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여우의 세상 이야기/내가 본 세계

분열하는 푸틴 사단

bluefox61 2011. 9. 26. 14:10
"이견이 있으면 사표를 내시오(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대통령)"
"푸틴 총리과 먼저 상의하겠습니다(알렉세이 쿠드린 재무장관)"
 
러시아 대통령과 장관이 공개된 회의석상에서 사표제출을 놓고 날선 말싸움을 벌이는 이례적인 상황이 발생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총리의 2012년 대통령직 복귀계획이 공식화된 후 러시아 권력층 내 균열양상이 심상치않다는 지적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인테르팍스, 리아노보스티 등 러시아 언론들의 보도에 따르면, 메드베데프 대통령은 26일 디미트로프그라드에서 열린 '경제 현대화 및 기술발전위원회' 회의가 시작되자마자 작심한듯 쿠드린 재무장관 겸 부총리를 향해 날선 공격을 시작했다. 
그는 "알렉세이 레오니도비치(쿠드린), 당신이 대통령의 정책방향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취해야할 행동은 단 한가지이다. 그게 뭔지 당신도 알고 있다. 사표를 쓰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어 "이것이 내가 당신에게 하는 제안"이라면서 "빨리 결정해 오늘 중 답을 내놓으시오"라고 밀어부쳤다. 
메드베데프 대통령의 이날 발언은 지난 24일 푸틴 총리가 대선출마를 발표하면서 차기 정부의 총리직을 메드베데프에 맡기기로 했다고 발표한 직후, 미국 워싱턴에서 G20(주요 20개국) 재무장관 회의에 참석중이던 쿠드린이 "메드베데프 내각에서 일할 생각없다"며 차기권력구도에 강하게 반발했던 사실을 겨냥한 것이었다. 지난 2000년부터 11년째 재무장관직을 수행하며 국내외에서 높은 평가를 받아온 쿠드린은 차기 총리로 유력시돼왔으며, 그동안 국방예산증액을 놓고 대통령과 마찰을 빚어왔다.
 
예상치못한 공격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 쿠드린 장관은 "푸틴 총리와 상의해보고 결정하겠다"고 답했다. BBC 등에 따르면, 이 말이 메드베데프 대통령의 화를 더 부채질했다. '푸틴의 꼭두각시'소리를 들어온 메드베데프의 입장에서 쿠드린의 발언은 모두가 입밖으로 꺼내지는 않았지만 마음속으로 인정하는 러시아의 진짜 권력자가 누구인지를 드러낸 것이기 때문이었다. 
메드베데프는 즉각 " 총리를 포함해 누구와도 상의할 수있지만, 아직은 내가 대통령으로 있는 한 (장관의)사표는 내가 결정한다"고 퍼부었다. 이 장면은 TV 화면을 통해 러시아내는 물론 세계각국에 그대로 전달됐다. 일부 러시아 방송사들은 쿠드린의 발언을 삭제해 보낸 것으로 알려졌다.
 
몇시간 뒤,나탈리야 티마코바 대통령 공보실장은 "대통령이 현행절차에 따라 총리의 제청으로 재무장관 경질 명령서에 서명했다"고 발표했다. 경질이냐, 사퇴냐는 불명확하다. 공보실장은 "재무장관 스스로 사직서를 제출하지 않았다"며 경질을 시사했지만, 쿠드린은 리아노보스티와 인터뷰에서 "사표를 썼다"고 주장했다. 
 
메드베데프와 쿠드린은 90년대 초중반 상트페테르부르크 시정부 재직시절부터 푸틴과 절친한 관계를 맺어온 '푸틴 사단'의 핵심인물들이다. 당시 푸틴은 시 대외관계위원회 위원장직을 거쳐 부시장, 메드베데프는 푸틴 보좌관, 쿠드린은 경제재무위원회 위원장 직을 맡았다. 2000년 대선에서 승리해 대통령이 된 푸틴은 쿠드린을 재무장관, 메드베데프에게는 국영가스회사 가즈프롬 사장에 이어 대통령비서실장, 제1부총리 등 요직을 잇달아 맡겼다. 

메드베데프 대통령이 쿠드린을 사실상 경질한 과정에 푸틴이 어떤 태도를 취했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일부 전문가들은 쿠드린 경질이 메드베데프와 푸틴 사이의 분열을 초래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로이터통신은 미국 컨설팅사 유라시안 그룹의 러시아 전문가 클리프 컵챈의 말을 인용해 쿠드린이 차기 푸틴 정부에서 경제자문 또는 중앙은행장으로 발탁될 가능성이 있다고 보도했다. 


대권 복귀가 사실상 확정된 블라디미르 푸틴이 중산층의 자유민주주의 개혁 요구를 수용하지 못할 경우 러시아에서 '아랍의 봄'과 같은 반정부 소요사태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만약 푸틴이 국내 개혁에서 후퇴하게 된다면 스스로 몰락의 씨앗을 뿌리는 일이 될 것"이라면서 "푸틴이 아랍국 독재자들처럼 소셜네트워크의 파워를 거리에서 실감하게 될 수도 있다"고 25일 경고했다.
FT는 러시아 모스크바의 권위있는 싱크탱크인 전력연구센터의 미하일 드미트리예프 대표의 말을 인용해 "모스크바 인구의 40%, 기타 대도시의 20∼30%를 차지하고 있는 중산층이 정치적 기폭장치가 될 수있으며, 실질적인 정치 개혁이 이뤄지지 않을 경우 보다 급진적인 저항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그는 올해초 베도모스티지에 기고한 글에서도 " 선택의 여지가 없는 정치시스템에 대한 (중산층의) 인내심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며 " 이같은 시스템에 대한 저항운동이 점점 더 늘어날 것"으로 전망했다.1991년 소비에트체제 붕괴이후 태어난 만20세 유권자들의 움직임도 향후 러시아 정치향방에 중요한 변수이다. 이들은 기성매체보다 인터넷을 통해 뉴스를 주로 접하는 세대이다. 소비에트 체제를 경험한 적이 없으며 민주주의 체제에 대한 욕구가 높은 이들이 2012년부터 시작될 제3기 푸틴체제에서 반정부 움직임의 핵이 될 가능성도 크다.   
 
푸틴은 지난  24일 모스크바에서 열린 집권당 '통합러시아'의 전당대회를 통해 2012년 치러질 대선출마를 공식발표했다.현재 추세대로라면 그는 2012년부터 2016년까지 6년간의 임기를 마친후 재선돼 2024년까지 대통령직을 차지할 가능성이 높다. 2000∼2008년 두번의 대통령에 이어 2012년까지 4년간의 총리 재임기간까지 합치면, 총 24년에 걸쳐 권력을 장악하게 되는 셈이다. 
미하일 메드베데프 현 대통령은 내년 임기가 끝나는대로 차기 정부에서 총리직 맡기로 내정됐다. 한때 푸틴이 메드베데프에게 차기 대권을 양보하고 '국가지도자'로서만 기능할 것이란 보도도 나왔지만, 2008년 대통령직을 자신의 오른팔인 메드베데프에 넘겨줬을 당시부터 나왔던 4년후 '복권 시나리오'가 한치의 오차도 없이 현실화된 셈이다.
 
푸틴의 대선출마가 공식발표된  후 러시아에서는 25일 수도 푸슈킨광장에서 약 350명이 "푸틴없는 러시아를 지지한다"며 시위를 벌였을 뿐 별다른 시위 움직임은 일어나지 않고 있다. 러시아인 대부분이 푸틴의 권력복귀를 오래전부터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왔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그러나 내부적으로는 '밀실 권력담합'에 대한 불만이 비등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사는 42세 언론인 옥사나는 로이터통신과 인터뷰에서 푸틴의 대선출마를 "러시아 민주주의 후퇴"로 비판하면서 "언젠가는 러시아가 문명 국가가 될 것이란 국민의 기대가 줄어들고 있다"고 말했다. 
35세 건축가 세르게이는 "이젠 (러시아를) 떠나야될 때가 된 것같다"며 개혁없는 정치시스템에 대한 불만을 감추지 않았다. 예카테린부르크의 38세 주부 이리나는 " 국민과 상관없이 권력자들이 이미 오래전 정해놓은대로 나라가 시계바퀴처럼 움직이고 있다"고 말했고, 티토프의 은퇴노동자 니콜라이는 "정부는 국민들에게 공허한 약속만 남발할 뿐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며 환멸감을 감추지 않았다.
 
한편, 블룸버그통신은 25일 차기 푸틴정부가 공공재정 개혁, 석유의존 경제체제의 변화, 내부갈등 해소 등에 실패할 경우 레오니드 브레즈네프 전소련서기장의 18년체제때처럼 스태그네이션(침체)시대에 처할 위험성이 있다고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