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여우의 영화 이야기/영화로 본 세상

게티즈버그 연설 150주년.. 다시 생각해보는 영화 <링컨>

bluefox61 2013. 11. 20. 11:05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 '링컨'은 우리가 링컨과 남북전쟁에 대해 얼마나 피상적으로만 알아왔는가를 새삼 일깨우는 영화이다. 

사실 학교에서 배운 남북전쟁은 노예해방을 위한 전쟁으로만 기억되는 것이 전부라해도 과언이 아니다. 역사에 조금 깊이 관심을 가진 사람 정도가 19세기 미국의 북부 산업자본과 남부 농업자본 간의 갈등을 떠올릴 수있는 정도이다. 
링컨만 하더라도 '국민의 , 국민을 위한, 국민에 의한 '의 명연설로 남은 게티스버그 연설과 워싱턴 DC 포드 극장에서의 암살로 각인돼있다. 




'링컨'에는 도입부를 제외하고 전쟁 장면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영화는 2시반정도의 러닝타임 거의 대부분을 링컨이 남부군의 항복을 눈 앞에 둔 시점에, 노예제 폐지를 골자로 한 수정헌법 13조를 하원에서 통과시키기 위해 벌이는 전쟁을 묘사하고 있다. 온국민이 하루빨리 전쟁이 끝나기만을 바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링컨은 왜 종전협상을 지연시키면서까지 수정헌법 통과가 먼저라고 고집했는지, 링컨에게 남북전쟁이란 과연 무엇인지를 영화는 이야기하고 있다. 

영화를 통해 새롭게 알게된 사실은, 당시 공화당(집권당) 보다 민주당이 노예제 폐지에 부정적이었다는 사실이다. 당시 공화당 급진파는 노예제의 즉각적인 폐지를 링컨에게 요구했고, 민주당 보수 극단파는 수정헌법 13조가 발효되면 세상이 흑인판이 되고 흑인이 선거권을 갖는 세상이 온다고 주장했다. 공화당 중도파였던 링컨은 한쪽으로는 공화당 극단파를 달래고, 또다른 한쪽에서는 민주당 보수극단파와 싸우는 2개의 전쟁을 치러야만했다. 




영화 속에서 공화당 급진파로 등장하는 인물이 바로 토미 리 존스가 연기하는 타데우스 스티븐스(Taddeus Stevens.1792~1868)이다. 남북전쟁 전인 1859년부터 전후 재건기인 1868년까지 펜실베이니아주 공화당 하원의원으로 활동했던 그는 공화당뿐만 아니라 전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노예제 폐지운동가였다. 


버몬트주에서 태어나 가난한 집안에서 성장한 스티븐스가 노예제에 대해 눈을 뜨게 된 것은 1821년 변호사로서 도주 노예와 관련한 사건을 맡게 되면서부터였다. 메릴랜드주의 한 노예소유주가 도주한 노예에 대한 소유권을 되찾는데 법적으로 도움을 줬던 것. 노예는 주인으로부터 도망쳐 펜실베이니아 주에서 6개월 간 살았는데, 6개월이상 거주한 노예에 대해 자유신분을 허용해주는 주법에 따라 자신은 해방됐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스티븐스는 6개월 이상 연속으로 거주할 경우만 해방신분을 인정하는 주법조항을 근거로 들어, 문제의 도주노예가 해당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했다고 주장해 결국 재판에서 승리했다.

스티븐스의 변호는 법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으로 인해 노예가 자유를 빼앗기고 다시 억압의 삶을 살게됐다는 사실에상당한 충격을 받았고, 이를 계기로 열렬한 노예제 폐지 운동가가 됐다. 그는 남부 흑인노예가  북부 자유주 또는 캐나다로 도망칠 수있도록 도와주는 지하조직 '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의 열성멤버이기도 했다. 자신의 사무실 지하에 비밀 통로를 마련해놓고 도망친 노예를 숨겨주기까지 했다.

1833년 휘그당원으로서 펜실베이니아 주하원에 당선됐던 그는 1849년 연방하원에 진출, 1850년 도주한 노예에 대한 처벌규정을 강화한 '도주노예법' 반대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휘그당이 와해된 이후 공화당에 입당한 그는 1859년 연방하원의원에 당선됐고 에이브러햄 링컨의 반노예 정책을 적극 지지했다. 그러나 1865년 링컨이 암살당한 이후에는 후임 앤드류 존슨의 남부 및 흑인정책이 지나치게 소극적인 것을 격렬히 비판했고, 1867년 존슨 대통령의 탄핵을 주도했다가 실패하기도 했다.

스티븐스는 전후 재건을 위해 남부 농장을 해체하여 노예 한 사람당 ‘40에이커와 노새 한 마리’씩을 주자고 제안했는가하면, 남부 공유지를 흑인과 연방에 충실한 백인들에게 불하해주는 법안을 만들기도 했다. 그는 남부연합에 속했던 주에 대한 깊은 불신을 가지고 있었으며, 전후 일정기간동안 남부 주들에 대한 감시와 권한박탈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너무 과격하다는 이유로 대부분 법제화되지 못했다.  

하지만, 스티븐스는 전후 혼란기에서 노예해방 다음 수순은 흑백 구분없는 보편적 선거권임을 분명히 했다는 점에서 민권의 방향을 제시한 선각자로 평가받을 만하다. 흑인 선거권을 일찌감치 주장한 그는  링컨 사망후 후임 정부와 의회가 보편적 선거권을 인정하지 않은데 대해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사망하던 해인 1868년 공화당에서조차 흑인 선거권을 거부하자 그는 "쓸데없이 너무 오래살았다"고 개탄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영화 마지막에 등장하는 것처럼 그는 결혼하지 않은채 23년동안 흑백혼혈 여성 리디아 해밀톤 스미스와 사실혼 관계를 유지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두 아들을 둔 미망인이었던 스미스는 스티븐스의 가사를 보살피는 하녀였다. 스티븐스와 스미스는 공식적으로 두사람의 관계를 드러낸 적이 없지만, 스티븐스 일가친척 등 주변사람들은 스미스를 스티븐스의 아내로 대접했다고 한다. 스티븐스는 스미스가 지켜보는 가운데 숨졌다. 

20세기 초반까지만해도 미국사 속에서 스티븐스는 그리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 인물이 아니었다. 당시만해도 백인중심의 역사관이 지배적이어서, 남북전쟁 이후 남부에 대해 혹독한 법을 잇달아 입안하는 등 지나치게 과격했던 인물로 인식됐던 것. 남부 전통과 권력층을 뿌리뽑으려고 안달난 '악당'으로 스티븐스를 보는 시각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1940~50대부터는 스티븐스에 대한 역사적 시각도 차츰 변화하기 시작해 , 시대를 앞서가는 인권운동가로서의 면모가 부각됐다. 흑인에 대한 당시 미국의 변화된 인식이 스티븐스에 대한 재평가를 가능케했던 것.
그런 점에서 영화 '링컨'은 타데우스 스티븐스가 무작정 과격하기만 했던 인물이 아니며, 수정헌법 13조의 의회통과를 위해 자제할 필요가 있을때는 자제할 줄도 알았던 인간적인 인물이었음을 부각시키고 있다. 



<미국 공화당과 민주당의 역사>

미국 공화당과 민주당은 하나의 뿌리를 공유하고 있다. 양 당 모두 토머스 제퍼슨이 이끈 민주공화당(Democratic-Republican Party)에서 출발했던 것. 하지만 이후 친 앤드루 잭슨파와 반 앤드루 잭슨파로 분열되었다. 1828년, 앤드루 잭슨이 대통령에 당선되자, 반잭슨파는 연방주의자와 남부 민주공화당원, 보수주의자들을 결집하여 휘그당을 창당하였다. 휘그당은 민주당과 양대 정당으로 거듭났으나, 밀러드 필모어 이후 대통령 당선자를 배출해내지 못했다.

이런 가운데 1854년 이른바 '캔사스 네브래스카법'이 제정됐다. 미국 남북전쟁 직전 노예제 확장문제에 관한 국가 정책에 중요한 변화를 가져온 법(1854. 5. 30)으로, 준주(準州)에 노예제 허용 여부를 결정하는 데 의회의 법령보다 주민주권(主民主權) 원칙(노예제 채택 여부를 그곳의 주민에게 맡긴다는 원칙)이 우선함을 확인한 법이다. 

앞서 1820년 '미주리 타협'은 프랑스로부터 사들인 루이지애나 지방(노예주인 미주리 주 제외)의 북위 36° 30′ 이북에서 노예제를 금지한 상태였다.그러나 민주당 상원의원 스티븐 A. 더글러스가 입안을 주도한 캔자스-네브래스카 법은 캔자스와 네브래스카 2곳의 정부 조직을 주민주권의 원칙에 따르도록 했다.

노예제 확장 문제로 격화되어가던 지역 대립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제정된 이 법은 오히려 남북의 분리를 부채질했다. 자유토지론자와 노예제 반대론자들은 이 법을 노예제 지지자들에 대한 일종의 항복문서로 여기며 공격했고, 이후 공화당은 준주로의 노예제 확대에 반대하는 확고한 정치 조직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캔자스에는 노예제 지지자와 노예제 반대자들이 몰려들어 이곳 각 기관의 주도권을 서로 장악하려는 다툼을 벌임으로써 유혈과 난동의 참극이 약 2년동안 일어나게 됐다. 이를 이른바 '피의 캔사스' 시대로 부른다.

캔사스-네브라스카 법의 제정을 계기로 휘그당과 민주당 조직은 분열하게 됐고, 1854년 7월 미시간 주 잭슨에서 휘그당 분파와 노예해방주의자들이 스스로를 공화당이라고 칭하며 새로운 정당을 창당했다. 제퍼슨의 공화주의를 강조하면서, 분파적인 이해나 주의 권리를 초월하여 국가의 통일을 추구하는 것이 당의 목표였다. 

발기인들은 강력한 노예제 폐지론자들이었다. 1856년 제1회 전국 전당대회에서 채택된 강령은 연방의회가 각 지역의 노예제도를 승인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부정하고, 오히려  의회는 이 지역들에서 노예제도를 폐지할 권리와 의무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은 북부지역의 전반적인 정서를 대변하는 것이었다. 창당 후 4년 동안 공화당은 민주당에 대한 주요세력으로 존재했던 북부의 휘그당을 대체하면서 급속히 성장했다 .
1856년 최초의 후보로서 존 C. 프리먼트가 대통령선거에 출마하여 11개주에서 패배했으나 1860년 18개의 북부 주에서 시행된 선거전에서는 2번째 후보인 에이브러햄 링컨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노예제폐지라는 진보적 사상을 수호했던 공화당이 보수 가치를 내건 정당으로 발달한데에는 1896년부터 1932년까지 진행되었던 미국의 진보운동의 영향이 컸다. 이 진보운동 기간동안 공화당은 보수 정당으로 거듭났고, 민주당은 진보(리버럴)정당으로 노선이 옮겨 갔다. 이후 대공황이 오고, 뉴딜정책을 기점으로 다소 진보적으로 옮겨갔으나 다시 보수로 이동하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