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여우의 영화 이야기/내가 본 영화들

[사랑할때 버려야할 아까운 것들]...미국영화 속 중년 독신남녀에 관한 몇가지생각

bluefox61 2004. 2. 18. 15:11

다이앤 키튼 주연의 [사랑할때 버려야할 아까운 것들], 어떻게 보셨나요. 

일단은 할리우드 영화에선 보기 힘든 50대 말 중년여성의 사랑, 그것도 
섹슈얼한 욕구를 가진 존재로서의 여성을 그리고 있다는 점이 신선하게 느껴지더군요. 
중년의 사랑이라면, 육체적인 부분을 은근슬쩍 생략하고 지나가는 다른 미국 상업영화들과 
달리, 주인공의 벗은 몸까지 정면에서 드러내고 있다는 점 
(물론 눈깜짝하는 순간에 지나가기는 하지만 ^ ^) 도 흥미로웠구요. 


이 영화가 중년의 로맨틱 코미디로 가능했던 것은 , 
아무래도 다이앤 키튼의 매력이 가장 큰 힘이 된 듯합니다. 
보톡스를 맞지 않고 자연스럽게 주름진 얼굴, 
그리고 중년의 몸도 잘 관리만 하면 아름다울 수있다는 사실을 
키튼은 이 영화에서 증명해내고 있죠. 

할리우드 영화에서 섹슈얼리티를 가진 40세 이상의 여성 캐릭터는 
거의 희귀동물이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물론 예외없는 법칙은 없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외가 중년의 무식하고 가진 것없는 여자와 
20대 여피의 사랑을 그린 [화이트 캐슬]이죠) 


[사랑할 때 버려야할 아까운 것들]을 보면서, 
이상하게도 프랑수아 오종의 [사랑의 추억(원제는 UNDER THE SAND)]가 
자꾸 생각이 나더군요. 

영화의 주인공은 50대 초반쯤의 영문학교수이죠. 
배우는 제가 '내가 사랑한 배우들'에서 소개한 적이 있는 샬로트 램플링입니다. 
주인공은 남편이 실종된 후, 한 남자의 아내로서 자신의 존재, 
여성으로의 섹슈얼리티의 문제 등에 관해 큰 혼란을 겪게 됩니다. 
오종 감독이 주인공인 중년의 여성을 바라보는 시선이 매우 흥미로운데, 
지나치게 여성성을 강조하지도 않고,  또 그렇다고 무감각한 늙은이 취급도 
하지 않으면서, 한 여자의 시시때때로 흔들리는 감정을 
섬세하게 잡아내고 있습니다. 
새로운 남자와의 섹스도 아주 자연스럽게 찾아오는 것으로 그리고 있죠. 
물론 이 영화가 관객에게 강한 호소력을 발휘할 수있었던데는 
주연배우 샬로트 램플링의 아름다움이 큰 몫을 차지하지요. 

[사랑할때 버려야 할 아까운 것들]은 , 할리우드의 새로운 중년여성상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좋은 점수를 받을 만 합니다.

그러나 낸시 마이어스([왓 위민 원트)]의 이 로맨틱 코미디는 딱 여기까지 이죠. 
단지 주인공이 젊고 잘생긴 연하의 의사 대신 
60대의 음반업자(잭 니콜슨)를 남편으로 택하는 결론때문만은 아닙니다. 

가장 눈에 거슬리는 점은 
바로 할리우드 영화가 중년의 독신 남녀를 묘사하는 상투적인 방식이었습니다. 
거의 예외없이 중년의 독신여성은 까다롭고,독선적이고, 인간관계에 문제가 있고, 
고집이 세고, 원칙주의자이죠.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자 경험이 한정돼있고, 순진하며, 아름답다는 점입니다. 

 

남자는 느믈느믈하고, 세상돌아가는 일에 통달해있고, 사회적으로 성공했고,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바람둥이지만 좋은 여자 만나면 
언제든 정착할 속마음을 가지고 있구요. 
[어느 멋진날 (ONE FINE DAY)]의 미셀 파이퍼와 조지 클루니, 
[왓 위민 원트]의 헬렌 헌트와 멜 깁슨은 
할리우드 영화 속의 이런 전형적인 중년 남녀 캐릭터라고 할 수있습니다. 
[사랑할 때 버려야할 아까운 것들]이 그런 정형성을 그대로 답습한 것은 
[왓 위민 원트]와 같은 감독의 작품이기 때문일까요? 

왜 할리우드 영화 속의 중년 여성은 늘 그렇게 히스테리컬하고 자기방어적이어야 하는지 
안타깝고, 때로 화가 나기까지 합니다. 
[왓 위민 원트]에서 헬렌 헌트가 사랑에 빠지자 한꺼번에 무너져내린게 
아쉬웠던 이유도 이와 비슷합니다. 
[사랑할때...]에서 주인공 다이앤 키튼이 희곡을 쓰면서 
혼자 울다가 웃으며 온갖 히스테리를 부려대는 장면은 
아무리 이 영화가 코미디란 점을 고려하더라도 
전혀 공감하기 어려운 부분이었습니다. 키튼의 연기도 너무 작위적이었구요. 

사랑앞에서 한없이 약해지는 건 ,아마도 모든 인간이 마찬가지일 겁니다. 
하지만 어렵게 새로운 사랑에 마음과 몸을 열어놓은 
중년 여성의 내면을 이렇게 밖에는 묘사할 수없는 것인가 , 
다시 생각해보게 됩니다. 

[사랑할때 버려야할 아까운 것들]이 재밌지만 ,아쉬운 탓은 아마도 그 때문인 듯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