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여우의 세상 이야기/내가 본 세계

유엔 인권위 미얀마특별보고관이 말하는 '개방 후 미얀마'

bluefox61 2014. 9. 14. 14:11

상전벽해(桑田碧海). 반세기 가까운 세월 동안 군부독재체제 하에서 국제사회와 단절하다시피 하면서 살아오다, ‘위로부터의 개혁개방’을 밀어붙이고 있는 미얀마를 나타내는 말로 이보다 더 적확한 표현을 찾기 힘들다.

7년 전인 2007년 반정부 시위가 일어났을 당시만 해도 군인과 경찰의 총에 맞아 사상자가 속출했던 미얀마에 지금은 개방의 훈풍이 거세게 불고 있다. 테인 세인 대통령이 이끄는 민선정부는 지난 2010년 ‘민주화의 상징’인 아웅산 수지 여사의 가택연금을 해제했고, 2년 뒤인 2012년 수지 여사는 보궐선거에 승리하며 정계에 복귀했다. 지난해 12월 미얀마 정부는 정치범 전원 석방을 선언했고, 지난 3월에는 언론자유를 보장하는 미디어법이 제정됐다. 보석 등 수많은 광물과 천연가스, 석유 등 막대한 자원을 보유하고 있는 미얀마에는 많은 외국 투자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새우도 늙어 죽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경제 활력이라고는 찾을 수 없었던 미얀마가 지금은 ‘마지막 엘도라도’로 불리며 국제사회의 ‘핫스타’로 떠오르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양지가 있으면, 그늘이 있는 법이다. 한쪽에서는 개혁개방과 민주화가 계속되고 있는 반면, 다른 한쪽에서는 혼란과 갈등이 심화되는 모습이다. 특히 종교, 종족 분쟁은 다민족 국가인 미얀마의 최대 장애물이자 민주화 시험대가 되고 있다. 서북부 라카인주에서 이슬람교도인 로힝야족과 불교도 사이의 유혈충돌로 수백 명이 사망하고 수십만 명이 난민 신세가 됐는가 하면, 북부 카친주에서는 2011년 재개된 카친족과 정부군 간의 전투로 인해 막대한 인명 피해가 계속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지난 5월 유엔 인권이사회(UNHRC)의 미얀마 특별보고관에 이양희(아동·청소년학과·58) 성균관대 교수가 선출됐다. 지난 2006년 유엔 인권이사회가 설립된 이후 한국인이 특별보고관에 선출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미얀마에 대한 국제사회의 기대가 지나치게 ‘장밋빛’이란 우려가 나오고 있는 가운데, 오는 10월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리는 인권이사회에서 이 보고관이 과연 미얀마의 인권실태에 대해 어떤 보고서를 내놓을지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미얀마에서 첫 번째 조사활동을 마치고 인권이사회 개최를 기다리고 있는 이 보고관을 지난 4일 서울 종로구 명륜동에 위치한 성균관대 캠퍼스에서 만났다. 한국인 최초 인권 특별보고관이란 직책이 갖는 의미와 아동학자로서 유엔 기구의 인권 분야 활동가의 길을 걷게 된 배경에 대해서도 물었다.

 


―지난 7월 미얀마를 직접 방문해 조사활동을 벌인 것으로 압니다.

“정확하게는 7월 16일부터 26일까지 미얀마를 방문했습니다. 이번에 특히 중점적으로 살핀 서북부 라카인주와 북부 카친주는 미얀마에서 가장 못사는 지역이자 인권침해가 심각한 곳이에요. 이슬람교도와 불교도 간의 종교분쟁으로 인해 고향 땅을 떠나 난민이 된 사람이 65만 명이나 됩니다. 이중 약 12만 명이 태국 미얀마 국경지역에서 살아가고 있어요. 지난 3월에는 유엔과 비정부기구(NGO)들이 난민들만 편파적으로 지원하고 있다는 이유로 미얀마 주민들이 유엔 사무소를 폭격했을 정도로 미얀마의 종교, 종족 갈등은 심각한 상태입니다.”

―카친주 경우엔 정부군과 반군 간에 교전이 이어지고 있는데, 위험한 상황도 있었나요.

“정부군과 반군 카친독립군(KIA) 사이의 교전지역인 카친주에 가려면 양곤에서 5시간 넘게 차를 타고 밀림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워낙 자주 반군이 출몰하는 지역이어서 무장한 정부 경호원들이 동행했지요. 조사단이 방문하려고 했던 날 마침 큰 비로 인해 산사태가 났었어요. 길이 막힌 것도 문제였지만, 산사태로 인해 반군들이 설치해놓은 지뢰가 쓸려 내려올 수도 있다는 게 더 문제였죠. 평소에도 험난한 지역이어서 오후 6시가 넘으면 들어가선 안 된다고 하더군요. 그래도 제가 “괜찮다, 산사태가 나서 막혀있으면 길을 내서라도 가겠다”고 주장해 출발했죠. 그런데 과연 가서 보니 더 이상 앞으로 나가기 힘든 상황이었고, 아무래도 반군의 표적이 되기 쉬울 것 같아 결국 인근 도시로 되돌아가야만 했어요. 다음날 오전 5시쯤 전날 갔던 장소를 지나는데 지뢰들이 쓸려 내려와 있더군요. 위험한 곳이란 말은 들었지만 그렇게 험한 상황인지는 몰랐어요.”

―라카인 상황은 어땠나요.

“양곤에서 배를 타고 3∼4시간 정도 간 다음, 다시 차를 타고 들어가야 라카인에 도착할 수 있어요. 배를 타고 강 위를 가는데, 폭우가 쏟아져서 시야가 몇 미터도 채 되지 않았어요. 정부가 다행히 큰 배를 내줘서 위험한 상황은 아니었지만, 하루 10시간 넘게 이동하는 일정이어서 힘들기는 하더군요.”

미얀마는 버마족이 70% 정도로 다수를 이루고 있으며 샨족, 카렌족, 카친족 등 135여 개의 소수민족이 살고 있다. 종교적으로는 불교도가 89%이고, 이슬람교도와 기독교도가 각각 약 4%로 추정되고 있다. 하지만 라카인주에 주로 거주하는 이슬람교도인 로힝야족은 소수민족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있다. 소수민족은 법적으로 인정받지만, 로힝야는 그렇지 못하다. 이들이 미얀마에 들어온 과정에 대해서는 예로부터 서구 교역과정에서 들어온 이슬람계 주민이란 설과 영국 식민체제 하에서 인력수급을 위해 방글라데시에서 들어왔다는 설이 있는데, 불교를 믿는 미얀마 주민들은 이들을 불법입국자로 규정해 공존 자체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로힝야들은 아이도 2명 이상 낳지 못하는 산아제한까지 당하고 있다.

이 보고관은 직접 목격한 난민들의 생활을 “인간 이하의 삶”으로 표현했다. 경제활동이 전무한 것은 물론이고, 난민촌 밖으로는 한 발짝도 나갈 수 없고, 병이 들어도 치료조차 받지 못해 죽을 수밖에 없는 형편이라는 것이다.

―미얀마 정부의 개혁개방 속도에 국제사회가 놀라움을 나타내고 있는 것과는 상당히 다르네요.

“아웅산 수지 여사의 석방과 정치활동 재개에서 보듯, 미얀마가 정치적으로 매우 빠르게 변화해가고 있는 것은 사실이죠. 하지만, 미얀마의 변화를 보수적으로 보자는 게 제 입장입니다. 정부가 언론 자유를 허용했다고 결사, 표현의 자유는 여전히 한계가 있습니다. 일반 국민들이 법치주의에 입각해 공정한 재판을 받기도 쉽지 않지요. 아직 고문이 남아있고, 여성들의 성적 피해도 보고되고 있어요. 내년에 총선이 치러지는데, 미얀마 내부의 갈등이 더 악화할 가능성이 있어서 우려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미얀마 내부에서 발생한 폭력사태를 보면, 인구조사나 큰 정치집회 등이 있을 때 특정 집단 소속으로 보이는 이들이 살인과 방화를 저지르고 사라진 공통점이 있어요. 정치적 격변기에 불안을 조성해 사회통제를 하려는 의도가 있다는 의심이 드는 이유죠.”

―하지만 정부가 지난해부터 정치범 수백 명을 석방하는 것을 보고 상당히 놀랐는데요.

“많이 풀려나기는 했죠. 하지만 새로 수감되는 정치범들이 있어요. 물론 정치적 혐의를 내세우지는 않아요. 형사법상의 범법 행위를 이유로, 정부에 껄끄러운 사람들을 체포, 구금, 유죄판결을 내리는 거죠. 요즘에는 개발바람에 농민이 살아오던 땅에서 쫓겨나는 일도 많아지고 있어요. 최근 한 여성이 군인들에게 집단 성폭행을 당한 사건이 있었는데, 이에 대해 정부에 항의하던 여성들이 투옥된 사례도 있습니다. 지난 7월 초에는 유니티란 언론사의 최고경영자와 기자들이 군사시설에 들어가 취재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투옥됐고요. 이번 방문 때 제가 인터뷰한 사람이 보복조치를 당하기도 했어요. 미얀마는 아직 개인이 토지를 소유할 수 없는데, 땅 소유권을 위해 활동하고 있는 분이 저를 만나고 난 다음 며칠 뒤 추가자료를 가지고 양곤에 있는 유엔 사무소로 오다가 구속돼 8개월형을 받았다고 하더군요. 어떤 법을 어겼다는 이유였는데, 아무래도 저를 만났던 것과 연관이 있지 않겠어요. 이번에 교도소를 방문해 정치 사상범 100여 명을 만나 인터뷰를 했는데, 한 사람당 30분씩 해서 하루 평균 6∼7시간씩 인터뷰를 진행했죠.”

―자유로운 인터뷰가 가능했나요.

“물론 인터뷰는 단둘이서 했지만 당연히 도청을 하지 않았겠어요. 전임 보고관은 인터뷰 도중 도청장치를 발견하고, 그 자리에서 인터뷰를 중단해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고 하더군요. 그 이후 미얀마 정부가 보고관의 입국을 허용하지 않다가, 이번에 처음으로 허용한 거죠.”

―미얀마 정부가 보고관의 정치범 면담을 허용하고, 분쟁지역을 공개한 것을 보면 조사에 대한 협력의지가 강하다고 볼 수 있지 않나요.

“조사활동을 하려면 정부의 지원이 필요합니다. 정부가 자기네 입맛에 맞는 부분만 조사단에 공개할 수 있고, 그런 점을 늘 유의하는 게 사실이에요. 그러나 이번에 방문해보니 미얀마 정부가 적극 협력하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어요. 앞서 보고관들에게는 현지에서 조사활동을 할 수 있는 기간을 며칠밖에 주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제가 요청한 열흘을 아무 조건 없이 받아들였던 게 좋은 예이죠.”

―그러는 이유가 뭐라고 보십니까.

“인권 결의안 대상국가라는 꼬리표를 떼겠다는 정부의 의지가 무엇보다 강한 것 같더군요. 지난 2008년 사상 최악의 사이클론 나르기스로 엄청난 인명과 재산 피해를 본 후, 정부가 국가경제를 살리기 위해서는 개혁개방을 해야 한다는 인식을 갖게 된 듯합니다. 제가 만나본 미얀마 정부 관계자들이 자주 하는 말이 “모든 게 하루에 이뤄지지는 못한다”는 것이었어요. 저는 “변화는 있어야 하고, 가능하며, 지금 당장 해야 한다”고 대답했고요. 미얀마가 개혁개방으로 눈부신 경제성장을 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의료와 교육 서비스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으며 청년들의 미래도 불안한 상태예요. 미래에 대한 희망이 없이 마약에 빠지는 청년이 많고, 에이즈 환자도 느는 추세죠. 사회, 보건투자가 늘었다고 하나 여전히 너무 적은 수준인데, 특히 교육 투자는 유엔 권고수준인 국내총생산(GDP) 4%보다 크게 적은 1%도 안되는 수준이지요.”
 

―아웅산 수지 여사를 만나서는 어떤 이야기를 나눴는지요.

“양곤에서 약 1시간 동안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어요. 수지 여사는 역시 아우라가 있더군요. 대단한 신념의 소유자임을 느꼈습니다. 수지 여사는 법치주의의 중요성을 많이 강조하더군요. 로힝야족 문제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고요. 테인 세인 대통령도 만나고 싶었지만, 이번에는 면담이 성사되지 못했어요. 내년 1월 2차 조사 때에는 테인 세인 대통령과 군최고사령관을 면담하겠다고 미얀마 정부에 요청해놓은 상태예요.”

―미얀마의 변화가 북한에 모델이 될 수 있다고 봅니까.

“직접 방문해보니 미얀마가 경제개방을 더이상 미루기 어려운 상황이더군요. 미얀마는 천연자원이 너무나도 풍부한 국가인 데다가 자랑스러운 역사와 문화전통을 가지고 있지요. 그런데도 50년 넘게 독재와 부패로 인해 황폐해져 버렸고, 국가를 다시 세우기 위해선 개방할 수밖에 없다는 게 현 정부의 인식인 듯합니다. 이를 위해 인권 침해국이란 꼬리표를 떼어버리고, 아세안 의장국 등으로 국제사회 속에서 활동하면서 국가적 발전을 이룩하겠다는 의지가 있는 거죠. 미얀마의 이런 변화가 북한의 개혁개방의 모델이 될 수 있을 것으로 봅니다.”

유엔 인권이사회는 유엔 가입국의 인권상황을 정기적, 체계적으로 검토하고 개선하기 위해 만들어진 상설위원회이다. 원래는 유엔 경제사회이사회의 기능위원회 중의 하나였던 유엔 인권위원회(UNCHR)였다가, 지난 2006년 현재와 같은 형태로 승격·설립됐다. 북한, 팔레스타인, 미얀마 등 지역별 특별보고관은 현재 14명이며 표현의 자유, 교육권 등 주제별 인권실태도 조사한다.

이 보고관은 지난 5월 후보 경선을 거쳐 선출됐고, 6월 2일 정식으로 임명됐다. 그는 “당초 3월에 임명을 받아 일을 시작해야 했는데, 팔레스타인 특별보고관 선정문제가 생기면서 다른 보고관 선정 과정 전체가 미뤄지는 바람에 업무시작이 늦어졌다”고 설명했다. 유엔 인권 특별보고관 선정과정은 2008년부터 경선제로 이뤄지고 있다. 원서를 내면 1차 서류심사과정에서 후보자 6명 정도가 추려지고, 각 인터뷰가 진행된다. 여기서 다시 3∼4명으로 후보가 좁혀져 이사회에 추천하면 의장이 최종 지명하는 방식이다. 이 보고관은 총 18명의 후보자들과 경합을 거친 끝에, 유엔 인권이사회가 임명한 4번째 미얀마 특별보고관이 됐다. 이 보고관 이전의 미얀마 보고관은 모두 중남미인으로, 아시아인이 임명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많은 지역들 중 왜 하필이면 미얀마 특별보고관입니까. 왜 지망하게 됐는지 궁금합니다.

“3년 전부터 해보고 싶은 일이었어요. 앞서 유엔 아동인권이사회 위원과 의장으로 10여년 동안 활동해 온 경험이 큰 도움이 됐죠. 특히 아동인권이사회 의장으로 일하면서 미얀마 아동실태에 대해 보고를 받았는데, 이때 미얀마 인권 상황 전반에 대해 관심이 생겼어요. 미얀마가 한국 역사와 연관이 적지 않은 국가란 점도 관심이 생기게 된 이유 중 하나였던 듯합니다. 우리나라가 전후 어려웠던 시절에 유엔의 도움을 많이 받지 않았습니까. 1960년대에 유엔 사무총장하면, 미얀마(당시 버마)의 우탄트를 떠올리기도 했고요. 일본식민체제 경험에다, 민주화 역사도 비슷하죠. 아웅산 테러사건은 물론이고요. 그런 점에서 한국인으로서 미얀마 인권발전에 기여해보고 싶은 바람이 생긴 것 같아요.”

―아동학자로서 어떻게 국제기구 활동을 하게 됐는지요.

“솔직히 상상도 못했던 일이었어요. 아버지(정치인 이철승)가 장면 정부 때 15차 유엔 총회에 옵서버 자격으로 참석하신 적이 있는데, 그 이후 자주 “우리 딸이 유엔에서 일하면 좋겠다”고 하셨거든요. 그 때마다 아버지께 “제가 어떻게 유엔엘 가요”라고 답하곤 했죠. 미국 대학에 진학하면서 불문학을 전공한 것은 아버지의 영향이 컸어요. 국제기구에서 일하려면 불어를 할 줄 알아야 한다고 하셨거든요. 그래도 내 꿈과는 거리가 멀었고, 대학원에서는 전공을 바꿔 특수아동 교육을 공부했어요. 어린 시절 부모님과 미국의 흑인촌에 살면서 “가장 목소리가 작은 사람들을 위해 일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고, 그 경험이 장애아동에 대한 공부를 하도록 이끌었던 거죠. 공부를 마치고 귀국해서 학자의 길을 걷다가 우연히 2002년에 외교통상부로부터 유엔 아동인권위원회에서 일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받았고, 그걸 계기로 10여 년 동안 아동 인권위 위원과 위원장으로 일했습니다. 30여 년 전에 배웠던 불어를 드디어 써볼 수 있게 된 거죠(웃음).”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만으로도 벅찰 텐데, 어떻게 국제기구활동까지 함께할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그래서 사실 학생들과 동료 교수들에게 많이 미안합니다. 이들의 도움과 배려가 없다면, 하기 어려운 일이죠. 특히 수업에 피해가 없도록, 보강도 하고 미리 녹화해서 화상수업도 하고 그럽니다.”

이 보고관은 한국 최초의 유엔 인권 특별보고관이란 존재가 갖는 의미를 “이제는 우리도 보다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데 기여할 수 있게 됐다는 것”으로 설명했다.

“우리나라가 눈부신 경제성장으로 국제사회에 기여해온 것이 사실이지만, 이제는 보다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데 기여할 때라고 봅니다. 특히 우리는 군부독재시대를 겪으면서 인권침해를 겪은 경험이 있지 않습니까. 그 경험을 살려 인권향상과 경제발전이 함께 이뤄질 수 있도록 우리가 목소리를 낼 수 있다고 생각해요. 재미있는 것은 미얀마 난민들도 한국 드라마를 열심히 본다는 사실이에요. 한국 드라마를 본 난민들이 엄마, 아빠란 말을 하더라고요. 한국에 대한 선망을 가지고 있다는 걸 느꼈죠. 어려운 상황에 놓인 사람들을 위해 무엇인가 기여하는 것이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으로서의 책임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양희 유엔 인권이사회 미얀마 특별보고관은 1956년 서울에서 정치인 이철승 헌정회 원로회의 의장과 김창희 여사 사이에서 태어났다. 5·16 군사정변 후 정치적 망명길을 떠난 아버지를 따라 미국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워싱턴DC의 조지타운대에서 불문학을 전공한데 이어 미주리대에서 장애아동 조기특수교육으로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유엔 아동권리협약에 의해 설립된 아동권리위원회 위원을 세 차례(2003∼2005년, 2005∼2009년, 2009∼2013년) 역임했으며, 지난 2007년에는 아동권리위원회 위원장(2007∼2009년)으로 선출돼 한국인 최초로 유엔의 7대 인권협약과 관련한 최고 책임자 자리에 오르기도 했다. 한국장애아동인권연구회 회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사단법인 유엔인권정책센터 공동대표직을 맡고 있기도 하다.

이 보고관은 지난 5월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유엔 인권이사회에서 제4대 미얀마 인권 특별보고관으로 선출됐다. 2006년 유엔 인권이사회 출범 이후 한국이 특별보고관을 배출한 것은 처음이다.

특별보고관은 미얀마와 북한, 이란, 시리아, 수단 등지의 국별 인권이나 식량권, 표현의 자유 등 주제별 인권 상황을 평가하고 필요한 권고 등을 제시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권고안은 법적 구속력은 없지만, 해당국에 국제사회의 압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보고관의 임기는 매년 3월 열리는 인권이사회에서 1년 단위로 연장되며 최대 6년까지 연임할 수 있다.

 

 

한국
현대정치사의 ‘최연소 망명객’ 기록은 아마도 이양희 보고관이 가지고 있지 않을까 싶다. 그의 아버지는 알려진 대로 1970∼80년대 김영삼, 김대중 전 대통령과 더불어 한국 야당을 이끈 주역이었던 소석(素石) 이철승(92) 씨이다.

1961년 민주당 의원 자격으로 유엔 방문을 마치고 귀국길에 올랐던 이 씨가 5·16 군사정변 후 일본에 머무르다가 이듬해 미국으로 정치적 망명을 하면서, 당시 만 여섯 살이던 이 교수도 어머니 김창희(90) 씨·오빠와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 합류했다. 1965년 부모와 함께 잠시 귀국했지만, 다시 망명길에 오른 아버지를 따라 이 교수 역시 미국에서 생활해야만 했다.

“저는 참치샌드위치를 안 먹어요. 어린 시절 미국에서 힘들게 생활하면서 참치샌드위치를 질리도록 너무 많이 먹었던 기억 때문이죠. 어머니가 한국에서 소아과 의사로 일하시긴 했지만, 미국에선 의사자격증이 없기 때문에 의사보조원으로 일하며 가족을 부양하셨죠. 그때 어머니가 한 달 일해서 번 200달러 중 120달러는 집 임대료를 내고, 나머지 80달러로 네 식구가 살았다고 합니다. 어머니가 일하러 나가실 때 제일 값싸게 살 수 있는 재료였던 깡통 참치로 샌드위치를 만들어 놓으셨는데, 그것만 먹으면서 지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이 보고관은 전 국민의 주목을 받는 유명 정치인의 가족으로서 살아온 날들을 “권하고 싶지는 않은 삶”이라고 말하며 웃었다. 늘 남의 시선을 인식하면서 행동 하나하나 조심하며 살 수밖에 없기 때문에 ‘개인’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특히나 본인은 ‘나’보다 ‘나라’를 먼저 생각했던 부모의 영향으로 더 그랬다고 이 보고관은 말했다.

“미국에서 홀로 유학생활을 하고 있을 때, 어느 날 서울 집에서 보낸 작은 소포 하나를 받은 적이 있어요. 안에는 작은 비단주머니와 편지 한 장이 들어있었지요. 주머니를 들어보니 묵직한 거예요. 열어보니 흙이었어요. 어머니가 편지에 이렇게 쓰셨더라고요. ‘너는 대한민국의 딸이다. 그걸 잊지 말아라’라고요.”

이 보고관은 정치인의 아내로 평생을 살아온 어머니의 삶을 “희생이란 말조차 사치스러운 인생”으로 표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딸인 자신에게는 “여성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일이 많다”는 가르침을 늘 강조하셨다는 것.

“제가 어렸을 때 좀 말괄량이였어요. 주변에서 그런 절 말리려고 하는 분이 있으면, 어머니는 언제나 ‘그대로 두라’고 하셨죠. 그런 어머니의 영향으로, 저는 단 한 번도 ‘여자이니까 안돼’란 생각을 가져본 적이 없습니다. 어머니의 그런 가르침이 제 인생의 뿌리와 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