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여우의 영화 이야기/내가 사랑하는 배우들

제임스 스페이더 -보기보다 독특한 그대

bluefox61 2006. 8. 11. 15:57
삶에 찌들었지만 아직도 누군가에게 예뻐보이고 싶은 중년의 여자와 말끔한 여피풍의 젊은 남자가 공원을 산책합니다. 말없이 걷던 남자가 갑자기 여자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여자의 풀어진 운동화 끈을 고쳐 매주기 위해섭니다. 막노동으로 거칠어진 여자의 손이 낡은 운동화위에 숙여진 남자의 금발머리칼을  살며시 쓰다듬습니다. 
 
불후의 명작도, 논쟁적 걸작도 아닌데 유난히 가슴 깊이 새겨진 영화나 영화 속 한장면이 있습니다. 평론가들의 객관적인 평가와 상관없는 나만의 명화인 셈이죠. 제게 그런 영화는 루이스 만도키 감독의 `하얀 궁전(1990)'입니다.

동네식당에서 여급으로 일하는 무식한 중년 여성(수전 서랜든)과 20대말의 성공한 광고회사 간부(제임스 스페이더)는 성적으로 강하게  끌린다는 점 이외에 공통점이 하나도 없습니다. 하지만, 두사람은 결국 서로의 깊은 상처를 알아보게 됩니다. 사랑보다 더 강한 것이 연민, 달콤한 말과 강렬한 포옹보다 더 가슴을 움직이는 것은 인생이란 긴 길을 함께 걸어가기 위해 상대방의 풀어진 운동화 끈을 매주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제임스 스페이더(46.사진)를 처음 만난 것은 소더버그 감독의 `섹스 , 비디오테이프 그리고 거짓말(89)'이었습니다. 핸섬하기는 해도 그리 강렬한 인상은 아니었지요. 그가 90년대 로맨틱 히어로로 등극할 수 있었던 것은 단연 `하얀 궁전' 덕분입니다.
하지만 `울프(94)'의 야비한 출세주의자나 `크래쉬(96)'의 자동차 충돌에서 성적 흥분을 경험하는 남자 역할도 잘 들어맞는 것을 보면 , 스페이더의 영화적 스펙트럼이 결코 단순하지 않다는 점을 간파할 수 있습니다. 사실 그가 출연한 영화들의 수준은 들쭉날쭉입니다. `스타게이트(94)'같은 블럭버스터에도 출연했지만 A급 스타로 자리잡지는 못했고, `보스턴 리걸'같은 TV 드라마로 인기의 명맥을 이어나가기도 했지요.
 
이처럼 지지부진한 활동에 실망하던 팬들의 갈증을 단숨에 풀어준 작품이 있었으니 바로 4년전 개봉한 `세크리터리'였지요. 새디스트 변호사와 마조히스트 여비서의 관계를 이해할만한 또다른 형태의 사랑으로 느껴지게 만든데에는 스페이더의 연기덕이 큽니다. 스페이더의 독특한 영화취향에 새삼 경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