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저런 이야기들

캐스린 웨더스비 교수

bluefox61 2012. 12. 27. 17:09

지난 6일 전국경제인협회가 서울 웨스틴조선호텔에서 개최한 제23회 시장경제대상 시상식에서 미국인 여교수가 특별상을 수상했다. 주인공은 캐스린 웨더스비(61) 미 존스홉킨스대 교수. 외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이 상을 받았다는 점도 특이하지만, 더 이색적인 것은 웨더스비 교수가 경제와는 거리가 먼 정통역사학자란 점이다.
 

웨더스비 교수는 1990년대초 기밀해제된 구소련 문서보관소의 6.25전쟁 관련 문서들을 발굴, 분석함으로써 6.25전쟁이 북한과 소련, 중국이 정교하게 기획한 국제전이었음을 규명한 학자로 국내외 역사학계에 널리 알려져있다. 6.25전쟁을 일제 강점기와 해방정국의 한반도 내부에서 발생한 사회적 모순, 미군정의 남북분단 고착화로 인해 일어난 내전으로 보는 브루스 커밍스 시카고대 석좌교수의 수정주의 사관에 대한 비판자로도 유명하다. 커밍스 교수 자신이 웨더스비 교수를 "나의 가장 심한 비판자"로 언급한 적도 있다.
 

지난 9월부터 성신여대 초빙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웨더스비 교수를 지난 17일 서울 돈암동 캠퍼스에서 만났다. 전쟁사가, 냉전사 전문가란 점때문에 다소 딱딱한 이미지를 연상했던 것과 달리 푸근한 인상의 소유자인 그는 학부학생들의 학기말 성적를 내느라 분주한 가운데에서도 기자를 반갑게 맞았다. 

소련의 기밀문서더미 속에서 6.25전쟁 발발에 관한 귀중한 자료를 찾아내기까지의 과정, 그리고 2013년에 정전 60주년을 맞아 발표할 예정인 연구프로젝트등에 대해 물었다. 그는 "한국인들이 아직도 6.25전쟁에 대해 오해하고 있는 부분이 많은 듯하다"면서 "전쟁이 어떻게 일어났고, 어떻게 진행됐으며, 어떤 과정으로 정전협상이 이뤄졌는지를 정확하게 알아야만 비로소 한반도 평화의 미래를 향해 출발할 수있다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먼저 수상을 축하합니다.
 

"매우 큰 영광입니다. 상을 받기 전까지는 외국인으로서 이 상을 수상한 사람이 내가 처음이란 사실을 몰랐어요."
 

-역사학자로서 시장경제에 기여한 공로로 상을 받은게 좀 이색적입니다. 역사와 시장경제, 언뜻 잘 어울리지 않는 조합인 듯한데.
 

"역사학자로서 이런 상을 받는게 흔하지는 않은건 사실이죠. 저도 처음엔 이례적이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한국이 북한과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북한을 이해하는데 제 연구가 기여했다는 평가가 아닌가 싶습니다. 상의 이름은 시장경제상이지만, 6.25전쟁을 재조명했다는 점에서 상을 주신 것같아요. 한국인들이 아직도 한국전쟁에 대해 오해하고 있는 부분이 많은데 전쟁이 어떻게 발발했으며, 어떻게 진행됐는지를 밝혀낸 연구로 이번 상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아버지께서 6.25전쟁 참전용사라고 들었습니다. 6.25전쟁에 관심을 가지게된 데에 아버지로부터의 영향이 있었습니까.
 

"제가 21살 때 아버지가 돌아셨으니까,학문적으로 직접 영향을 주실 정도는 아니었어요. 저는 처음부터 냉전체제에 관심이 많았고, 그러다보니 소련의 역사를 전공해 박사학위를 받게 됐지요. 동아시아에도 관심이 많았는데, 그 과정에서 6.25전쟁을 연구하게 됐습니다."
 

-냉전체제에 관심을 가진 이유는 무엇이었나요.
 

"베트남 전쟁 때문이었어요. 전쟁이 한창이던 때에 대학시절을 보냈거든요."
 

-그럼 시위도 참가했나요.
 

"물론이죠. 분노에 차서 반전시위에 참여하곤 했었지요. 당시엔 많은 미국인들이 반전시위를 벌이기위해 거리에 나섰으니까요. 냉전사를 공부하면서 베트남전과 6.25전쟁 간의 연관성에 관심을 갖게 됐지요. "
 

-구체적으로 어떤 연관성을 말하는 건가요. 
 

"미국에서는 베트남전을 내전으로 보는 시각이 강했어요. 북베트남과 남베트남 간에 벌어진 내전이기 때문에 미국이 개입하지 말아야한다는 것이죠. 6.25전쟁에 대해서도 그렇게 생각하는 경향이 강했습니다. 처음엔 저 역시 그랬었죠 6.25전쟁을 공부하면서 많은 자료들을 읽었는데,  당시엔 6.25전쟁을 내전으로 보는 시각이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했었어요. 하지만  소련체제 붕괴후 공개된 각종 기록보관소에서 6.25전쟁과 관련한 문서들과 북한체제 형성에 관한 문서들을 직접 보면서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
 

-어떤 문서들이었나요.
 

"한마디로 소련이 북한에 대해 모든 책임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문서들이지요. 심지어 김일성의 연설문조차 소련의 승인없이는 발표될 수 없었습니다. 기록보관소에는 북한주재 소련관리가 김일성이 보낸 연설문을 파란색 펜으로 고친 다음 모스크바로 보내서 허가를 받았던 문서가 그대로 보관돼있더군요. 모스크바에서 허가가 떨어지면 북한주재 소련관리가 그것을 김일성에게 전달해 연설을 허가하는 절차를 밟았던 것이지요. 

김일성이 소련에 북한 법체계에 관해 조언을 구하며 전문가를 파견해달라고 요청한 문서, 북한 학생을 소련으로 보내게 해달라고 요청한 문서도 있었습니다.이렇게 당시 북한과 소련은 경제, 정치, 군사 등 모든 부분에서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고 봐야합니다.구 소련기록보관소의 자료가 공개되면서 한국전 발발과정에 대한 새로운 사실들이 비로소 드러나게 된 것이지요."
 

인디애나대에서 소련사 연구로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받고 플로리다주립대 교수로 재직 중이던 웨더스비 교수는 1991년부터 우드로윌슨센터의 '냉전 국제사 프로젝트'에 합류, 약 5년동안 구 소련 외교부, 공산당, 국방부,대통령 문서보관소를 샅샅히 뒤지며 6.25 전쟁 관련 문서들을 찾아냈다. 러시아어 문서를 영어로 번역하고 정리해낸 그의 연구는 6.25전쟁사의 새로운 장을 여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구 소련 기록보관소들은 어떻게해서 공개된 건가요.
 

"공개는 순차적으로 이뤄졌어요. 1991년 11월  외교문서보관소가 맨처음 공개됐고, 이듬해인 1992년 4월에 공산당 문서보관소, 그리고 1995년 봄에 대통령 기록보관소가 공개됐지요. 가장 중요하면서도 높은 기밀수준의 문서들을 보관하고 있는 곳은 역시 세번째였습니다."
 

-1991년이라면 소비에트체제가 붕괴된 직후가 아닙니까. 소련사, 냉전사 연구자로서 매우 독특한 경험이었을 것같습니다. 당시 직접 체험한 분위기는 어땠나요.
 

"지적인 측면에서 아주 흥미로왔지요. 사회전체가 마치 거대한 실험장같았다고 할까요. 오랫동안 유지돼온 체제가 갑자기 붕괴되면서 모든 것이 달라지던 시절이었지요. 러시아인들이 정신적, 육체적으로 얼마나 극심한 스트레스를 겪고 있는지를 외국인인 나도 느낄 수있을 정도였어요.  오랜 체제가 무너지고 새로운 사회규범이 아직 들어서지 않은 상태였던만큼, 러시아 인들은 외국인을 어떻게 상대하고 대화를 나눠야하는지 모르는 것같았고요. 그래서 저 역시 생활하기가 힘들었던게 기억납니다. "
 

- 러시아 정부가 그렇게나 빨리 문서보관소를 외국 학자들에게 개방했다는 사실이 좀 의외인데요.
 

" 너무나 혼란스런 상황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 아니었을까요. 당시엔 모든게 다 혼란스러웠거든요. 당시 미국 역사학자들의 냉전사 연구프로젝트가 진행 중이었는데, 러시아 문서보관소에 복사기를 제공하는 대가로 협조를 받기도 했었지요."
 

-수십년동안 외부에 공개되지 않았던 문서들을 처음 보고 만졌을 때의 느낌이 굉장했을 것같은데요.
 

"중요한 문서를 손에 들고 가슴이 마구 뛰었던 순간이 기억나네요. 처음으로 일급 기밀 문서를 발견했을 땐 정말 흥분을 누르기가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역사학자의 고증작업이란 길고도 힘든 일입니다. 읽고 분류해야할 문서의 규모가 워낙 엄청나 특별한 끈기가 필요했습니다."
 

- 찾아낸 것들 중 역사적으로 가장 중요하고 가치가 있는 문서는 든다면.
 

"1949년부터 1950년 5월까지 김일성과 이오시프 스탈린 간에 여러차례 문서가 오갔습니다. 1949년 김일성은 스탈린에게 여러번 남한침략허가를 요청했지만 매번 스탈린은 아직 준비가 안됐다면서 이를 거부했지요. 자칫 장기전으로 갈 수있고, 그렇게 될 경우 북한에 독이 될 수있다는 것이 이유였습니다. 1950년 1월 김일성은 다시한번 스탈린에게 남한 침략허가를 요청했고, 3월말부터 4월 중순까지 김일성은 박헌영과 함께 직접 모스크바로 찾아가 스탈린을 만나 회담한 다음 5월 중순 비밀리에 베이징( 北京)을 방문해 마오쩌둥(毛澤東) 과 만나 군사적 지원약속을 얻어냈습니다.이 같은 상세한 과정은 문서가 공개되기 전까지는 알기 힘들었던 것이었지요. 이 문서가 한국전쟁 연구의 전환을 가능케했다고 생각합니다."
 


웨더스비 교수가 언급한 구소련 문서들 중 대표적인 1950년 1월 30일 스탈린이 북한주재 소련대사 테린티 슈티코프에게 보낸 암호전문이다. 전문의 내용은 이랬다.
 

"보고서를 받았다. 김일성 동지의 실망을 이해한다. 그러나 남한에 대한 그러한 일은 많은 양의 준비를 필요로 한다. 면밀히 준비되어야 큰 위험을 모면할 수있다. 그가 나와 그 문제와 관련해 대화하기를 원한다면 나는 언제나 김일성을 받아들일 용의가 있으며 토론할 수있다. 김일성에게 내가  이 문제에 관해 도울 준비가 되어 있음을 알리시오." 
 

비록 '남한공격'이란 구체적인 표현은 없지만, "도울 준비가 되어 있다"는 말로 스탈린이 남한 침공에 대한 그동안의 회의적인 자세를 버리고 김일성의 공격을 승인하겠다는 의사를 암시한 최최의 문헌이란 것이 웨더스비 교수의 주장이다. 

1949년 3월 모스크바를 방문해 스탈린에게 전쟁계획을 처음으로 설명했던 김일성은 1950년 3월 30일부터 4월25일까지 모스크바 2차 방문에서 확실한 승인을 얻었고, 5월 13일부터 16일까지 베이징을 방문해 마오쩌둥을 만났다. 스탈린이 과연 전쟁을 승인했는지 확인하기 위해 마오쩌둥은 로신 소련대사를 통해 확인을 요청하는 전문을 보냈고, 안드레이 비신스키 소련 외무장관은 로신대사에게 5월 14일암호답신을 보낸다. 필리포프(스탈린의 가명)가 "국제정세가 변화했음으로 인해 통일에 착수하자는 조선 동지들의 제의에 동의한다는 의견을 개진했다"는 것이었다.
 

-소련이 처음엔 전쟁에 부정적이었던 이유는 무엇이었나요.
 

"소련은 무엇보다 한국전이 벌어질 경우 미국과의 대립 가능성을 가장 우려했습니다. 그랬던 입장이 전쟁승인으로 바뀌었던 것은 우선, 중국 공산정권의 등장이란 국제정세상의 변화때문이었지요. 1949년 10월 중화인민공화국이 등장하면서 어느정도 안정이 확립된만큼,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날 경우 중국이 소련 대신 군사적 지원을 해줄 수있게 됐다고 본 것입니다. 두번째는 미국 국방정책의 변화입니다.  문서에 따르면, 스탈린은 영국인 스파이로부터 미국이 당분간 아시아에 대한 군사적 개입을 하지 않을 것이란 정보보고를 받았습니다. 당시 미국의 제1순위는 유럽이었고, 아시아에서는 1순위가 일본, 2순위는 필리핀이었지요.  결국 스탈린은 미국이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발해도 개입하지 못할 것이란 판단을 내렸고, 그래서 북한의 전쟁승인요청을 받아들이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결국 스탈린이 국제정세에 따라 철저히 계산한 결과가 바로 6.25전쟁이었던 것이지요."
 

웨더스비 교수가 언급한, 스탈린이 입수한 미국의 아시아 군사전략 정보는 이른바 '애치슨 라인'에 관한 것이다. 1950년 1월 중순 딘 애치슨 당시 미국 국무장관은 워싱턴 내셔널프레스클럽 연설에서 태평양에서의 미국 지역방위선이 알류샨 열도 - 일본 - 오키나와 - 필리핀을 연설하는 선이라고 밝혔다. 그 결과 한국과 대만, 인도차이나반도는 미국의 방위에서 제외됐다.
 

- 6.25전쟁 발발의 외적 원인에 대해 지적했는데, 내적 모순은 얼마나 영향을 미쳤다고 봅니까. 커밍스 교수같은 사람은 6.25전쟁을 '국제적 세력이 개입된 내전'으로 정의하고 있는데요.  
 

"물론 6.25전쟁은 1차적으로 김일성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김일성은 자신을 마오저뚱같은 존재로 보았고, 혁명지도자로서 한반도 전체를 자유화시켜야한다고 생각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것은 북한은 절대 자의적으로 남한을 침공할 수없었으며, 소련의 허가에 따라 전쟁을 감행했다는 사실이지요." 
 

-한국인이 6.25전쟁에 대해 가장 오해하고 있는 부분이 있다면.
 

"여러 차례 이야기한 것인데, 북의 남침을 믿지 않는 시각이 여전히 있는 듯합니다. 남의 북침에 북이 방어를 했다고 보는 것이지요. 또하나의 오해는 1949년 당시 38선 근처에서 크고 작은 분쟁이 이어졌고, 이것이 시민전쟁으로 비화된 것이 6.25전쟁이라고 보는 시각입니다. 그러나 앞서 지적한 것처럼 6.25전쟁은 소련의 계획에 따라 일어났음을 많은 문서들이 증명하고 있습니다."
 

-2013년은 정전 6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현재 진행중인 연구는 무엇인가요.
 

"내년 7월 학술회의에서 발표하기 위해 정전협상과 관련된 소련문서들을 분석 중이예요. 중국측 협상가가 모스크바에 보낸 문서, 북한이 모스크바에 보낸 문서 등 휴전협상과 관련해 오고간 자료들이지요. 이중에는 아주 새로운 내용도 있어요. 1951년 여름 전쟁이 교착상태에 있을 당시, 스탈린은 소련의 이득을 위해 전쟁이 계속되기를 바랬습니다. 루마니아에서 발견된 문서에 따르면, 1951년 1월 스탈린은 동유럽 지도자들을 모스크바로 불러들였지요. 앞으로  2∼3년동안 미국이 한반도 전쟁에 집중하는 동안 소련은 유럽에서 군사력을 키운다는 것이 당시 스탈린의 생각이었다는게 문서에 나타나있습니다. 스탈린이  북한과 중국에 정전협상테이블에서 강경노선을 취하라고 지시를 내린 문서도 있구요. 1953년 스탈린이 사망하면서 상황은 달라지게 되지요. 소련에는 새로운 지도부가 등장했는데, 외교정책의 최우선 순위가 바로 6.25전쟁을 끝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6.25전쟁과 관련해 앞으로 더 공개되거나 연구해야할 부분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구소련 국방부 기록보관소에 접근할 수있다면 더 많은 것을 밝혀낼 수있을 것으로 봅니다. 6.25전쟁에 소련군이 직접 투입됐다는 자료를 본 적이 있는데, 이를 규명하기 위해선 더 많은 자료가 필요합니다.사실 국방부 기록보관소는 한때 공개됐다가 2000년 블라디미르 푸틴이 대통령에 당선된 후 다시 비공개로 바뀌었어요. 접근할 수있는 기간이 아주 짧았던만큼 연구가 거의 이뤄지지 못했는데, 그게 참 아쉽습니다."
 

- 우리가 6.25전쟁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전쟁은 엄청난 피해와 고통을 초래합니다. 6.25전쟁은 남북한 당사자뿐만 아니라 모든 관련국들에게 많은 피해와 고통을 줬어요. 나쁜 일이 일어나면 감정이 생기기 마련이기 때문에 정확하게 상황을 이해하고 분석하기가 쉽지않죠.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면, 아픔을 딛고 미래로 나가기 어렵지요. 인간사 모든 일이 다 그런 것처럼 6.25전쟁도 마찬가지예요. 전쟁이 어떻게 일어났고, 어떻게 진행됐으며, 어떤 과정을 거쳐 끝났는가를 정확하게 이해해야만 비로소 미래를 향해 나아갈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2008년에 북한을 직접 방문한 적이 있는데, 6.25전쟁사를 연구하는 학자로서 바라본 북한사회가 어땠는지요.
 

"처음이자,지금까지 유일한 북한방문 경험이었습니다. 간판, 건물 등 거리모습이 소련같은 인상을 불러일으켜서인지 아이러니하게도 익숙한 느낌이었죠. 심지어 편안하기까지 했다고 할까. 그래도 변화를 느낄수는 있었어요. 체류기간내내 나를 따라다녔던 안내원은 한국사나 농업에 대한 이야기는 해도 체제선전은 단 한마디로 꺼내지 않아서 인상적이었습니다. 평양 주체사상탑을 방문했을 때는 20대후반의 여성이 영어로 설명을 해줬는데, 그 여성의 말투와 표정,제스처 하나하나가 '넌센스'란 투였어요. 말로는 주체사상을 칭송하는데, 정작 자신은 그 내용을 하나도 믿지 않고 있다는 것을 온몸으로 나타내더군요. 그때 북한에서도 변화가 일어나고 있구나하는 것을 느꼈지요. 시장활동도 일어나고 있었는데, 거리를 지나다가 상거래가 이뤄지는 모습을 보기도 했구요. "
 

-북한은 지난해 3대 세습을 통해 김정은 체제를 출범시켰고, 최근에는 장거리 미사일을 발사하기도 했습니다. 김정은 체제를 어떻게 보는지.
 

"김정은이 북한 지도자 자리에 올랐을 때는 솔직히 변화 가능성을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최근 행태를 보면서 그런 기대가 사라져버렸어요. 장거리 미사일발사에서 보듯, 권력을 공고히하는데에만 몰두하고 있는 것같습니다. 현재로선 거대한 변화를 기대하기는 어려운 듯합니다."
 

-최근 한국,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 3개국에서 리더십 교체가 이뤄졌는데. 이같은 변화를 역사학자로서 어떻게 보십니까. 
 

"아무래도 가장 큰 변화는 중국이 아닐까요. 급성장한 중국을 다루는 일이 상당히 까다로울 듯합니다. 중국이 경제발전을 이룬 것은 물론 긍정적인 면이지만, 중국의 급부상은 이웃국가들에게 공격적인 일이 될 수 있기 때문이지요. 한국은 경제 등 여러 면에서 발전을 이룩하면서 국제사회에서 점점 더 역할이 커지고 있습니다. 이에따라 한미관계도 자연스럽게 변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요즘 한국에서는 인문학의 위기에 대해 많이들 이야기합니다.  젊은이들에게 역사의 중요성에 대해 이야기해주신다면.
 

"역사에 대한 관심이 줄어드는 것은 미국 젊은이들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인 것같습니다. 역사란 의무적으로 공부해야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한편의 재미난 영화를 보듯이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에 흥미를 가지는 것이 바로 역사에 대한 관심이 아닐까요. 무조건 어렵게만 생각하지말고 역사에 흥미를 가져보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 웨더스비 교수는 누구
 

캐스린 웨더스비(61) 미국 존스홉킨스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6.25 전쟁 등 냉전사 연구 전문가이다. 1951년 출생한 그는 인디애나대에서 소련사 연구로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받고 플로리다주립대 교수로 재직했다.


1991∼95년 옛 소련 외교부, 공산당, 국방부,대통령 문서보관소 등의 기밀문서를 연구했고, 이후 20여년동안 우드로윌슨센터에서 '냉전국제사 프로젝트'의 6.25전쟁 연구책임자로 일했다. 이 프로젝트는 소련 등 구 공산권 문서들을 통해 6.25 전쟁과 북한역사를 실증적으로 연구하기 위한 것이었다. 웨더스비 교수는 이를 통해 북한과 소련,중국이 6.25 전쟁을 정교하게 기획한 사실을 밝혀냄으로써 브루스 커밍스 시카고대 교수의 수정주의 역사관을 깨뜨린 학자로 평가받고 있다.
 

미국은 물론 캐나다, 유럽 ,아시아 여러나라에서 6.25전쟁, 북한 역사, 아시아 냉전사 등을 강의했고 TV 다큐멘터리 작업에 컨설턴트로 활발히 참여하기도 했다.'북한의 수수께끼(The North Korean Enigma)''북한에 관한 새로운 증거(New Evidence on North Korea)'등 다수의 연구논문을 발표했다. 웨더스비 교수의 저서 또는 논문 중 한글로 번역된 것을 찾기는 쉽지 않지만, 지난 2010년 출간된 '6.25 전쟁의 재인식' 에  수록된  '소련문서를 통해 본 6.25전쟁의 기원'(공동필자  강규형 명지대 교수) 란 글을 통해 그의 연구성과를 접해볼 수있다.
 

지난해 여름 학기 초빙교수로 고려대 강단에 섰던 그는 지난 9월부터 성신여대 초빙교수직을 맡아 내년 말까지 한국학생들을 지도할 예정이다. 그동안 한국을 여러 차례 방문한 적이 있지만 이번처럼 장기체류하면서 교수로서 학부 및 대학원 강의를 맡기는 처음이다. 그는 "잠깐씩 방문했을 때와는 또다른 느낌"이라면서 "한국에 대해 더 많이 알게되는 계기가 되고 있다"고 말했다. 여행도 많이 하고, 여러종류의 한국 전통음식에 도전해보고 있다는 것. 그는 '가장 인상적이었던 여행지'로 강진, 안동, 강릉을 꼽았고 '가장 엑조틱한 한국 전통음식'으로는 삭힌 홍어요리를 들었다. "쫄깃한 식감이 독특했는데 냄새는 좀..."이라면서 웃었다.  

 

■ 구소련 문서들은 어떻게 공개됐나
 

1991년 12월 8일, 소비에트연방체제의 핵심국가인 러시아와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3국 정상이 벨라루스의 벨로베슈스카야 별장에 모여 소련을 해체하고 느슨한 형태의 국가모임인 독립국가연합(CIS) 을 창설하는 협정에 서명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18일뒤인 26일 소련의 의회격인 최고회의가 공식해체를 선언했다. 1989년 베를린장벽의 붕괴와 동서독 통일, 미하일 고르바초프 서기장의 페레스트로이카(개혁)와 글라스노스트(개방), 보수파의 쿠데타 기도 등 격동기를 거쳐 결국 소련이 공식적으로 사망하게 된 것이었다.
 

이 극심한 혼란 속에서 91년부터 러시아 외교부 외교정책문서보관소 ,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문서보관소, 국방부 문서보관소,대통령 문서보관소에 소장돼있던 한국에 관한 방대한 문서가 외국 학자들에게 순차적으로 공개되기 시작했다. 국방부 문서보관소 경우 2000년 블라디미르 푸틴 정부가 들어서면서 다시 비공개로 전환됐다.
 

1994년 보리스 옐친 당시 러시아 대통령은 모스크바를 방문한 김영삼 당시 한국대통령에게 대통령 문서보관소와 외교정책문서보관소에 소장돼있던 6.25전쟁 관련 문서사본을 전달했다. 원본은 216건 548페이지 분량으로, 번역본과 합치면 1100페이지에 달한다. 

일명 '옐친문서'로 불리는 이 자료들은 현재 외교통상부 외교사료관에 보관돼있다. 그러나 옐친이 넘겨준 문서에는 1950년 5월 15일부터 6월 30일까지 정작 전쟁 발발 전후의 중요한 기간 동안에 오간 문서는  빠져있어서, 러시아가 김일성의 개전의지를 부각시켜 책임을 전가하기 위해 선별적으로 공개한 것이 아닌가하는 의구심을 불러일으켰다. 이들 문서를 정리한 자료집으로는 '한국전쟁 관련 러시아 극비외교문서'(1994), "한국전쟁 관련 러시아 비밀외교문서(서울신문사)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