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저런 이야기들

마이클 무어의 '세상에 부딪쳐라 세상이 답해줄때까지'..누락된 이야기들(1)

bluefox61 2013. 6. 10. 15:35

마이클 무어의 자서전 '히어 컴스 트러블(Here Comes Trouble)'의 번역서 '세상에 부딛쳐라 세상에 답해줄때까지' 출간에서 가장 아쉬운 점은 역시 책제목과 일부 누락된 부분들이었습니다. 출판사의 선택이었지만, 번역자로서는 독자들에게 전달되지 못한 이야기들이 남아있는것이 영 찜찜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한국어판에 포함되지 못한 부분들을 홈페이지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전체 목록 24개 중 5개가 빠졌네요.

무어의 자서전은 그 자신 개인의 이야기이기도 하면서, 20세기 미국 현대사의 단면들을 보여준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습니다. 지극히 평범한 중부 중산층 가정의 미국인들이 20세기를 살면서 어떤 순간들을 겪었는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들여다 볼 수있거든요. 그런 점에서 의미있는 읽을거리임에 틀림없습니다.

 

오늘 첫번째는, 마이클 무어의 아버지 이야기입니다. 20대 청년시절에 2차세계대전, 그것도 태평양전쟁에 참전했던 무어의 아버지를 통해 전쟁의 의미를 다시한번 생각해봅니다.

 

                                           <마이클 무어와 아버지 프랭크 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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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년 크리스마스

 

아버지는 몇해전부터 내가 더 이상 총을 쏘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있었다. 동네 아이들이 전쟁놀이를 중단했다는 것도 알았다. 나는 아버지가 2차세계대전 동안 남태평양에서 해병대원으로 어떻게 지내셨는지에 대해선 잘 몰랐다. 다만 동생들과 내가 유일한 단서로 삼았던 것은 아버지가 집에서 기르는 개에게 참전했던 전투지인 펠렐류(Peleliu: 1944년 미군과 일본군간의 격전이 벌어졌던 팔라우 제도의 섬- 역자 주)와 타라와(Tarawa: 194311월 중부 태평양의 타라와 환초 내 베티오 섬을 점령하려는 미 해병대와 일본수비군 간에 벌어진 전투. 76시간에 걸친 상륙작전동안 미국 1000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역자 주) 같은 이름을 붙여줬다는 것 정도였다. 다락에는 일본군으로부터 빼앗은 일장기 검, 총같은 기념품도 있었다. 아버지는 어느날 갑자기 아무런 설명도 없이 더 이상 집안에 이런 물건들을 두고 싶지 않다는 결심을 하고, 조용하게 집 밖으로 나가 창고에서 삽을 가져오더니 일본 전쟁 기념물을 다 모아가지고 뒷마당에 있는 커다란 버드나무 아래로 가져가 아주아주 깊은 구덩이를 판 다음 총이며 검이며 깃발 따위를 다 나무 밑에 묻어버렸다. 다 끝낸 다음 흙을 다져놓고 그 위에 홀로서서 내려다보며 깊은 생각에 빠지거나 기도를 하거나 했다. 나는 침대 창문으로 그런 아버지를 바라봤다.

하루는 아버지가 전쟁이야기를 해주고 싶구나라고 말했다. “왜 하루하루가 소중하며 ,왜 매일 여기 이렇게 있는 것을 감사해하고 있는지 너한테 알려주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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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자매가 6명이었던 아버지는 8년동안 12번이나 이사를 다니며 살았다. 집세를 받으러 오는 집주인을 피해 여러번 이사를 했다고 한다. 대공황 때 다들 그랬듯이 무어 가족은 캔사스가, 프랭클린가, 켄징턴가, 베넷 스트리트, 일리노이 스트리트, 콜드웰가, 제인 스트리트 등 미시간주 플린턴 동쪽 지역에 있는 여러곳을 옮겨다니며 살았다.

아버지 프랜시스(프랭크로 불렸다)7남매 중 넷째였는데 1943년 크리마스 때 남태평양의 어떤 빌어먹은 섬 힐(Hill)250 꼭대기에서 자신과 동료 해병대원들을 향해 비행기로부터 예광탄들이 떨어지는 것을 보면서 22년 평생 -두살 때 석탄창고에 떨어진 일, 4살 때 아빠 자동차 차문에 끼여서 끌려갔던 사건, 고등학교 때 이듬해 야구팀에 들어올 어린 선수들을 위한 자리를 만들어놓아야 한다는 이유로 주선수권 경기 직전 코치에 의해 잘렸던 일, 코카콜라 배달트럭 운전기사로 취직한 첫날 콜라맛이 별로라고 말해서 해고됐던 일, 열살 때 엄마가 7명 아이들을 다 돌볼 여유가 없다고 하는 바람에 동생과 함께 잠시 고아원에서 생활했던 일 등등이 머릿 속을 스치고 지나갔다고 한다. 그때 아버지와 전우들에게 공격을 퍼부었던 비행기들은 아군인 미군 비행기들이었다.

 

아버지는 미군비행기가 미군들을 죽이려고 공격하는 동안 뉴브리튼이란 섬의 250힐에 있었다. 왜 그런 이름이 붙었는지, 250 말고 힐249도 있는지에 대해선 아무도 설명해주지 않았다. 사실 라는 호칭도 전쟁국 제도사가 농담처럼 붙인게 아닌가 싶다. 힐이라는 이름을 붙이면 미국 해병대원들이 조금이라도 집같은 느낌을 받을까 싶어서, 힐을 지키기 위해 죽는다면 최소한 집을 지킨 것같은 느낌을 들게 하기 위해서인지도 모른다. 집에는 언덕이 있고, 그 언덕에서는 개불알꽃, 천남성꽃,야생꽃들이 지천이며, 숨바꼭질하고 산책하면서 산딸기 등을 따고, 유랑객들이 평화로운 하룻밤의 휴식을 취할 수도 있는 그런 곳 말이다. 아담하고 조용한 공간을 찾아 모닥불을 피워놓고 그 옆에서 사랑을 나눌 수 있는 그런 곳이 바로 이 아니던가.

아버지가 이 언덕에서 벌어진 전투에 참여하게 된 것은 그 자신의 세계와는 무관한 세계전쟁때문이었다. 아버지의 세계는 열심히 일하고, 스포츠와 토요일밤 니커보커 댄스홀 가기 등으로 이뤄진 세계였다. 최악의 대공황기 때 많은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가난했지만, 무어 형제들-, 프랭크, 로니, 허비-은 언제나 깨끗하게 세탁해 잘 다린 양복을 입고 깔끔하게 자른 헤어스타일에, 주머니에는 예쁜 아가씨들에게 음료수 한번쯤은 사줄 수 있을 만큼 충분한 동전을 가지고 다녔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즈음에는 여자들이 춤추기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댄스 레슨을 받기도 했다. 마을의 다른 젊은 남자들은 춤추는데 늘 약간 서툴렀기 때문에, 무어 형제들이 댄스 플로어에 항상 먼저 나서서 춤을 췄고, 이것이 여성들에게 깊은 인상을 줬다. 무엇보다 겁이 없다는 사실 그 자체로 매력적인 남자들로 보였던 것이다. 아버지보다 16개월 어린 로니 삼촌은 댄스 플로어의 왕으로 알려졌는데, 곧 시내 댄스학원에서 춤강사로 일했다. 적수인 다른 남자들에게 지터벅 춤을 멋지게 추는 법을 가르쳐주는게 좀 마음에 걸리는해도 로니 삼촌은 친절하고 관대한 마음씨를 지녔고, 어찌됐든 많은 사람들이 밤새 춤을 추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해했다.

1941년까지 플린트 시는 그랬다. 모든 사람들을 일터로 돌아가게 만드는 루스벨트의 정책과 2년전 유럽과 극동지역에서 발발한 전쟁에 미국이 참전할 것이란 예상 속에 산업생산이 시작되면서 미시간주 플린트 같은 공장도시의 경기가 완전붕괴될 뻔하다가 되살아났다. 빌 삼촌,아버지,로니 삼촌은 모두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공공사업촉진국(WPA)' 일자리(아가씨들과 대화할 때 가능한 숨기려 했던 사실)를 얻었다. 1941년 여름이 됐을 무렵, 아버지는 이미 동네 식료품점 전단지 배포부터 계란트럭 운전, 대용량(6온스짜리) 코카콜라 녹색병을 가득 싣은 트럭 운전 등 여러 일을 거친 상태였다. 무어 형제들은 마침내 제너럴모터스의 조립라인에 정착했다. 하지만 매일 똑같은 모듈에 AC 스파크 플러그를 4800번이나 설치하는 단조롭고 반복적인 일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아버지는 공장 사무실에서 사무직원으로 일할 기회를 얻기 위해 밤에 타이프라이터 치는 법을 배우러 다녔다. 하지만 여자들처럼 타이프라이터를 빨리 치지 못했던 그는 결국 7번공장에서 스파크 플러그 핀을 삽입하는 2번 조립라인에서 속하게 됐다.

나머지 형제 3명은 미래의 더 넓은 세상을 보기위해 공장을 그만뒀고( “세일즈야, 프랭크 - 돈이 모여있는 곳은 바로 거기야!” ) , 1941년 세명이 번 수입이 집세를 낼 만큼 충분했기 때문에 더 이상 집주인과 친구들, 마을 경찰관들을 피해 이사다닐 필요가 없게 됐다.

집세와 식료품비, 난방비를 지불하고 난 다음에도 그들에겐 버스를 타고 니커보커 댄스홀로 가서 즐길 만큼의 돈이 남았다. 특별한 주말에는 인더스트리얼 뮤츄얼 어소시에이션 강당에서 열리는 토미 도시와 프랭크 시나트라의 공연으로 보러가기도 했다. 노동자 청년들에겐 천국이나 다름없었다.

1941124일 아침, 일본 천황이 그들의 삶에 개입하면서 모든 것이 달라졌다. 미해군 태평양 함대 전체를 무너뜨린 공격은 미국에 충격으로 다가왔다. 다음날 루스벨트 대통령이 전쟁을 선언하자 젊은이들은 모병센터로 몰려들었다. 미시간 플린트에도 동쪽에 있는 초등학교에 서둘러 모병센터가 마련됐다. 하지만 무어 형제들은 그날이나 그 다음날, 또는 다음주나 다음달, 아니면 두세달 뒤나 여섯 달이 지날때까지도 입대 서류에 서명하지는 않았다. 히로히토에 화가 나지 않았다던가, 남들보다 애국심이 부족하거나, 주축국 엉덩이를 차주고 싶지 않아서는 아니었다. 세인트 메리 고등학교시절 씩씩하기로 정평났던 그들은 무엇보다 아일랜드 혈통이었고 싸움에 관한한 절대 물러서는 일이 없었다.

다만 이 새로운 전쟁이 좋지 않은 시기에 일어났다는 것이 문제였다. 빌 삼촌은 막 결혼한 상태였고, 아버지는 플린트 노던 고등학교 졸업식에서 고별사를 읽은 여학생에게 푹 빠져있었다. 그 여학생은 앤아버에 있는 미시간대에 진학해 의학을 공부할 계획이었는데, 당시에는 간호사가 된다는 의미였다. 아버지도 공부를 좀더 하겠다는 야심을 갖고 있었지만 GM 노조가 노사분규에서 승리하는 바람에 수입이 좋아져 앤아버에 가는데 별 흥미가 없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별사 낭독여학생은 좇아다닐만한 가치가 있어 보였던 만큼, 아주 달갑지 않은 시점에 전쟁이 터졌던 셈이다.

아버지의 아버지는 1차세계대전에 해병으로 참전했고 아버지의 삼촌인 톰 역시 보병으로 프랑스 참호에서 전쟁을 치렀다. 독일군 독가스 때문에 건강을 해친 톰은 가족과 함께 플린트에서 살았다. 아버지는 비열한 전쟁이 착한 두 남자에게 미친 영향을 가까이에서 지켜봤다. 누구도 아버지에게 왜 미국이 1917년에 참전해야했는지 설명해주지는 않았지만, 전쟁의 북소리가 다시 울리기 시작했을 때 아버지는 도대체 이번 전쟁이 어떤 의미인지에 대해 정확히 알고 싶어졌다. 물론 국가가 공격받은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하지만 알아야할게 더 있지는 않을까? 뭐든 없을까? 그 놈들이 우리 함대를 파괴한 것만으로도 아버지에게는 충분했다. 전쟁에 나가 싸울 준비가 됐다.

아버지는 영장이 날아오기를 마지막까지 기다렸고, 결국 19427월 영장이 오기 시작했다. 육군에는 가고 싶지 않았던 아버지는 - “작전때 모두가 혼자 알아서해야한다고 말하곤 했다- 194281일 초등학교에 설치된 모병센터에 가서 해병대 입대서에 서명했다. 해병대? “해병은 팀으로 싸워라고 아버지는 친구들에게 말했다. “서로 돌보지.” 하지만 아버지 형제들 (모두 곧 뒤따라 입대를 했는데 빌 삼촌은 공군, 허비 삼촌은 해군, 로니 삼촌은 낙하산부대에 입대했다. 로니 삼촌은 전쟁 말기 저격수 총탄에 맞아 전사했다)해병대는 최악의 전투에 투입돼. 너는 해병대에서 죽을거야라고 말했다.

그럴지도 모르지.” 아버지는 하지만 해병은 절대 동료를 뒤에 남겨두지 않아라고 대답했다. 지독한 대공황기 13년동안 아버지는 뒤쳐질만큼 뒤쳐졌다.

모병 담당자는 아버지에게 언제쯤 입대할 수있겠냐고 물었다.

가능한 마지막 날짜가 언제인데요?”

“831.”

그럼 그날로 할게요.”

아버지는 마지막 한달동안 일하고, 니커보커에 드나들며 어머니 가삿일도 도우면서 평범한 일상을 즐겼다. 그 날이 되자 아버지는 더플백을 챙겨 조용히 집을 떠나 혼자 버스정류장으로 갔다. 도착해보니 신입 해병대원 15명이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플린트 저널이 그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 준비됐음!이란 설명을 달아 보도했다. 사진속 아버지의 얼굴은 준비!’ 와 거리가 멀었지만 , 다음날 신문에 게재된 그 사진에 아이러니한 캡션을 달았던 편집자는 분명 눈치를 채지 못했던 듯하다. 아버지는 기차를 타고 캘리포니아 샌디에이고의 기초훈련소로 갔다.

입대를 미루는 바람에 아버지는 몇 달 더 평화를 누렸을 뿐만 아니라 과달카날섬 육,,공 합동 상륙작전에 투입되는 기회도 놓쳤다. 그 작전에서 7000명 넘는 해병대원과 군인들이 전사했고 29척의 전함이 침몰했으며 615대 전투기가 추락했다. 아버지는 과달카날 작전이 끝난 다음에야 남태평양에 도착했기 때문에 태평양전쟁 최악의 학살을 피할 수있었다. 하지만 이후 3년간 숱한 죽음의 기회들과 마주하게 된다.

 

                                                            <타라와 전투>

 

무어 이병. 대위가 찾는다.” 병장이 말했다.

1943년 크리스마스 전날밤 11시쯤이었다. 프랭크 무어 이병은 지금이 크리스마스 이브인지, 크리스마스인지 헷갈렸다. 국제날짜변경선이란 그에겐 살날이 하루 더 있다거나 지나갔다는 의미일뿐 별 상관이 없었다. 날짜 계산을 하느라 애쓰는 대신, 그의 시간은 언제나 플린트 시간에 맞춰져있었다. 그게 더 편하고, 더 친숙했다.

그날 새벽 아버지는 1000여명의 해병대원들과 함께 오스트레일리아 해안선으로부터 수백km 떨어진 파푸아 뉴기니의 뉴 브리튼섬 전투로 향하는 수송선을 타고 잠자리에 들어있던 중이었다. 기도하는 사람은 많았지만 크리스마스 축하 분위기 같은 것은 별로 없었다. 오전 7시에 수륙양용 장갑차를 타고 뉴 브리튼 섬의 케이프 글루체스터 해안으로부터 약1.6km 떨어진 태평양 해상에 내리기로 돼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모이어 대위가 프랭크 이병을 찾고 있다.

자네가 타이프라이터를 칠 줄 안다는 말을 들었네.” 모이어 대위가 젊은 이병에게 말했다.

, 그렇습니다.” 아버지는 일본인을 죽이는 것과 크리스마스가 타이핑과 무슨 상관이 있는지 의아해하며 대답했다.

배에 남아있어.” 대위가 말했다. “사상자 보고서를 타이핑할 사람이 필요하다.”

하지만 대위님...”

이봐, 이건 중요한 일이야. 정확하고 책임있게 해야해. 본부 보고용이 아니더라도 최소한 가족들에게 말이야.”

아버지는 이것이 자신에게 주어진 전사제외용카드라는 것을 깨달았다. 배에 남는다는 것은 해병대 전우들의 가슴과 목, 머리에 쏟아지게 될 총탄과 폭탄 세례 속에 죽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였다. 또하루 살 수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며칠이 될지, 몇주가 될지는 보장할 수없었다.

그는 앞서 몇 달에 걸쳐 남태평양이 도살장으로 변해버린 뉴기니 전투를 곰곰이 생각해봤다. 해병 대신 육군에 들어가면 당장 지중해 어디로 파병되는 건가? 이탈리아와 독일군이 일본군처럼 필사적으로 싸우는 것 같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유럽의 적군도 승리를 원하겠지만, 전 부대원을 희생시키면서까지는 아니다. 무엇보다 전 대원이 전사하면 승리라고 할 수있나? 그는 일본군인들에게 그런 질문해보고 싶었지만, 생포되거나 항복한 일본군을 만날 기회 자체가 없다는게 문제였다.

모이어 대위의 제안은 매우 유혹적이었다. 하지만 프랭크는 배에 남아있어봤자 어차피 닥칠일이 미뤄질뿐이라는 것을 알았다. 갈 때가 되면 예수생일날 갈 수도 있다.

대위님, 저는 저희 대대와 있겠습니다. 괜찮으시다면, 전우들과 있게 해주십시오.”

모이어 대위는 프랭크 이병의 대답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미사 때 자진해서 복사역할을 하며 신부를 도왔던 것을 눈여겨 봐 왔던 참이었다. 모이어 대위는 감독파 교회 신자였지만 가끔 가톨릭 미사에 참석해 무어 이병이 쓰러진 코코넛 나무 그루터기를 제단삼아 미사를 경건하게 진행시키는 것을 지켜봤다. 무어에게 하루 더 살 수 있는 기회를 준다고 생각했지만, 그 청년은 덥썩 물지 않았다.

좋아, 가도좋다. 이제 좀 자라.” 대위가 말했다.

감사합니다.” 아버지는 잠자리로 돌아와 참으로 오랜만에 처음으로 깊은 잠을 잘 수있었다.

오전 5시 근처 미군 구축함에서 터져나오는 대포소리를 들으며, 아버지는 대위의 제안을 거절한 것이 실수였는지 잠시 생각했다. 모이어 대위와 정찰팀은 당초 예정됐던 것보다 2시간 빨리 섬 해안가에 상륙했다. 해병 제1사단이 섬에서 직면하게 될 상황을 알아보기 위해 아직 동이 트기전 어두울 때 상륙작전을 편 것이었다.

30여명의 해병대원들과 함께 수륙양용 장갑차 안에 끼어앉아있던 아버지는 문이 열려 가슴께까지 차는 바닷물 속으로 뛰어들기 전 마지막 기도를 올렸다. 그들은 일본군들의 밥이나 다름 없는 신세였다. 아버지가 가장 먼저 깨닫은 것은 물 속에서 걷기가 매우 힘들고 총도 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일본 저격수의 새벽 연습용 인간표적이 될 판이었는데, 정작 그 자신은 한발짝 한발짝 앞으로 내딛는게 가장 다급한 목표였다. 총이 물에 젖지 않게 머리 위로 치켜들면서 한발짝 더 나아갔다. 거의 한시간 이상(사실은 15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그렇게 걸어간 것같았고, 어떻게 아직도 살아있는지가 오히려 신기할 따름이었다. 거친 성격에 몸집도 큰 둠브로스키 병장은 얼어붙은 듯 꼼짝하지 않고 서서 흐느껴 울고 있었다. 계속 움직여, 다리, , 라이플, 젖지않게 해.

그렇게 걷다보니 어느덧 해변에 도달했다. 검은색 화산모래사장이었다. 검은 모래 위에 뿌려진 붉은 피는 기묘한 조합이었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밀림이 있었는데, km 밖 절벽쪽에서 날아오는 폭탄들을 피하기에 최적의 장소로 보였다. 몇시간만에 해병대원 대부분이 섬에 상륙했으며, 사상자도 예상보다 그리 많지 않았다. 일본군은 미 해병대가 상륙작전동안 연막탄을 터트려 시야를 가리는 바람에 해변 방어를 포기했다.

아버지가 소속된 대대는 섬 왼쪽 측면으로 이동해 고지쪽으로 진군했고, 다른 대대들은 밀림으로 돌진했다. 아버지와 부대원들은 일본군 공격이 거의 없다는 사실에 다시한번 놀랐다. 한시간동안 신속하게 움직여 힐250으로 기어올라갔고 쉽게 점령할 수있을 것같아 보였다.

그 생각이 맞았다. 해병대원들은 전선에 난 구멍을 발견하고 밀어부쳐 어느새 깨닫지도 못하는 사이에 전선을 돌파해버렸다. 모두들 미 해병대의 최전선이라고 여겼던 지점을 약1km나 지나 일본 영토 안으로 들어와버린 것이었다.

지도는 그들이 있는 지점이 힐250이라고 가르키고 있었다. 전시에는 언덕 아래보다 꼭대기에 자리잡는게 좋다는 것이 일반적인 상식이다. 웨스트포인트에서 배울 필요도 없다. 그래서 아버지와 대대원들은 언덕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언덕위에 있던 일본군인들은 자기네들이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 그때 갑자기 열대성 폭우가 쏟아져내려 한치앞도 볼 수가 없어졌다. 미 해병대원들은 폭우를 은폐물로 이용해 힐250으로 빠르게 치고 올라갔다. 수류탄과 37mm 기관총, 그리고 강력한 의지의 힘으로 그들은 고지를 점령했다. 고지에 있던 일본군인들은 적군의 규모가 그렇게 적은 줄 꿈에도 몰랐다. 수천명까지는 아니라도 최소 수백명의 적군을 상대하는 줄 알았던 모양이다. 일본군은 고지의 반대편쪽으로 퇴각해 그곳에서 대기중이던 대규모 아군부대와 합류했다.

해병대원들이 산마루를 확보하자 비가 그쳤다. 첫 승리로 사기가 충천했다. 국기를 꽂을만큼좋은 건 아니었지만 놀랍게도 사상자가 전혀 발생하지 않았다.

그때 비행기 소리가 들렸다. B-25의 라이트 사이클론 엔진의 달콤한 소음이 마치 여러분 우리가 왔습니다! 구조대가 왔어요! 란 소리같았다. 지상에서는 보병들이 비행기가 착륙할 수있도록 장애물들을 치웠다. 이제 공군들이 내려와 앉으면 된다.

하지만 아버지는 열대의 태양빛을 받은 비행기들 중 하나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를 봤다. 전투기가 공격을 받은 것이었다. 어떻게 그럴수가 있지? 미군 전선쪽에서 날아왔는데, 누가 미군기를 공격한 거지?

사실 미군 폭격기를 공격한 것은 상륙거점에 있던 미군들이었다. 일본 폭격기로 오인했기 때문이었다. 이번엔 미군 폭격기가 지상의 군인들을 일본군으로 오인해 폭격했고( B-25 폭격기 두 대가 화염에 싸여 추락했다), 250을 공중에서 내려다보며 자기네들을 공격한 일본군이 있다고 오판해 응징을 단행했다.

250에는 물론 일본군이 없었다. 그곳에 있었던 군인들은 내 아버지의 대대원들이었다.

B-25는 저공비행하면서 힐250에 맹폭격을 가했다. 아버지와 대대원들이 폭격기를 향해 같은편이란 신호를 보낼 틈도 없었다. 달려가서 숨을 곳도 없었다. 그냥 땅바닥에 몸을 던져 기도만 할뿐이었다. 아버지는 폭격기가 쏜 예광탄들이 똑바로 날아오는 것을 보고, 이대로 인생이 끝나는구나 생각했다. 눈을 감자 기뻤던 순간들, 빈곤, 가족 등이 머리 속에서 스치고 지나갔다. 이제 곧 죽는구나 생각했다.

눈을 떴을 때, 아버지의 생명은 끝나지 않았다. 하지만 앞에 펼쳐진 광경은 결코 보고싶지 않았던 것이었다. 옆에는 친구가 쓰러져 있었는데 얼굴이 날아갔다. 고개를 들어 시신너머를 보니 십여명의 부대원들이 총탄에 맞아 여기저기 쓰러져있었다. 어떤 부대원은 도와달라고 울부짖고 있었고,어떤 이들은 이미 죽은 상태였다. 군복은 피에 젖어 있었다. 14명의 해병대원이 공격을 받았고 1명이 사망했다. 아버지만 아무런 상처도 입지 않았다. 아버지도 잠깐 자신이 죽은 줄 알았다고 한다. 폭격기가 저공비행하면서 총탄을 퍼부어 대대원들뿐만 아니라 주변에 있던 화산돌들까지 박살냈는데 총알 한방 맞지 않고 살아남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지? 왜 나는 총탄 한방 맞지 않은거지? 신은 도대체 왜 내 옆에 있던 전우가 다른 미군의 손에 죽도록 만드신거지?

아버지는 그 다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거의 기억하지 못하신다. 분명 아버지 부대 뒤쪽에 있던 해병대원들이 이 모든 놀라운 사건을 지켜봤던 것같다. 그 해병대원들이 아버지와 부대원들이 있는 쪽으로 왔고, 아버지는 전우들에게 응급처치를 해주느라 정신이 없었다. 의료병들과 들것들이 현장에 도착했고, 아버지는 해안가 주둔지점으로 내려왔다.

괜찮습니다.” 아버지는 몇시간 휴식을 취한후 돌아갈 준비됐습니다라고 상병에게 말했다.

이제 곧 밤이다. 너는 여기 우리와 있는게 좋겠다.” 상병이 말했다.

아버지는 누군가 이번 사건을 상부에 보고하기 위해 물어보러 올 줄 알았다. 하지만 전쟁, 그것도 진짜 전쟁 중이었다. 아버지가 소위에게 왜 이런 비극적인 실수가 발생한 것이냐고 묻자, 소위는 전쟁 중에는 그런 일이 늘 일어나게 마련이라고 말했다. “그냥 자네는 계속 앞으로 전진해서 이기면 돼.” 그 다음부터 아버지는 절대 그 일에 대해 묻지 않았다.

다음날 아버지는 모이어 대위와 5명의 대원들이 상륙작전 중 전사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것이 군대가 돌아가는 식이란 사실을 알게 됐다. 죽음 뒤에는 더많은 죽음이 있을 뿐이었다. 곧 다른 대위가 이병 두 명과 함께 배치됐다.

두사람은 내 통신병이다라고 대위는 담당장교에게 말했다. “지금 상태가 안좋다. 이들과 당신네 대원을 바꾸자.”

소위가 아버지를 쳐다보며 말했다.

이 대원은 기관총 사수입니다. 이 사람과 바꿔 드리겠습니다.”

사수말고 통신병이 필요하다. 전보꾸러미를 들고 빠르게 뛰어서 숨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해. ”

이 대원은 숨는 법을 압니다. 믿어보십시오.”

통신병이라고요?” 아버지가 물었다. “전선에서 전보를 들고 사령부까지 뛰어가는 사람말입니까?”

그렇다.”

총은 안쏩니까?”

그렇다. 전보꾸러미를 들고 뛰면서 총까지 쏠수는 없어. 대신 적군들이 너를 겨냥해 쏠거다. 적군들은 우리가 작전사령부에 보고하지 못하도록 통신병부터 목표로 삼거든. 이 일을 하려면 배짱이 있어야하고 일본놈들을 피할 수 있을만큼 재빠른 춤동작을 알고 있어야한다.”

배짱? 춤동작이라고? 처음부터 그렇게 말하시지.

전쟁이 끝날때까지 통신병이었단다.” 아버지는 이렇게 말하며 전쟁이야기를 끝냈다. “다시는 기관총을 멘 적이 없어. 수없이 총탄공격을 받았지만 전보꾸러미를 운반해야했기 때문에 응사를 할 수없었단다. 미친 결정이었지.”

아버지가 그 모든 이야기를 해주셔서 고마웠다. 하지만 그때 나는 열세살이었고, 이야기가 끝나기 무섭게 밖에 나가 놀려고 시계만 바라보며 안절부절해댔다. 그런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던 아버지는 아직도 1943년으로 돌아가 있었다.

해마다 크리스마스 때면 그 날을 생각해. 내가 살아남은 것은 어쩌면... 행운이었..” 아버지의 목소리가 잣아들었다.

아빠, 나 이제 나가 놀아도 돼요? 전쟁 이야기는 나중에 해주셔도 되잖아요?”

전쟁 이야기를 다시 들은 것은 그로부터 몇 년의 세월이 흐른 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