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여우의 세상 이야기/지구촌 전망대

칼럼/조세정의, 문제는 정부 ...미국은 어떻게 스위스를 무릎 꿇렸나

bluefox61 2013. 6. 10. 11:30

2008년 10월 17일, 미국 뉴욕 월스트리트의 모처에서 스위스 최대은행 UBS 간부와 미국 법무부 관계자들이 비밀리에 회동했다. UBS 측의 대표는 마르쿠스 디텔름 법률 고문, 미 법무부의 대표는 '탈세범들의 저승사자'로 불리던 조세 담당 검사 케빈 다우닝.

 

이날 전세계 금융계의 최대화제는 리먼브러더스의 파산으로 휘청거리던 UBS가 하루전 스위스 연방정부로부터 60억 스위스프랑(약5조9300억원)의 구제금융을 받아 위기를 모면했다는 뉴스였다. 이처럼 파산의 위기를 가까스로 넘긴 UBS의 운명이 월스트리트의 한 구석에서 진행됐던 미 법무부 관계자들의 만남으로 바뀌게 됐다는 사실을 당시에는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4개월 뒤, UBS는 미국 부호들이 자사의 비밀계좌를 이용해 탈세를 저지르는데 도움을 주었다는 미 법무부의 혐의를 인정하고, 형사기소를 면제받기 위해 7억8000만달러의 벌금을 내는 한편 미 고객 수천명의 비밀계좌 정보를 제공하기로 합의했다고 발표했다. 3개의 열쇠가 겹쳐진 문양 상징되던 UBS의 '신용'이 무너지는 동시에, 100년 넘게 견고함을 자랑해온 스위스 비밀금고에 치명적 균열이 가해지는 순간이었다.

 

 


그로부터 약 4년이 지난 2013년 5월 29일,에블린 비드머-슐룸프  스위스 재무장관이 생방송 TV 카메라 앞에 앉아 대국민 성명을 발표했다. 스위스 은행들의 비밀계좌 정보를 미국에 넘겨주기로 미 법무부와 합의했다는 내용이었다. 앞서 미국으로부터벌금철퇴와 계좌정보 제공이란 치욕을 당했던 UBS를 '강건너 불'로 바라봤던 나머지 스위스 은행들이 똑같은 처지에 놓이게 된 것이다. 며칠뒤, 프랑스 등 유럽 각국도 미국 정부의 뒤를 이어 스위스 정부에 탈세혐의가 있는 자국 부호들의 비밀계좌정보를 내놓으라며 본격적인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스위스와 미국 간의 은행 비밀계좌정보 공개 합의가 발표된 후, 주변에서 스위스 정부의 금융정책 변화 배경에 궁금증을 나타내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미국 정부가 스위스 은행에 대한 은밀한 내사를 벌인 것은 이미 2000년대 중반부터였다. UBS 비밀계좌를 이용해 약 5만2000명의 미국 부호들이 수억달러에 이르는 세금을 빼돌린 정황을 포착하는데 성공한 미국은 조금씩 포위망을 좁혀 들어갔고, 2008년 4월 UBS의 미국관련업무 책임자가 마이애미를 방문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체포했다. 두달 뒤에는 연방수사국(FBI)와 상원까지 나서서 UBS를 압박했고, 힐러리 클린턴 당시 국무장관도 스위스 정부를 설득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 뿐 아니다. 지난 3월에는  스위스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해온 베겔린 은행에게 미국 조세 약 10억달러를 빼돌리는데 협조했다는 이유로 벌금 5780만달러와 민사소송합의금 1620만달러를 부과하고, 결국 272년만에 문을 닫게 만들기도 했다. 


 

요즘 국내 굴지기업의 탈세의혹과 정재계인사들의 조세피난처 페이퍼컴퍼니 설립 의혹 등이 잇따라 폭로되고 있다. 하지만, 오래전부터 스위스와 미국 간의 탈세 관련 협상이나 전세계 조세피난처 관련 뉴스를 주목해온 사람이라면 조금 뜬금없다는 느낌을 지울 수없을 것이다. 국제탐사보도언론인협회(ICIJ)가 조세피난처 계좌소유주들을 폭로하기 이미 한해전 한국 부호들의 역외탈세 규모가 880조원로 추정된다는 보도가 있었다. 우리 조세당국이 탈세범들을 반드시 심판하겠다는 의지를 내세우고 있지만, 웬지 뒤늦은 소동처럼 느껴지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조세정의는 말이나, 한때의 호들갑으로는 결코 이뤄지지 않는다. 10년 가까이 스위스를 물고 늘어져 백기투항을 이끌어냈던 미국처럼, 결국 모든 것은 정부의 의지에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