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저런 이야기들

마이클 무어...누락된 이야기(2)

bluefox61 2013. 6. 17. 15:47

  지난주에 이어 마이클 무어의 자서전 '히어 컴스 트러블'의 한국어판(세상에 부딪쳐라 세상이 답할때까지)에 누락된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미국 중부 미시간에 사는 한 평범한 중산층 가톨릭 신자 가정이 겪은 인종분규, 인종차별 실화를 들여다볼 수있는 흥미로운 이야기입니다. 특히 자동차의 도시이자, 소울의 여왕 아레사 프랭클린의 고향으로 잘 알려진 디트로이트에서 1967년 발생한 대규모 흑인폭동에 대한 생생한 증언이 담겨있습니다. 당시 존슨 대통령이 공수사단를 투입하고 탱크와 자동화기를 퍼부어 폭동을 진압했다는 것은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요. 무어는 흑인빈민들이 일으킨 이 폭동이 '미국 속의 베트남전'이었다고 하는군요. 미국의 보수 백인들이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암살소식에 나타낸 첫 반응이 무엇이었는지를, 이 글의 마지막 부분에서 확인하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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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7년 디트로이트 폭동 당시의 모습>

 

성 목요일 ( A Holy Thursday)

 

거기 서있지마, 깜둥이들이 오잖아!”

열두살짜리 월터는 도와주려는 의도로 한 말이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나는 해가 지기전 야구게임을 하려고 야구 장갑과 방망이를 들고 길 한가운데 서서 물었다.

디트로이트에서 깜둥이들이 폭동을 일으키고 있대! 아빠가 그러는데 이리로 오고 있다는 거야. 북쪽으로 오는 중이야!”

월터네 가족은 재빨리 움직였다. 지체하지 않고 스테이션 웨건 자동차 안에 음식과 각종 생필품, 샷건을 가득 실었다. 월터의 어머니 도로시 아줌마는 6명의 아들들에게 자동차에 실을 것과 남겨두고 갈 것을 지시하느라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작전이 어찌나 꼼꼼하게 이뤄지던지 나는 놀라 바라보며 서있었다. 이전에도 여러번 훈련을 해본 것같았다. 다른 집들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지는 것을 본 나는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월터, 무슨일이야. 뭐하는 건대? 다시 돌아올거야?”

모르겠어. 그냥 가야댄대. 아빠가 그러는데 디트로이트의 깜둥이들이 이리로 오고있대. 금방 올거야!”

어디로? 여기로? 힐스트리트로 온다고?

월터. 디트로이트는 여기서 먼 것같은데.”

아니야, 아니야. 그렇지 않아!아빠가 그러는데 금방 올 수있대.” 월터는 말하면서 손가락을 튕겼다. 마치 그렇게하면 마술처럼 깜둥이를 불러내 자기말이 맞다는 것을 증명할 수있다는 것처럼 말이다. “플린트에 있는 깜둥이랑 같이 우리 전부 죽이러 온대.”

그런 터무니없는 소리는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지만 유색인종 문제에 대해 데이비슨 주민들이 보여온 태도는 낯설지가 않았다. 흑인-많은 사람들이 의도적으로 부르는 호칭은 깜둥이-들은 환영받지 못했다. 내가 아는 한 데이비슨 시에 거주하는 5900명 중 흑인은 단 한명도 없었다. 우리 가족은 플린트 외곽에 살고 있었는데, 플린트 시내에 약 5000명의 흑인주민이 거주하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수년에 걸쳐 부동산업자들은 깜둥이가 플린트를 벗어나 데이비슨으로 이사하려고 문의하면 어떻게 대처하는지를 알고 있었다. 문서로 기록된 것도 없고 내놓고 말한적도 없지만 주민들 사이에는 흑인가족에게 집을 절대 팔지않는다는 합의가 있었다. 그 덕분에 수십년동안 깔끔하고 질서있는 백인동네로 유지됐다.

 

100년전만해도 이런 사고방식은 없었다. 1850년대와 1860년대에 데이비슨은 오하이오 리버 밸리에서부터 북쪽으로 인디애나, 오하이오, 미시간을 거쳐 캐나다 국경에 이르기까지 흑인노예를 탈출시켜 자유를 찾게 도와주는 지하철로(Underground Rairoad : 19세기 미국에서 활동했던 노예해방을 위한 비공식 네트워크로, 흑인노예에게 비밀스런 탈출경로와 안전가옥을 제공했다-역자 주)의 중간 정류장이었다. 미시간 주 내에만 철로를 따라 약 200군데의 비밀 정류장이 있었고, 미시간의 새로운 공화당 당원들은 지하 철로조직원으로 활동하면서 도망친 노예들을 도와주고 안전탈출로를 제공하며 직접 자기 집안에 숨겨주기까지 했다.

하지만 남부 현상금 사냥꾼들은 연방법의 허가를 받아 미시간 등 자유주 안으로 들어와 노예를 발견하는 족족 합법적으로 붙잡아 원래 주인에게 끌고갔다. 남부 노예제 주들을 연방체제 내에 머물러있게 하기 위해 북부가 수년간 취해온 타협책 중 하나였다. 따라서 노예들은 자유주로 탈출했다해서 자유로운 것이 아니었고, 결국 캐나다로 넘어가야했다.

수백명의 미시간 주민들이 위험을 감수하며 잔혹하고도 야만적인 시스템의 희생자들을 보호 하기 위해 나섰다. 어떤 사람은 데이비슨의 메인 스트리트와 서드 스트리트 한구석에 집을 가지고 있었는데, 캐나다 국경선에서 불과 약95km밖에 떨어져있지 않았다. 훗날 알려지기를, 집 창고안에 숨을 수 있는 공간이 있었는데 마을 사람들이 그 사실을 악랄한 현상금사냥꾼들에게 숨겼다고 한다( 그 집은 내 할아버지의 집이 됐다).

데이비슨에는 무엇인가 중요하고도 역사적인 일에 마을 전체가 참여했다는 어떤 자긍심이 있었다. 많은 남자들이 남북전쟁에 나갔으며, 노예제가 폐지되자 적으나마 기여했다는 사실을 주민들은 자랑스러워했다.

1924년 찌는듯한 8월의 어느날, 데이비슨의 로즈모어 운동장에 약 2만명이 쿠 클럭스 클랜(KKK) 집회에 참석했다. 그날 찍은 사진을 보면 수천명이 하얀색 긴 옷을 뒤집어쓰고 있는데, 그렇게 더운 여름에 뾰족한 두건까지 쓰고 어떻게 버텼는지 모르겠다. 후드를 쓰지 않은 사람도 많았는데, 흑인을 공포 속으로 몰아넣고 린치를 가하는 조직에 일가친척 모두가 멤버였기 때문에 굳이 정체를 감출 필요조차 없었다.

하지만 1924년 여름 플린트에는 깜둥이들이 그리 많지 않았다(대부분 자신이 처한 입장을 알고 조용히 지냈다). 그게 문제였다. 그날 일요일 오후에 KKK가 직면한 문제는 교황주의자(Papist)'로 불리는 가톨릭 신자들이었다. 가톨릭 신자들은 공직에 진출하기 시작했는가하면, 백인 프로테스탄트들이 거주하는 교외지역으로 이사해 들어왔다. 어떤이들에겐 이런 움직임이 자연의 위계질서에 어긋나는 일로 보였다. 가톨릭신자들이 인종간 결혼을 하는데 대해서도, 이른바 신심깊은 사람들은 엄청난 혐오감을 나타냈다. 그들이 아는 결혼이란 프로테스탄트 남자와 프로테스탄트 여자(가톨릭 남자와 가톨릭 여자가 결혼할 수는 있지만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간의 결혼은 안된다)간의 결합이었다.

어머니의 아버지(월 외할아버지)는 그런 규칙을 이해할 수없었다(캐나다 출신이란 사실이 용서받는 구실이 됐다). 1904년 영국 성공회 신자였던 할아버지는 로마가톨릭신자인 외할머니와 결혼했다. 그것 때문에 KKK는 데이비슨에 있는 할아버지 집 앞마당에 십자가를 세워 불을 질렀다.

그건 별로 큰 십자가도 아니었단다.” 할아버지는 나중에 그렇게 말하곤했다. “1m 이상짜리는 돼야지!”

 

1920년대와 1930년대에 걸쳐 데이비슨과 미시간의 다른 지역들은 광적인 편견의 온상지였다. 매주 일요일마다 전국방송라디오쇼를 통해 유대인에 대해 저주를 퍼부었던 로열오크의 찰스 커플린 신부부터 데이비슨(그리고 플린트의 키어슬리 공원)KKK 일요집회에 이르기까지, 미시간 주는 부끄럽고도 놀라울 정도로, 노예제뿐만 아니라 사형제를 폐지하고 여성참정권을 주장했던 신생정당 공화당의 인도주의가 꽃피웠던 시절과 크게 달라졌다. 헨리 포드가 히틀러로부터 훈장을 받은 장면만큼이나 상상하기 힘든 일이 벌어졌던 것이다.

19677월 마지막주, 내 머릿 속에는 우리 집이 여섯 블록 떨어진 포장도로가 있는 곳으로 곧 이사간다는 사실뿐이었다. 그런데 약96km 떨어진 디트로이트가 불길에 휩싸여 있었다. 전날밤 뉴스에도 나왔다. 경찰관들이 폐점시간에 베트남에서 고향으로 돌아온 참전용사들을 위한 파티가 열리고 있던 클럽을 급습해 그곳에 있던 모든 흑인들을 체포했다. 이 사건이 인근지역 주민들을 분노케했고 즉시 시위로 이어져 폭력사태로 비화했다. 주방위군이 투입됐는데, 미시간 남동부 지역 주민들은 앞서 2년전 와츠와 불과 2주전 뉴워크에서 일어난 인종폭동이 이제 미시간 주에서도 전면화됐다고 확신했다.

하지만 당시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했던 것은, 문제의 폭동이 디트로이트 빈민들의 봉기 -경찰과 주방위군이 과잉대응해 검은색 피부의 의심스런 사람들만 보면 총을 겨눈데 대한 봉기였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플린트의 경우는 달랐다. 1년전만하더라도 플린트 주민들은 플로이드 맥크리를 최초의 흑인시장으로 선출했다. 맥크리는 백인인구가 거의 80%를 차지하는 플린트에서 인기가 높았다. 플린트 유권자들은 또한 주 역사상 최초로 주택 판매 또는 임대시 일체의 차별을 불법화하는 공개 주택법을 통과시키게 된다. 플린트 교외지역이 여전히 분리돼있기는 했지만, 인종문제에 관한 것을 고쳐야한다는 어떤 정서는 있었다.

그래서 그날 도로위에 서있던 내게 월터 가족들이 미친 듯 도망가는 모습은 무척 이상해보였다. 플린트는 폭발하지 않고, 흑인들은 나를 죽이지 않을 거야. 부모님에게 가서 확인해볼 필요도 없었다. 사실 내가 가장 두려웠던 것은 월터가 한 깜둥이란 말을 어머니가 들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우리 집에서 그 말은 금지였고 들어본 적도 없었다. 어머니가 그 말을 듣고 내게 집안으로 들어가라고 소리소리 질렀다면 당혹스러울 뻔했지만, 어머니와 아버지는 메인스트리트로 이사갈 준비에 바빠 우려했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월터 가족은 온갖 비상물품과 과대망상으로 가득찬 스테이션 웨건 자동차를 타고 떠났다.자동차가 안전한 곳을 향해 움직이면서 바퀴에 부딛힌 자갈돌들이 사방으로 튀었다.

플린트에서는 폭동이 일어나지 않았지만, 디트로이에서는 1주일동안 폭동이 이어졌다. 매일 지역뉴스들은 베트남 전쟁 대신 디트로이트에 벌어지고 있는 전쟁 장면을 방영했다. 폭동은 전 미시간주를 뒤흔들었다. 아름답고 풍요로왔던 미시간주는 이제 결코 예전의 그곳이 아니었다. 나중에 사람들은 그 때 왜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 이해하기 어려울테지만, 당시 디트로이트와 코닿을만큼 가까운 곳에서 살았던 우리들에게 그곳은 활기넘치며 사람들로 북적이는 거리들, 중서부 다른 도시들의 질시를 한몸에 받았던 가게들, 대학들과 공원, 정원, 미술관( 디에고 리베라의 벽화가 있는)이 있는 에메랄드 도시’ , 아레사(흑인 소울가스 아레사 플랭클린-역자 주)와 이기(이기 팝- 역자 주)와 시거(밥 시거-역자 주) 그리고 MC5(60년대 록밴드 -역자 주)를 낳은 디트로이트였다. 벨 아일 공원과 보블로 놀이공원, 진짜 산타가 높은 의자에 앉아서 우리에게게 무한한 가능성의 미래와 영원한 격려로 포장한 선물을 약속했던 허드슨 백화점의 12, 혜성과 큐피드..도너..그리고 블릿첸 등등이 눈깜짝할 사이에 사라졌다. 모두 사라졌다. 언제 어디로 사라져버렸는지 모르는 것도 아니고, 왜 사라졌는지 기억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그 모든 것이 언제 사라져버렸는지 알고 있으며, 사라졌던 바로 그 순간도 알고 있다. 존슨 대통령은 폭동 4일째되는 날 82공수사단을 디트로이트에 투입해 탱크와 자동화기를 동원해 진압했다. 미국 안에서 벌어지는 베트남전이었다. 사태가 종결됐을 때 43명이 사망하고 2000채의 건물이 화재로 부서지거나 무너져내렸으며, 우리의 영혼 역시 잔해더미 아래 묻혀버렸다.

 

몇주 뒤 아버지는 우리 가족을 디트로이트에서 열리는 타이거스 야구경기에 데려갔다. 티켓은 여름이 막 시작됐을 즈음에 미리 사둔 것이었고, 어머니가 하필 요즘같은 때에 디트로이트로 여행가는데 대해 걱정하기는 했지만 이미 돈을 지불한 티켓을 내다 버리는 것은 나쁜 범죄행위란 결론을 내렸던지 어쨌든 우리 가족은 야구경기를 보러 떠났다.

목요일 저녁이었는데, 타이거스 야구경기를 보러 온가족이 디트로이트로 가기에는 좀 이례적인 시간이었다. 아버지는 낮경기를 선호했고, 토요일과 일요일에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투수 토미 존과 호이트 윌렘, 타이거스에서 이적한 로키 콜라비토가 아웃필드에 출전하는 시카고 화이트 삭스와의 경기였다. 두 팀이 페넌트 레이스 각축을 벌이고 있는만큼 멋진 경기가 될 것이란게 아버지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렇지는 않았다. 타이거스는 2 1로 패했다. 나이트 경기를 생전처음 구경하게 된 나로서는 밝은 조명이 쏟아지는 역사적 경기장을 보는 것만으로도 마치 마술같은 순간이었다. 조명 빛은 마치 천국 아니면 인근 페르미 핵발전소에서 쏟아져 나오는 듯했다.

경기가 끝나 폭동지역과 인접한 밖으로 나오는 사람들 사이에는 긴장감이 깃들어있었다. 마치 두려움에 가득찬 백인들의 행진, 토네이도 경보가 울리면 사람들이 걷다가 뛰다가하는 그런 분위기였다. 걷지말고 뛰어, 살려면 뛰어!

우리 가족은 67년형 셰비 벨에어 자동차에 올라탔다. 그날따라 아버지는 보통때처럼 공짜 노상주차를 하지 않고 유료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폭동이 지나간지 한달 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에 돈을 아끼겠다고 위험을 무릅쓰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살아서 가는게 우선이었다.

우리 가족은 주차장을 빠져나와 코크레인가를 지나 미시간 애브뉴로 향하다가 북쪽행 피셔 고속도로를 타기 위해 우회전을 했다. 고속도로 램프를 타려고 하는데 갑자기 우리 자동차 후드에서 수중기가 치솟았다. 진입램프 반대쪽에 주유소가 있을거라고 생각한 아버지는 고가도로 위로 계속가다가 엉뚱한 곳으로 들어갔다. 그때 자동차가 완전히 퍼져버렸다. 도로표지판을 올려다보니 폭동의 그라운드제로인 12번가였다. 내게서 그 말을 듣은 아버지는 초조한 기색이 뚜렸했다. 아버지가 그렇게 초조해하는 모습은 거의 본적이 없었다.

모두 차분하게 있어.” 전혀 차분하지 않은 목소리로 아버지 말했다. “ 문 잠궈라!”

우리는 즉시 따랐다. 우리 얼굴에 공포가 나타나자, 아버지는 혼란으로부터 가족을 탈출시킬 수 있는 당신의 능력에 대한 신뢰성 결여로 받아들이셨다.

젠장! 왜 여기 왔는지 모르겠네! 아니 주의해서 본 사람이 없었단 말이야?!”

우리 식구가 왜 디트로이트에 왔는지 생각하는 동시에 갑자기 퍼져버린 자동차 엔진을 탓하는 아버지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어머니와 여동생들은 아무 말이 없었다. 우리 가족의 심장이 두근거리는 소리가 들릴 것만 같았다. 그때 한 흑인남자가 자동차 유리를 두드리는 바람에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도움이 필요하신가?”라고 그가 물었다. 자동차 안은 공포로 가득했다.

아버지가 대답했다. “ 그렇습니다.”

. 그럼 뭐가 잘못됐는지 한번 살펴봅시다.” 흑인 남자가 제안했다.

안에 있어라라고 아버지는 말했다. “내가 알아서 할게.” 그런데 알아서 하고 싶어하는 남자의 얼굴은 아니었다.

나는 뒷창문 쪽으로 고개를 돌려 우리 차 뒤에 세워져있는 흑인남자의 차를 바라봤다. 차 안에는 여자와 두 세명의 아이들이 타고 있었다.

그쪽도 야구경기에 갔수?” 수증기가 치솟는 자동차 후드 앞에 서서 남자가 아버지에게 물었다.

.”

우리도 그런데! 폰티액에서 왔어요. 참 한심한 경기였지!”

두명의 아버지는 우리 차 후드를 열어 여기저기 찔러대더니 곧 무엇이 문제인지 알아냈다.

래디에이터 호스가 잘못됐어라고 아버지는 우리 쪽을 향해 소리쳤다. 흑인남자는 자기 차로 가서 트렁크를 열어 물통을 꺼내오더니, 아버지에게 래디에이터에 물을 넣으라고 건네줬다.

주유소까지 몇블럭만 더 가면되요. 하지만 나같으면 반대 방향으로 다시 돌아가겠어요라고 그 낯선 남자가 말했다.

아버지는 친절에 감사를 나타내고 비용을 지불하려고 했지만, 남자는 받으려하지 않았다.

그냥 도와드려서 기뻐요. 언제가 내가 필요할 때 누군가 도와주길 바랄 뿐이죠. 내가 당신 뒤를 따라가길 바라나요?”

아버지는 그 남자가 곤경에 처하게 될 때 정말로 당신 자신도 그 남자처럼 멈춰서서 도와줄 수있을까하고 잠깐 생각하는 것같았다. 그리고 나서 남자에게 따라오지 않아도 괜찮으며 미시간가로 가면 문을 연 가게가 있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실제로 문을 연 주유소의 직원이 래디에이터 호스를 갈아주고 수리를 해줘서 우리 가족은 무사히 계속 갈 수있었다.

클락스톤쯤 왔을 때 어버지는 운이 좋았다라고 말했다. “ 좋은 사람을 만났어. 그리고 나이트 경기는 앞으로 가지말자.”

 

8개월뒤 새로운 디트로이트 시즌(월드시리즈에 진출한 시즌)이 시작된지 6일 후 성 주간(Holy Season)'이 다가왔다. 부활절에 수녀님들은 성 목요일(Holy Thursday)최후의 만찬이 어디에서 시작된 것인지에 대해 우리들에게 설명해줬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유대인이었어요.” 메리 르네 수녀가 말했다. “ 그들은 기독교인도, 가톨릭신자도 아니었지요. 유대인으로서 유대 전통을 지켰어요. 성주간동안 예수님은 유월절을 기리기 위해 예루살렘에 왔는데, 유월절은 유대인들이 이집트에서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르기로 한 신과의 약속을 지킨 것을 기념하는 축제랍니다. 저승사자가 이집트인 집안의 처음 태어난 남자아이를 죽이러 돌아다닐 때 양의 피를 발라놓은 집은 유대인 집이란 것을 알고 건너 뛰었어요. 신께서 파라오에게 그런 식으로 메시지를 보내신 거지요. 모세와 유대민족을 보내주지 않으면, 내가 너희를 엿먹이리라라고 말이죠.”

글쎄, 굉장한 이야기이긴하다. 집안의 맏아들로서 꽤 오싹하면서도 재미난 이야기란 생각이 들었다. 구약 속의 신은 상당히 불만이 많았던 것같다. 부족전체를 응징하지 않으면, 사람들을 고래 뱃 속에서 던져넣든가 계속 그런 식이다. 진짜 태도에 문제가 있는 것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승사자는 문설주에 한번 칠하면 잘 지워지지도 않는 피칠갑을 해놓아야만 어떤 집이 이집트인 집인지 유대인 집인지 구별할 수있을만큼 별로 똑똑하지 않았던 것일까? 이집트인과 유대인들에게 서로 다른 건축스타일로 집을 지으라고 해서 구분할 수는 없었을까? 이집트인에게는 콜로니얼 양식으로, 유대인들에게는 노예오두막 식으로 집에 짓게 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리고, 유대인 집 문설수에 피를 칠해서 표시를 해놓으면 더 위험해질 수도 있지 않은가. 이집트인들이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 자기네 첫 아들들이 죄다 죽어있는 것을 발견하고 가서 유대인들을 잡자!”라고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누군가가 유대인이 어디 있는데?”라고 물으면 또다른 사람이 끼여들어 이봐, 문 앞에 피칠을 해놓았잖아! 양의 피를 칠해놓은 집에 불을 지르자!”라고 할 수도 있다.

메리 르네 수녀는 레이몬드 수녀 등 다른 수녀들처럼 우리들이 들어 알고 있는 것과는 달리 유대인이 주님과 구세주 예수를 죽인게 아니라 로마인이 죽였다는 사실을 설명하느라 애썼다. 예수는 유대인이고, 유대인으로 태어났듯이 유대인으로 죽었으며, 만약 우리가 그분의 죽음을 유대민족 탓으로 돌린다면 매우 걱정하시리라는 것이었다. 어쨌든 예수는 죽음으로부터 부활해 그리스도 신앙을 일으키셨다!

수녀들은 플린트에 있는 세군데 유대교회 중 한 곳과 접촉해, 7학년과 8학년 학생들이 유대전통을 배울 수있도록 유월절 저녁을 할 수있겠느냐고 문의하셨다. 랍비는 요청을 매우 기꺼이 받아들였고, 우리는 1주일동안 감사의 뜻으로 하바 나길라(Hava Nagila: 유대 민요로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하자라는 의미-역자 주)’ 노래를 연습했다.

 

때는 1968년 성목요일부터 종려 일요일 전 목요일, 예수가 예루살렘에 들어가 마지막 유월절을 준비하는 날까지 일주일동안이었다. 사순절 기간동안 세인트 존스 학교에서는 주중 매일 밤마다 사순절 기도 또는 미사가 열렸다. 나는 목요일 복사를 맡았다. 성경봉독과 성찬식을 하고 제단에 향을 봉헌했다.

불타는 석탄 위에 올려놓은 향이 든 향로를 들고 제단 주변과 교회 안을 돌아다며 흔드는 것이 나의 일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것-, 연기, 그리고 이상한 냄새를 풍기는 일까지-들이 망라돼있었다.

미사가 끝나면 교회밖으로 향로를 가지고 나가서 연기나는 향과 석탄을 땅바닥에 버리고 발로 밟아 끄는 것도 내가 맡은 일들 중 하나였다.

4월초순의 쌀쌀한 밤이었는데, 바람이 몰아쳐 옷자락을 들춰올리는 바람에 가능한 빨리 안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나는 향 찌꺼기를 아직 꽁꽁언 땅바닥에 버린 다음 불씨가 꺼질때까지 신발 뒤꿈치로 꾹 밟았다. 그 때 자동차를 따뜻하게 데워두려고 일찍 주차장으로 나온 교구 주민 한명이 자동차 라디오에서 나오는 긴급뉴스를 들었다. 흥분한 그 남자는 미사를 마치고 막 떠나려는 사람들에게 뉴스를 알려주려고 크게 소리쳤다. 남자가 자동차 문을 활짝 열어놓은채 발판을 딛고 일어서서 소리치는 바람에 모든 사람들이 기쁨에 넘친 그의 발표를 들을 수있었다. 킹이 총에 맞았답니다! 그 사람들이 킹을 쐈대요! 마틴 루터 킹이요!”

그 순간 - 내 평생 목격했던 가장 우울했던 순간 중 하나로 기억한다- 사람들 사이에서 환호성이 일어났다. 모든 신도, 아니 대다수 신도들이 그랬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방금 주님의 성체를 받았던 꽤 많은 신도들의 입에서 동시다발적으로 기쁨의 소리가 터져나왔다. ‘하는 외침소리, 고함, 환호의 갈채소리. 나는 방금전 들은 킹 목사에 대한 놀랍고도 비극적인 뉴스를 소화하려 애쓰고 있는데, 어떤 사람은 깜둥이 테러리스트가 더 이상 우리를 괴롭히지 않게 됐다며 할렐루야를 외치는 것이었다.

나는 교회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려, 신의 이름으로 이 순간을 축하하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바라보았다. 어떤 사람은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대다수는 놀란 표정이었다. 어떤 이는 침묵하고, 어떤 이는 자동차로 달려가 라디오를 켜서 그 말썽꾼이 더 이상 이 땅에 존재하지 않게됐다는 뉴스를 직접 확인했다. 한 여자는 울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아직 밖으로 나오지 않은 신도들에게 뉴스를 전달했다. 상당한 동요가 일어났다. 그때 내가 생각할 수있었던 것은 멍청한 저승사자와 오늘밤 젠장할 누군가 멤피스에서 양의 피로 표시해두는 것을 잊어버렸다는 것뿐이었다. 빠뜨리고 그냥 지나가는 일은 없었다.

그날 밤이 왜 특별했냐고? 그때부터 평생 매년 부활절이 되면, 나는 쓰디든 응답을 받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