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여우의 영화 이야기/영화로 본 세상

‘뮌헨’의 비극을 다시 생각한다

bluefox61 2006. 6. 26. 00:01

1972년 9월 5일 새벽 4시 30분. 독일 뮌헨 올림픽 선수촌은 깊고 평화로운 잠에 빠져 있었다. 선수촌을 둘러싸고 있는 2m 높이의 철조망 담장의 한 곳에서 그때 약간의 웅성거림이 일어났다. 밤새 선수촌 밖 유흥가에서 놀다 돌아온 미국 선수 몇 명이 월장을 시도하고 있었던 것.


그들은 담을 넘으려는 순간 자신들처럼 선수촌에 몰래 들어가려던 젊은이 8명을 발견했다. 어둠 속에서 그들의 얼굴 생김이나 인종을 구별하기는 어려웠지만, 다른 나라 소속 선수들인 것 같았다. 몇 사람은 어깨에 묵직한 더플백을 메고 있었다. 미국 선수들은 이들의 월장을 도와준 뒤 잘 자라는 인사까지 해주고 손을 흔들며 헤어졌다.


8명은 사전에 위치를 파악해놓은 이스라엘 선수들의 아파트 숙소로 접근했다. 이들은 더플백에서 기관총을 꺼내든 뒤, 미리 훔친 열쇠로 이스라엘 선수 아파트 숙소 두 곳의 문을 따고 급습했다. 당시 숙소에서는 선수 및 코치 11명이 아무 것도 모른 채 잠을 자고 있었다.


1972년 뮌헨올림픽 선수촌에서 빚어진 팔레스타인 무장조직원들에 의한 이스라엘 선수 학살사건은 20세기 현대사에서 중동갈등과 테러리즘의 심각성을 최초로 전세계에 각인시킨 사건이었다. 

또한 위성통신기술의 발전 덕분에 세계최초로 TV 생중계된 테러사건이기도 했다. 2001년 9.11 테러가 일어나기 29년 전 일이다. 깨끗한 경쟁과 세계평화의 장이었던 올림픽은 유혈 참사현장으로 바뀌었고, 전세계는 엄청난 비극에 경악했다.


이스라엘 선수촌에 난입한 8명은 야세르 아라파트가 이끄는 파타당의 분파인 ‘검은 9월단’ 소속이었다. 난입과정에서 2명을 사살한 그들은 나머지 9명을 인질로 잡았다. 난데없는 총소리에 놀라 깬 선수촌과 조직위원회, 그리고 독일정부는 상상하지도 못했던 사건 앞에 망연자실했다.


인질범들은 새벽 동이 트자마자 펜싱코치 안드레 스피처와 사격코치 케하트 쇼를 머리에 총을 겨눈 채 창가로 끌고 나왔다. 자신을 ‘검은 9월단’ 소속으로 밝힌 이들의 요구는 이스라엘 내에 수감된 팔레스타인 죄수 234명과 독일 교도소에 있는 적군파 단원 안드레아스 바데르와 울리케 마인호프를 당장 석방하라는 것이었다. 이스라엘의 골다 메이어 총리와 독일의 빌리 브란트 총리는 이들의 요구를 즉각 거부했다.


결국 모든 협상이 무위로 돌아가자, 독일 정부는 이집트 카이로로 날아갈 항공기를 내달라는 인질범들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듯했다. 하지만 뮌헨 인근 군용공항에 대기시켜놓은 비행기 안에는 독일 군인들이 타고 있었고, 공항 곳곳에는 저격 전문 스나이퍼들이 배치돼 있었다.


6일 밤 10시쯤 인질범과 인질들은 두 대의 헬리콥터를 타고 공항에 도착했다. 독일 군경찰 당국은 이들이 헬리콥터에서 내려 비행기로 갈아타는 순간 인질구조작전을 펼칠 계획이었다. 그러나 당시만해도 독일 군경은 테러진압경험이 전혀 없었다. 

무선통신장치조차 장착하지 않은 독일 저격병들이 신호착오로 사격을 시작하자, 인질범들은 헬기 한 대에 폭탄을 투척하고 자폭하는 동시에 선수 9명을 모두 살해했다. 이 과정에서 독일 군경 몇 명도 사망했다. 구조작전은 완전 실패였다. 

공항 건물 옥상에서 이 과정을 지켜보던 이스라엘 군관계자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오합지졸 작전”이라며 통한의 눈물을 흘렸다.


그나마 수확이라면 인질범 3명을 현장에서 체포한 정도였다. 사망한 인질범 5명의 시신은 리비아로 보내졌고, 리비아 정부는 이들을 영웅으로 대접해 정중하게 안장했다. 생존한 인질범 3명도 불과 약 두 달 뒤 무사히 독일을 떠났다. 

10월 29일 루프트한자 여객기 납치범들이 3명의 석방을 요구하자, 뮌헨 사태 때 홍역을 치른 독일 정부가 인질들의 몰살 가능성에 겁을 먹고 3명을 풀어준 것. 3명은 개선장군처럼 리비아로 돌아갔고, 열렬한 환영 속에 기자회견까지 열어 전세계 TV 카메라 앞에서 뮌헨 무용담을 떠벌렸다.

자국 선수들의 학살에 분노한 골다 메이어 이스라엘 총리는 즉각 보복에 돌입했다. 이른바 ‘신의 분노’ 작전이다. 뮌헨 학살 계획에 연루된 팔레스타인 인들과 ‘검은 9월단’ 요인들을 암살하기 위해 이스라엘 비밀정보원 모사드의 정예 멤버들이 암살단원으로 발탁됐다.


이들은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의 내부정보원과 유럽의 친이스라엘 정보기관들의 도움으로 암살 대상 리스트를 작성했다. 1순위는 이탈리아 PLO의 책임자이자 ‘검은 9월단’ 간부로 알려진 와델 아델 자와이터였다. 그는 10월 16일 이탈리아에서 총에 맞아 사망했다. 1992년 프랑스 파리에서 PLO 정보책임자이자 뮌헨사건 모의자 중 한 사람이었던 아테프 베이소가 암살당한 것을 마지막으로 꼭 20년 동안 이어져 온 ‘신의 분노’ 작전은 사실상 종결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의 이-팔 문제 전문가인 아론 J 클라인에 따르면, 모사드가 ‘신의 분노’ 작전에 따라 암살한 사람들 중 베이소를 제외하고 대부분은 뮌헨 사건과 직접 연관이 없었던 반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운동가들이었다. 핵심 모의자들은 동유럽 공산국가나 아랍국 내에 깊숙이 은신해 모사드의 손길이 미치기 어려웠던 반면, 서유럽에서 별다른 보호막 없이 지냈던 무고한 팔레스타인 운동가들이 모사드의 표적이 됐다는 것이다.


뮌헨 사건의 실질적 주모자인 아부 다우드는 81년 바르샤바 커피숍 인근에서 13발의 총탄을 맞고도 살아 남았고, 지난 1999년 프랑스에서 ‘예루살렘에서부터 뮌헨까지’란 자서전까지 버젓이 발간하기도 했다. 현재 70대인 그는 마무드 압바스 현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의 절친한 동료로, 현재까지도 팔레스타인에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