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여우의 세상 이야기/내가 본 세계

푸틴에게 한방 먹인 여자들..푸시 라이어트

bluefox61 2012. 8. 3. 19:48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요즘 '여자문제'로 골치가 아프다. 


심심하면 한번씩 불화설이 불거져나오는 부인 류드밀라 때문은 아니다. 모스크바 붉은광장, 러시아 정교회의 중심지인 '구세주예수그리스도'교회, 콘서트장과 반정부시위장 등 온갖 곳을 헤집고 돌아다니며 노래를 불러대는 여자들, 듣도보도 못했던 여성 펑크록그룹 '푸시 라이어트(Pussy Riot)' 때문이다. 

이 여자들이 기물파손이나 폭력행위를 저지른 것도 아니다. 오로지 느닷없이 들이닥쳐 '푸틴 물러가라'고 노래했을 뿐이다.이들의 무기는 얼굴을 가리는 스키마스크, 형광색 쫄쫄이 티셔츠와 미니스커트, 그리고 어깨에 둘러맨 기타가 전부이다.



교회 안에서 불경스럽게도 시위를 벌였던 3명을 붙잡아 유치장에 가둔 것으로 다 끝난 줄 알았다.그런데 지난 7월초 미국 록그룹 '페이스 노모어'의 모스크바 콘서트 도중 '푸시 라이어트' 멤버들이 갑자기 무대에 올라와 공연을 벌였다. 3명은 분명 유치장 안에 있는데, 도대체 이 여자들은 어디서 계속 나오는 것인가. 모스크바 경찰당국도 당혹스럽고, 푸틴은 졸지에 '여성탄압자'로 몰려 더 곤혹스런 처지에 빠졌다. 


대통령 8년, 총리 4년, 아니 그 이전에 국가보안위원회(KGB) 요원으로 산전수전 다 겪은 푸틴으로선 미칠 노릇이다. 러시아 안팎의 저명한 지식인과 예술가들이 구명청원서에 서명한 것도 모자라, 이제는 미국 등 서방 정부들까지 나서 '푸시 라이어트'를 당장 석방하라고 난리들이다. 국제앰네스티협회는 '푸시 라이어트'3명을 '양심수'로 선언하기까지 했다.

 

지난해 12월 총선과 올 3월 대선 전후로 수많은 시위가 벌어졌지만, '푸시 라이어트'만큼 푸틴을 '효과적'으로 곤궁에 빠트린 사람은 없었다.이 용감하기짝이 없는 여자들은  펑크록과 퍼포먼스 만으로 권력 대 예술, 국가 대 시민사회, 억압 대 표현의 자유, 여성 대 남성 등 러시아 내부에 존재하는 수많은 갈등구조를 한꺼번에 드러내는데 성공했다. 이것이 지금, 러시아는 물론 전세계가 '푸시 라이어트'를 주목하는 이유이다. 



사건은 대선이 코 앞으로 다가온 지난 2월 21일 벌어졌다.


구세주예수그리스도 교회 안에서 갑자기 스키마스크를 쓴 여자 5명이 중앙 제단 위에 올라섰다. 정교회 중앙제단은 신부만이 예배를 집전할 수있는 금녀의 공간이다.이들은 '마리아여 우리를 푸틴으로부터 구원하소서'란 노래를 부른 뒤 신속히 사라졌다. 불과 1분남짓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문제는 3월초 유튜브에 51초분량의 동영상이 뜬 이후였다. 이 동영상을 본 약10만명 중에는 러시아정교회의 수장인 키릴 총대주교도 있었다. 그는 당장 푸틴과 모스크바 경찰청장에게 전화를 걸어 노발대발했다. 

뒤늦게 수사에 나선 경찰은 5명 중 신원이 파악된 나데즈다 톨로코니코바(22) ,마리아 알렉키나(24), 예카테리나 사무체비치(29)를 체포했다. 죄목은 '종교적 혐오에 따른 훌리건행위'.최대 7년형에 처해질 수있는 중범죄이다. 3명은 지난 7월 30일 재판정에서 정교회에 사과하기는 했지만, '종교적 혐오''훌리건행위'에 대해선 강력히 부인했다. 


'푸시 라이어트'는 과연 누구인가. 가디언지는 지난 7월 29일 러시아내 모처에서 서방언론으로는 최초로 '푸시 라이어트' 멤버들을 직접 인터뷰했다. 기사에 따르면 , '푸시라이어트'는 10명 이상의 20∼30대 여성 뮤지션, 화가, 퍼포먼스 아티스트 등으로 구성된 '집단'이다. 이중 일부는 전위예술그룹 '보이나(Voina)'의 멤버이다. 조직이 만들어진 것은 지난해 9월말 푸틴 당시 총리의 3선도전이 공식화된 직후였다.
'푸시'란 여성의 성기를 비하하는 영어표현이다. 이 단어에 '폭동'을 붙였다는 사실에서, 이 집단이 남성중심의 시각을 거부하는 '전투적 페미니즘' 성향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들이 구세주예수그리스도교회를 시위장소로 선택한 데에는 친푸틴파인 키릴 총대주교를 비판하는 동시에 정교회의 남성우월주의를 비꼬려는 의도도 있었다.




3명 체포 이후 '푸시 라이어트'는 사실상 지하은둔 상태이다. 이들을 만난 가디언지 기자는 " 대담한 혁명가 이미지를 예상했는데 평범한 가정에서 자라난 평범하기 짝이없는 여성들이란 사실에 깜짝 놀랐다"고 전했다. 인터뷰가 잠깐 중단됐을 때는 긴장이 풀렸는지 "아휴, 기분이 이상해"라며 바닥에 쓰러져 깔깔거리는 '보통 젊은 여자애들'이었다는 것이다. '다람쥐'란 가명을 쓰는 멤버는 "부모님이 '푸시 라이어트'멤버란 사실을 알고있냐"는 질문에 " 부모님이 아셨으면 전 지금쯤 죽었죠"라고 말했다.

 

하지만, 멤버들은 러시아의 억압적인 현실에 대해 말할 때만큼은 단호했다. 한 멤버는 " 성차별주의자들이 여자란 어때야한다는 식의 개념을 강요하는 것처럼 푸틴은 국민이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명령하고 있다"면서 " 이 정부의 폭력성과 잔혹성을 고발하기 위해 우리가 나섰다"고 말했다. 자신들은 "불법행위를 저지르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고 믿는 것을 말하고 노래할 뿐"이란 것이다. 
'익명성'은 '푸시라이어트'의 최대무기이다. '제비'란 가명의 멤버는 "처벌이 두렵지 않느냐"는 질문에 " 우리가 붙잡혀가면 더 많은 여자들이 형광색 옷을 입고 거리로 나서서 권력을 향한 싸움을 이어갈 것"이라고 말했다. 즉  '푸시 라이어트'란 특정인물이 아니라 '개념(아이디어)'이며, 누구나 '푸시 라이어트'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푸시 라이어트 '사태를 조속히 마무리하라는 요구는 러시아 권력층 내부에서도 제기되고 있다. 지난 1일 모스크바 타임스는 집권여당인 통합러시아당의 상트페테르부르크 지부 책임자인 발레리 페도토프가 자신의 블로그에 올린 공개서한을 보도했다. 그는 "이번 사태로 러시아가 전세계의 놀림감이 되고 있다"면서 " 사법당국은 즉시 3명을 석방하라"고 촉구했다. 그러면서 그는 덧붙였다. "통합러시아당원 대부분이 나와 같은 생각을 갖고 있지만 지도부의 처벌을  받을까봐 대놓고 말하지 못하고 있다." 


그들도 할말은 하고야마는 '푸시 라이어트' 여자들이 속으론 부러운 모양이다.

 

언론과 표현의 자유에 재갈을 물리려는 블라디미르 푸틴 정부의 움직임이 심상치않다. 지난 5월 푸틴 3기체제가 시작된 이후 최근 2개월 남짓 사이에 새로 제정됐거나 개정된 관련 법만 4개나 된다. 푸틴의 '사법 쿠데타'란 이야기가 나오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첫번째가 지난 6월 8일 대통령 서명으로 발효된 '집회질서위반 처벌강화법'. 시위에 참가해 체포된 개인 또는 부과되는 벌금을 기존 1000루블(약 7만원)에서 최대 30만루블(약1046만원)로 올리고, 위반자에게 직장 근무나 학업 후 하루 4시간씩 총 20~200시간의 강제근로형을 부과하는 것이 핵심이다. 월평균 급여가 약3만루블(약105만원)인 러시아에서 30만루블은 엄청난 액수이다. 지난해 12월 부정총선 논란이후 급등한 시위를 벌금철퇴로 잡겠다는 의도인 셈이다.
 

두번째는 비정부기구(NGO)개정법. 지난 7월 21일 푸틴대통령이 서명한 이 법은 외국으로부터 자금 지원을 받아 정치 활동을 하는 NGO들에 대해 법무부에 '외국기관의 기능을 수행하는 단체'로 자진 등록할 것을 의무화하고 있다.러시아에서 '외국기관'이라는 표현은 구소련 당시 자국 내에서 암약하던 외국의 스파이 기관을 연상시키는 부정적인 뉘앙스를 담고 있다. 

워낙 급하게 만들어진 법이다보니,  NGO의 개념이 매우 모호하게 규정돼있는 것도 문제이다. 친크렘린 노선을 취하고 있는 러시아정교회와 국영 TV채널 RT조차 해외에서 들어오는 기부금때문에 '외국기관 기능수행 단체'로 규정될뻔했다가 상하원 최종표결 직전에 급히 제외됐을 정도이다. 
 

세번째는 인터넷 사이트를 대상으로 '블랙리스트'를 작성해 제재를 가하는 내용을 담은 '개정정보법'이다.지난 7월 30일 대통령 서명과 함께 즉시 발효된 이 법은 어린이들에게 유해한 정보가 실린 인터넷 사이트나 홈페이지 등의 블랙리스트를 작성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아동 포르노, 자살 및 마약 관련 정보를 담은 사이트가 일차적 단속 대상이다. 

블랙리스트에 오른 사이트는 관계당국이 법원의 판결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폐쇄할 수 있다. 불법컨텐츠를 단속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지만 인터넷 언론자유를 탄압하는 도구로 이용될 가능성이 매우높다.네번째는 명예훼손 처벌강화법. 지난해 형사법에 제외됐던 명예훼손 범죄를 다시 형사처벌할 수있게 했고, 벌금도 최대 500만 루블로 올렸다.
 

쏟아지는 국내외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푸틴은 당당하다. 그는 지난 7월 31일 모스크바 인근에서 열린 청년포럼 '셀리게르 2012'에 참석해 "오렌지혁명(우크라이나), 장미혁명(조지아)등 여러 혁명을 지켜봤다"며 "시위 참가자들이 이 혁명들에서 이용된 상징물을 갖고 나오는 것은 반대하지 않지만 언덕 너머(외국)에서 만들어진 기술을 이용하는 사람들에겐 화가 난다"고 말했다. 

또  "사회에는 어떤 형태의 국가에 대해서도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으며 이들은 무정부주의자들"이라면서 "이것이 올바른 국가나 사회 발전 방향이 될 수는없다"고 말했다. NGO개정법에 대해서도 "미국은 스스로를 외부의 영향으로부터 보호할 수 있는 법률을 만들어 수십 년 동안 유지해 오는데 러시아는 왜 안되냐"는 논리를 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