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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머리 속의 지우개]를 보면서 엉뚱하게도 예전 국내외 영화들에서 백혈병과 폐결핵으로 죽어갔던 수많은 미인들을 떠올리게 되더군요. 그 시절, 백혈병과 결핵에 걸린 여자들은 어쩌면 그렇게도 하나같이 새하얀 얼굴에 하늘하늘한 몸매를 지닌 섬세하기 짝이없는 미인이었던지요.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고통을 참는거라든지 가냘프게 쿨럭쿨럭 기침을 하던 모습이 어찌나 우아해보이던지...솔직히 어린시절 한두번은 흉내까지 내봤던 기억이 나네요.(흐억!) 

[춘희]를 영화로 리메이크한 [카미유]의 그레타 가르보에서부터 [라스트 콘서트]의 스텔라(배우 이름은 모르겠습니다)까지, 그리고 [선물]의 이영애를 비롯한 숱한 한국의 미인 불치병 환자들까지, 이 계보에 오른 여성은 아마도 수없이 많을 겁니다. 

[내머리 속의 지우개]는 고전적인 불치병 여주인공과 그의 연인의 애절한 사연을 극대화한 전형적인 영화죠. 손예진과 정우성이 한 스크린에 등장하는 것만으로도 스펙터클이 되긴하더군요. 상업적으로 매끄럽게 뽑아냈다는 것도 부인할 수없는 사실이구요. 

하지만, 개인적으로 다른 어떤 불치병보다도 알츠하이머에 대해서는 직접 체험한지라 , 이 영화에서 묘사되는 알츠하이머의 병세는 '영화적 설정'이라고 보아넘기기가 아무래도 힘들더군요. 꼭 1년전 돌아가신 아버지가 알츠하이머(워낙 연로하셨던터라 대단히 심각한 증세까지는 아니었지만) 증세로 지성이 파괴되는 것을 지켜보면서 가슴이 무너져 내렸던 경험이 있기 때문이죠. 

이 영화에서 손예진이 보이는 알츠하이머는 오히려 중증 기억상실에 가깝지 않나 생각될 정도로 , 알츠하이머와는 정말로 거리가 멀더군요. 아니면, 매우 초기단계이던가요. 알츠하이머는 기억상실은 물론이고 극도의 불안,주변에 대한 불신. 이유없는 가출, 경우에 따라선 강한 폭력성을 동반하기도 하죠. 그렇기때문에 환자 주변의 인간관계가 완전히 파탄나는 경우가 많죠. 
만약 영화에서 여주인공이 알츠하이머환자였다면, 옛애인이 찾아왔을때 예전처럼 다정하게 대하기보다는 일그러진 집착이나, 포악성을 드러내는게 좀더 현실적이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또 집을 나가서 요양원에 들어가는 설정에서도, 현실적으로 거리를 헤맸을 가능성 높은 환자가 호텔같은 최고급 요양시설에 수용됐을 가능성은 한국에서는 100% 없다고 봐야겠죠. 
저는 남편이 아내가 있다는 병원을 찾아가는 장면 다음으로, 박찬욱 감독의 단편 '찬드라'에서 네팔 여성노동자가 우리말 못한다는 이유하나로 수용됐던 그런 허름하고 비인간적인 정신병원이 등장할 줄 알았답니다. ( 멜로 영화에선 가당치 않은 일임에도 불구하고.^^) 
게다가 부모에게도 연락을 끊은 주인공이 제 경험상 분명 한달 비용이 수백만원이 들게 분명한 멋진 병원에 몰래 입원해있다는 것도 말이 안되구요. 

아마도 앞서 언급했던 옛 영화들도 백혈병이나 폐결핵의 실상과는 많이 달랐을 겁니다. 영화에서 반드시 불치병 환자의 처참한 상황을 그대로 보여줄 필요는 없겠지요. 하지만, 최근 [얼굴없는 미녀]에서도 그랬듯이 '영화이니까'란 점 하나만을 내세워 질병에 대한 환상만을 부추기는 묘사는 좀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한마디로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는다고나 할까요. 

약 2년전엔가 개봉했다가 조용히 사라진 영국영화 [아이리스]야말로 알츠하이머에 대한 사실적인 묘사때문에 더욱 감동과 여운을 남겼던 작품으로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습니다. 아이리스 머독은 잘 알려져있다시피 [더 벨]등 숱한 소설들을 남겼고, 옥스포드에서 실존철학을 가르쳤던 당대 최고의 지성이었죠. 그랬던 그의 지성과 인성이 병마로 인해 한순간에 무너져내리고, 그의 남편은 그런 아내를 끝까지 사투를 벌이며 보살피죠. 이 영화를 보면서 , 아버지 생각을 하며 가슴이 미어지고 눈물을 쏟았던 기억이 납니다.... 

[내 머리 속의 지우개]를 보고 눈시울이 뜨거워진 나자신이 마치 상업적 장치에 적확히 반응하는 파블로프의 개가 된 느낌이었다면 [아이리스]는 가슴으로 운 작품이었죠. 


가슴을 울리는 한국영화가 그립습니다.  

Posted by bluefox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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