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여우의 세상 이야기/내가 본 세계

그리스와 독일, 2차세계대전 피해배상 논쟁

bluefox61 2015. 2. 13. 11:12

독일과 그리스가  2차세계대전 피해배상 문제를 놓고 날카로운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러시아에서도 독일 정부에 2차세계대전 당시 입은 막대한  인적, 물적 피해 배상을 요구하자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이탈리아에서는 독일에 나치 강제노동 및 학살 피해자에 대한 배상을 요구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나치시대 과거사에 대한 철저한 반성으로 국제사회의 칭송을 받고 있는 독일이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70년이 지난 새삼 전쟁 피해 배상 논란에 휩싸이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스, 러시아, 이탈리아가 전쟁 피해 배상을 요구하는 이유는 무엇이며, 독일이 배상요구를 일축하고 있는 법적 근거는 무엇일까 .

 

 


그리스 대 독일


지난 8일 그리스 아테네 의회 연단에 오른 알렉시스 치프라스 총리는 "그리스는 우리 국민과 역사, 나치에 맞서 피흘린 모든 유럽인들에 대한 도덕적 의무가 있다"면서 "그것은 바로 (나치)점령기간 강탈자금 반환과 배상금 요구다"라고 말했다. 치프라스는 앞서 지난 1월 26일 총리 취임 선서를 마치자마자 그리스 레지스탕스(저항군) 추모비를 찾아, 독일과 그리스 간에 과거사 문제가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분명히했다.
 

그리스에서 나치 체제하 피해보상 문제가 본격 제기되기는 시리자 정권이 출범하기도 훨씬 이전인 지난 2012년 보수 우파 신민당 정권 때부터이다. 안도니스 사마라스 총리가 이끄는 신민당 정부는 그 해 9월 독일에 배상을 청구하기 위한 실무단을 구성했고, 이듬해 실무단이 재무부에 제출한 약 80페이지 짜리 보고서를 최고 행정법원에 제출하기까지 했다. 


치프라스는 지난 총선 때 배상 문제를 아예 공약으로 들고 나왔다. 혹독한 긴축정책과 구제금융으로 그리스의 숨통을 죄고 있는 독일로부터 배상금을 받아내겠다는 것이다. 재무부 보고서에서 따르면, 그리스가 독일로부터 받아야 배상금과 반환금은 무려 1620억 유로(약 203조 500억 원)규모이다. 나치 체제하에서 수많은 그리스 인들이 학살당하고 산업기반 등이 파괴된 데 대한 피해보상금이 1080억 유로, 나치가 1942~44년 그리스 중앙은행으로부터 차관 명목으로 강탈해간 금액(당시 액수로는 4억7600만 마르크)이 540억 유로다.
 

독일은 이같은 그리스 정부의 요구를 일축하고 있다. 현지언론 도이체벨레(DW)는 최근 보도에서 "1960년 합의에 따라 독일이 그리스 에 1억1500만 마르크를 지불했고, 이 액수에는 개인 피해자의 모든 요구액이 포함된 것이었다"며 "1990년 ‘2+4 조약’(영국, 프랑스, 미국, 소련과 동ㆍ서 독일이 체결한 조약)에 따라 더 이상의 배상금은 없다"는 것이 정부 입장이라고  전했다. 


물론 독일도 그리스 중앙은행에서 강탈해간 돈을 돌려주지 않았다는 사실은 인정한다. 그러나 지난 2012년 독일 하원은 당시 화폐가치로 환산해 82억 5000만달러로 평가해 그리스의 540억 유로와 큰 차이를 나타냈다.
 

주목해야할 점은, 그리스의 우파 정권과 급진좌파 정권의 나치 피해 배상금 요구와 구제금융 협상 간의 관계이다. 전문가들은 그리스 정부가 과거사 문제를 구제금융 협상의 지렛대로 삼으려는 의도를 가진 것으로 보고 있다.앙겔라 메르켈 정부가 새삼 배상금 문제를 들고 나온 치프라스 정권에 강한 불쾌감을 나타내고 있는 이유다. 지난 9일 지그마르 가브리엘 부총리 겸 중도좌파 사민당 당수는 "그리스에 배상금을 지불할 가능성은 제로"라며, 하루 전 치프라스 총리가 의회 연설을 통해 요구한  배상금을 한마디로 일축했다.


러시아 대 독일


지난 3일 러시아 언론 이즈베스티아는 의회 일각에서 독일에  2차세계대전 피해 보상을 요구하기 위해 태스크포스를 만들자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를 주도하고 있는 인물은 극우 민족주의 성향의 러시아자유민주당 소속의 의원 미하일 데기아테로프이다. 종전 후 동독과 소련 정부가 같은 공산체제라는 이유로  피해보상을 하지 않기로 합의했지만, 서독 정부와는 합의한 적이 없기 때문에 지금이라도 배상금을 받아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하고 있다. 


데기아테로프는 최근 현지언론들과 인터뷰에서 "독일 정부가 홀로코스트 피해자인 유대인 600만명에게는 배상해주면서, 나치가 살해한 소련 국민 2700만 명에 대한 배상을 해주지 않는 것인가"라고 말했다. 러시아는 나치에 의해 자국의 국영재산 약 30%, 도시 1710곳, 마을 7만 곳, 산업시설 3만 곳, 농장 약 10만 곳이 파괴됐다고 주장하고 있다. 따라서 독일로부터 최소 6000억 달러(약 665조 원)을 받아아내야 한다는 것이다. 뉴스위크는 데기아테로프의 주장에 상당 수의 의원들과 학자들이 동조하고 있다고 3일 전했다.
 

그리스의 배상금 요구가 구제금융사태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처럼, 러시아의 배상금 요구는 우크라이나 사태와 연관성이 있다. 즉, 미국과 유럽연합(EU)의 러시아  경제제재에 대한 반발인 셈이다. 러시아의 배상금 요구 움직임에 대해서는 독일 정부는 아직 어떤 반응도 내놓지 않고 있다.


이탈리아 대 독일


2차세계대전 당시 주축국이었던 이탈리아에서도 독일에 배상금을 요구하자는 목소리가 이어지고 있다. 지난 2004년 이탈리아 최고법원은 전쟁당시  독일점령군의 불법행위로 인해 피해를 입은 이탈리아 국민들에게 독일 정부가 배상해야 한다는 판결을 내려 큰 파문을 불러일으켰다. 즉 독일은 전쟁 당시 노동에 강제동원된 이탈리아 노동자, 독일군에게 포로가 되어 학대당한 이탈리아 군인, 반나치·반파시스트 저항세력 진압 과정에서 학살당한 이탈리아 민간인 등에 대해 배상을 해야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독일 정부는 국제사법재판소(ICJ)에 제소했고, 결국 지난 2012년 "주권 국가의 행위는 다른 주권국가의 사법적 심사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주권면제(sovereign immunity) 원칙을 주장해 결국 승소했다. 하지만 이같은 판결에도 불구하고, 이탈리아 내에서는 독일에 다시 전쟁 배상금을 요구해야한다는 주장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1차세계대전 후 영국,프랑스 등 승전국들은  베르사유 조약에 따라 전쟁의 모든 책임을 패전국 독일에 부과하고 1320억 마르크의 배상금을 요구했다.승전국들의 무리한 배상 요구는 독일 국민들의 분노를 불러일으켰고, 결국 바이마르 공화국의 약화와 아돌프 히틀러의 나치 정권을 탄생시켰으며  2차세계대전을 불러일으키는 단초가 됐다. 
 

2차세계대전이 끝난 후 미국 등 연합국들은 이전과 달리 독일에 대한 배상금 부과에 매우 신중한 자세를 취했다.1945년 2월 얄타회담 결과 배상위원회가 구성되기는 했지만 배상 방식과 규모를 놓고 소련과 서방 국가들 간의 의견차가 좁혀지지 않았다. 이 와중에 동·서 냉전구도가 형성되면서 독일에 대한 배상금 요구는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대표적인 사례가 1953년 2월 서방채권국들이 서독과 맺은 ‘런던 채무협정’이다. 이 협정의 핵심은 피해국가와 개인의 배상청구 인정을 사실상 독일의 통일 이후로 미뤘다는 점이다. 같은 해 8월, 이번에는 소련이 같은 공산국가인 동독과 배상 면제협정을 맺었다. 1990년 9월에는 런던 채무협정을 사실상 재확인하는 일명 ‘2+4(동·서독, 미국,영국,프랑스, 러시아)조약’이 체결됐다.독일 정부가 그리스의 배상금 요구를 일축하면서 1990년 2+4 조약을 거론한 것은 이 때문이다.
 

독일(서독)은 전후 국가 대 국가 차원의 배상금 지불 부담에선 벗어났지만, 피해자에 대한 배상금은 꾸준히 지급했다. 1960년 그리스와 협정을 맺고 1억1500만 마르크를 지불한 것을 비롯해 프랑스에 4억 마르크, 오스트리아에 9500만 마르크를 지불했다. 


독일 정부는 특히 홀로코스트(유대인 학살) 피해자에 대한 배상문제에 적극적인 자세를 나타내, 1952년 9월 ‘룩셈부르크 협약‘을 맺어 보상을 약속한 것을 시작으로 지나 2012년에는 60년만에 협약을 대폭 수정해 구공산권에 살고 있는 생존자 8만 명을 배상대상에 새로 추가하고 월지급 배상금도 대폭 늘렸다. 이들은 대부분 구공산체제하에 있어서 구서독 정부와 유대인배상회의(JCC) 간에 체결된 협약대상에서 제외됐던 사람들이다. 


당시 볼프강 쇼이블레 재무장관은 협약 개정안에 서명하면서  "홀로코스트 범죄는 상상을 뛰어넘는 엄청난 범죄인 만큼 오늘날까지도 희생자들의 면면을 제대로 파악하기가 힘들 정도"라면서 "바로 그것이 우리가 배상협약을 계속 수정해 나가야 하는 이유"라고 밝혔다. 


반면, 나치 체제 하 동유럽에서 학살된 로마(집시)피해자와 이탈리아, 폴란드 등 점령지역에서 강제노동에 동원됐던 피해자에 대한 배상에 대해서는 독일 정부가 너무 소극적이란 비판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