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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독 20년, 현장을 가다(중)

bluefox61 2010. 9. 16. 21:03

옛 동독지역인 작센주의 라이프치히는 독일 통일의 성지같은 곳이다. 라이프치히가 없었다면 베를린 장벽은 오늘날까지 무너지지 않고 버티고 있을지도 모른다. 시작은 1989년 9월4일이었다. 라이프치히 구시가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니콜라이 교회에서 매주 월요일마다 열리는 ‘평화 기도회’를 마친 수십명의 시민들이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아우구스투스 광장(당시 이름은 칼 막스 광장)에서 동독 정부의 압제에 항거하는 평화시위를 시작했다.


시위는 이날 하루로 끝나지 않았다. 시간이 갈수록 매주 월요일마다 열리는 평화기도와 시위에 참여하는 시민 숫자가 불어났고, 10월9일 동독 건국 40주년 기념일에는 무려 7만명의 시민들이 ‘우리는 국민이다(We Are the People)’란 구호를 외치며 거리를 행진했다. 


다음주 16일에 12만명이었던 시위 규모는 한 주 뒤 30만명으로 늘어났고, 11월9일 베를린에서는 시민의 힘으로 장벽이 무너지는 역사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이듬해 10월3일 결국 동서독은 분단 역사를 청산하고 통일을 이뤘다.



▲ 한가로운 ‘역사의 현장’ 1989년 베를린 장벽의 붕괴를 촉발한 대규모 평화 기도회가 열렸던
라이프치히 니콜라이 교회 앞 광장. 15일 화창한 초가을 날씨에 시민들이 한가롭게 오가고 있다.


15일 라이프치히를 찾았을 때, 광장 곳곳에서는 모처럼 화창한 초가을 날씨를 한가롭게 즐기는 시민들과 관광객들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10년전 한창이었던 공사들이 마무리돼 말끔한 모습을 갖춘 라이프치히는 바흐, 멘델스존, 괴테 등 수많은 음악가, 작가들의 자취가 남아있는 예술도시이자 수세기동안 이어온 상업 중심도시다. 


예술과 상업이란 두가지 전통에 이제 또 하나가 새로 추가됐다. 바로 압제에 대한 항거, 자유 민주주의와 평화의 상징이다.


라이프치히에서 지금은 1989년 당시 평화시위의 열기를 찾아볼 수 없지만, 민주화와 통일의 도화선 역할을 했다는 시민들의 자긍심은 여전히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월요 ‘평화시위’에 처음부터 참여하며 적극적인 역할을 했던 즈름트라우트 홀리처(67) ‘라이프치히 시민위원회’위원은 “시위에 참여했던 그 많은 사람 중 단 한 명도 돌을 들지 않았으며 경찰도 한 방의 총알도 쏘지 않은 것은 지금 생각해도 기적같은 일”이라고 말했다.


당시 동독 정부는 ‘페레스트로이카(개혁)’를 내세웠던 고르바초프 러시아 대통령의 동독사태 불개입 의지와 자체적인 지도력 와해로 인해 라이프치히 대규모 시위에 신속히 대응하지 못했으며, 군 경찰 역시 시민을 향해 총을 쏘지 못했다는 것이다. 



▲ 그때 그 사람 월요 ‘평화시위’에 줄곧 참여했던 즈름트라우트 홀리처 라이프치히 시민위원이
15일 당시의 사진을 보여주며 회고하고 있다.


홀리처 위원은 니콜라이 교회에서의 기도회가 역사의 흐름을 바꾸는 거대한 하나의 흐름으로 확대된 과정을 상세히 설명하면서도, “솔직히 그때는 너무나 두려웠다”고 고백했다. 하지만 자신을 포함해 시위에 참여했던 모든 시민들은 ‘더이상 거짓으로 살지 않기 위해’ 두려움을 떨치고 일어났다는 것이다. 


부르크하르트 융 시장은 라이프치히의 특징으로 ‘유난히 강한 자긍심, 오랜 상업 전통으로 확립한 국제성 , 수준높은 문화의식’ 등을 꼽았다. 동독 최초로 대규모 민주화 시위가 라이프치히에서 일어난 것은 바로 이런 점 때문이란 것이다. 


융 시장은 이런 특징이 21세기 라이프치히의 미래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으로 내다봤다. 물론 통일 후 라이프치히도 한때 더 나은 일자리를 찾아 서쪽으로 대거 인구가 이동하는 바람에 경제가 위축됐다. 하지만 융 시장은 “구 동독 지역에서 주민수가 늘고 있는 곳은 드레스덴, 예나에 이어 라이프치히뿐”이라면서 자동차산업, 미디어, 교육, 첨단연구 등의 분야에서 성장세와 일자리 창출을 자신했다. 



 




라이프치히의 슈타지(동독 비밀경찰)박물관에서는 통독 20주년을 맞아 과거 공산체제가 시민들을 어떻게 감시하고 억압했는지를 보여주는 전시회가 한창이다. 


베를린의 슈타지 문서보관소와 함께 공산정권의 인권탄압 실태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이 박물관은 1989년 평화시위와 1990년 독일 통일이 이룩한 중요한 성취 중 하나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의 붕괴와 함께 동독 정권이 무너진 후 라이프치히 시민들은 지난 50여년동안 자신을 감시해온 슈타지의 본부건물을 장악하고 수많은 보고서 문건들과 사진, 각종 감시장비들을 확보해 세상에 공개했다. 



라이프치히 시민위원회는 특히 건물 내부를 전혀 개조하지 않고 슈타지들이 사용했던 그대로를 보존, 관람객들이 마치 1970년대쯤으로 되돌아가 슈타지 본부에 들어온 듯한 생생한 느낌을 가질 수 있도록 했다. 


전시품은 슈타지가 작성한 문서(사진)부터 시민들을 감시하는 데 사용됐던 온갖 종류의 카메라와 녹음기들, 총기와 분장용 도구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1989년 평화시위 당시 시위참가자들의 모습을 일일이 촬영한 사진들도 있다.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악명높은 ‘냄새 샘플’로, 슈타지가 요주의 인물들의 옷 등 체취가 담겨있는 물품을 몰래 훔쳐낸 다음 유사시 탐지견이 냄새를 맡을 수 있게 하기 위해 표본화한 것이다.



“통일은 ‘자유와 민주주의의 우산’ 아래서 이뤄져야 한다. 그것이 나의 메시지다.”


구 동독의 마지막 외무장관으로 격변의 현장을 직접 체험한 마르쿠스 메켈(58)은 14일 베를린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이같이 강조했다. 그는 수십년동안 분단됐던 두 나라를 합치는 실무작업을 했던 경험에 비춰 남북한 통일에 어떤 조언을 주고 싶은가란 질문에 “조언은 하지 않겠다”면서도 독일이나 남북한의 통일 원칙은 분명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구체적인 통일과정은 독일과 한반도의 상황이 다르기 때문에 자신의 경험을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다고 덧붙였다.


그는 이어 독일 통일의 원동력에 대해 “베를린 장벽붕괴는 동독 국민들의 안으로부터 분출하는 열망에 의해 이뤄졌다”면서 “통일 20주년을 계기로 통합 성과에 대한 불만과 통일이 아니라 합병된 것뿐이란 지적도 있지만 그것은 통일과정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했다. 통일은 강한 어느 한쪽 정부에 의해 주도된 것이 아니라 동독 국민들의 평화 시위가 장벽붕괴와 통일로 이어졌다는 전체적인 맥락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의미임을 강조한 것이다.


그는 “38살의 나이에 내 눈으로 통일을 지켜보는 목격자가 됐다는 사실이 놀랍다”며 “당시만 해도 내 생애에 그런 일이 일어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었다”고 회상했다. 


그는 1989년 베를린장벽이 무너진 다음 해인 1990년 3월 구 동독 최초의 자유민주주의 선거를 통해 들어선 로타르 드 메지에르 정부에서 외무장관으로 활동했다. 1990년 10월3일 통일이 공식화되고 동독 정부가 사라지면서 재임 기간은 길지 않았지만 통일협상 과정에 직접 참여한 인물이라는 역사적 중요성 때문에 주목받고 있다. 그는 장벽 붕괴 이전에 구동독 최초로 집권 공산당에 대항한 야당 사회민주당(SDP)을 공동 창설한 주인공이기도 하다. 1990년 10월3일 동독이 공식적으로 사라진 후 그는 연방의회의 의원으로 활동해오고 있다. 오는 10월쯤엔 자서전을 통해 동서 통일의 상세한 과정을 공개할 계획이다. 


“장벽붕괴 전 동베를린에서는 대규모 평화시위가 일어났다. 7만명의 사람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민주주의와 자유를 촉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그들은 ‘우리가 국민이다(We Are the People)’라는 구호가 적힌 표지판을 들고 행진했다. 이 구호는 사실 공산당이 국민을 위한 정부라며 늘 내세웠던 것이었다. 하지만 89년 시위현장에 등장한 구호는 주권이 국민에게 있다는 당연한 사실을 새삼 깨닫게 만들었다.”


메켈 전 장관은 독일 통일이 동유럽의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는 점 역시 강조했다. 즉 통일을 독일자체에만 국한하지 말고 동유럽 전체의 맥락에서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동독 평화 시위에 앞선 폴란드와 헝가리 등에서의 시위가 당시 동독인들에게 용기를 불어넣었다”고 회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