중인 영국 배우 클라이브 오웬까지 가세하고 있지요. 

인종갈등 문제에 항상 예민하게 촉수를 드리워온 흑인감독인 스파이크 리는 이 작품에서 배우들의 고정된 이미지를 슬쩍 변형시켜 관객들에게 새로운 느낌을 주고 있습니다. 늘 선과 정의 편에 서있던 덴젤 워싱턴은 경찰 내사과의 조사를 받고 있는 적당히 썩은 인질협상가, 차분하고 이지적이며 독립적인 조디 포스터는 돈과 권력을 가진자를 위해 일하는 로비스트 , 부드러운 카리스마의 배우인 클라이브 오웬은 뭔가 특별한 목적을 숨긴듯한 은행강도로 등장하지요. 

 

이중 가장 반가운 얼굴은 덴젤 워싱턴이었습니다. 모처럼 연기에 날이 선 느낌이었다고 할까요. 


그렇다고 지금까지 그의 연기가 무뎠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영화 속에서 그가 보여준 모습은 정형화된 ‘흑인 영웅’이었지요. 초기작에 속하는 ‘자유의 절규’에서 남아프리카공화국 인권운동가 스티브 비코와 ‘글로리’에서 남북전쟁에 참가한 흑인 병사를 연기한 이래 그는 ‘말콤 X’의 인권투쟁가였고, ‘허리케인 카터’에서 22년만에 자유를 되찾고야마는 불굴의 복서였으며, ‘필라델피아’의 정의로운 변호사였습니다. 

심지어 ‘ 모 베터 블루스’에서 트럼펫을 연주하건, ‘본콜렉터’에서 침상에 꼼짝못하고 누워 수사를 지휘하건, ‘크림슨 타이드’에서 함장에게 항명하며 선상반란을 일으키건 간에 덴젤 워싱턴이 하면 그것이 곧 정의이자 의지의 승리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캐릭터가 워싱턴자체의 이미지로 굳어져버렸다는 점입니다. 


죄송스런 말씀입니다만, 착하고 바른 캐릭터는 지루한 법입니다. 최소한 영화에서만큼은 말이죠. 


‘인사이드맨’의 워싱턴을 보면서 모처럼 ‘트레이닝 데이’의 그를 다시 만난 듯 반가웠습니다. 지금까지 워싱턴이 출연한 수많은 영화들 중 ‘트레이닝 데이’야말로 단연 최고입니다. 비열하고 느믈느믈하며 부정과 부패로 얼룩진 형사 연기로 그는 생애 최초의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나쁜 형사라도, 역시 워싱턴입니다. 그가 연기하는 형사는 본질적으로 인간성이 나빠서가 아니라, 환멸뿐인 이 사회로 인해 죄악과 타락에 빠진 존재이지요. 그러니 관객은 아무리 그가 추악하다할지라도 무조건 돌팔매를 던질 수없게 됩니다. 


그동안 덴젤워싱턴에게 지겹도록 따라다니는 수식어를 꼽으라면 아마도 ‘흑인답지 않은’일 겁니다. 흑인답지 않게 지적이고, 흑인답지 않게 말투가 세련됐고, 흑인답지 않게 수려한 외모를 가졌고, 흑인답지 않게 바르다는 등등 말이죠. 

‘범죄적’인물을 연기한 워싱턴에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많은 박수와 찬사가 쏟아진 것 역시 흑인에 대한 일종의 고정관념이 반영된 것일까요. 아무튼, 나이들어가면서 자신의 고정된 틀을 깨고자 노력하는 배우에겐 억만번의 박수도 전혀 아깝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