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여우의 세상 이야기/지구촌 전망대

아르비의 죽음을 기억하라

bluefox61 2006. 7. 7. 14:02

북한 미사일 발사, 멕시코 대통령 선거,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침략 등 유난히 굵직한 뉴스들이 한꺼번에 쏟아진 한 주였다. 이 와중에 제대로 조명받지 못했지만, 역사 속에 남아 영원히 기억될 뉴스 속의 이름 하나가 있다. 아비르 카심 함자.

아비르는 이라크 바그다드 남쪽 마무디야에서 아버지, 어머니, 일곱살난 동생 하델과 함께 사는 평범한 15살난 소녀였다. 아비르에게 단 한가지 평범하지 않은 점이 있다면,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유난히 돋보이는 미모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동네를 드나들면서 매일 미군 검문소 앞을 지나가야 했던 아비르는 그 아름다움 때문에 제101 공수사단 소속 미군병사들의 눈길을 끌었다. 그들 가운데에는 올해 스무살난 이등병 스티븐 그린이 있었다. 아비르는 치근덕거리는 이들에게 두려움을 느꼈지만 , 앞으로 자신과 가족들에게 닥칠 비극을 예상하지는 못했다.

지난 3월 11일 새벽, 아비르의 집에 갑자기 검은 옷을 입은 네명의 남자가 들이닥쳤다. 그린 이등병 등 미군 병사 4명은 만취상태였다. 가족과 함께 자고 있던 아비르는 다른 방으로 끌려갔고, 그린과 다른 미군 병사 1명에게 차례로 강간당한 뒤 총으로 살해당했다. 그린은 공포에 떨고 있던 어머니 파크리야까지 강간한 후 아버지 카심 함자 라헴, 막내 하델 등 아비르 일가족을 살해했다.

다음날 아침, 한 가족의 몰살은 동네사람들에 의해 발견됐다. 시신을 조사한 병원의사의 사망확인서에는 “(아비르의) 머리와 가슴에 총상이 있고 시신이 불에 타 얼굴을 알아보기조차 힘들다”고 적혀 있었다. 병원으로부터 4구의 시신을 인수한 일가 친척들은 강간을 가족 전체의 명예훼손으로 여기는 이슬람 사회의 뿌리깊은 관념 때문에 아비르 등을 장례조차 치르지 않은 채 서둘러 매장해야만 했다.

이 끔찍한 사건은 무려 석달간이나 감춰져 있다가, 지난달 미군 당국이 제101공수사단 소속 현역, 전역 병사들의 심리를 상담하는 과정에서야 비로소 드러나게 됐다. 그 사이 11개월간의 복무기간을 마치고 ‘명예’제대를 한 그린은 과거 동료들의 증언에 따라 체포됐고, 오는 10일부터 노스캐롤라이나주 법정에서 법의 심판을 받을 예정이다.

최근 들어 이라크로부터 전해져오는 뉴스들은 점점 더 베트남전을 떠올리게 한다. 아비르 가족 몰살사건은 잔혹성과 엽기성 면에서 베트남전 당시 미군에 의한 ‘미라이 주민 학살’에 버금가고 있다. 전쟁이란 엄청난 사건과 극도의 혼란 속에 개인의 고통과 비극은 어느정도 불가피하고 경시되는 게 현실이지만, 이 사건은 이라크 주둔 미군병사들의 모럴 해저드를 단적으로 보여줬다는 점에서 심각성이 있다.

문제는 미국정부와 언론, 그리고 국민들의 인식이다. 미국 일각에서 반전여론이 뜨거운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제3자의 입장에서 볼 때, 월남전 당시 ‘미라이 학살’사건보도를 접했던 미국 국민들이 ‘우리의 착한 아들들이 저지른 천인공로할 만행’에 큰 충격을 받았던 것과 같은 반응은 아직 찾기 힘든 듯하다. 미국언론들 역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충돌과 북한 미사일 발사 뉴스 등 때문에 아비르 사건은 ‘반짝보도’에 그쳤다.

부시 행정부는 팔레스타인 무장조직에 피랍된 19세 이스라엘 군인 길라드 샬리트 상병 1명을 살리기 위해 팔레스타인을 무차별 공격하고 6일 현재 70여명의 민간인 사망자를 초래한 이스라엘에 대해서는 “(군사행동을)이해한다”고 두둔하면서도, 정작 참혹하게 살해당한 아비르와 그 가족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악화일로를 치닫고 있는 이라크전의 비극을 후대 역사가 어떻게 기록하고 평가할지 가슴이 무거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