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여우의 영화 이야기/내가 본 영화들

레밍

bluefox61 2006. 6. 27. 17:12

완벽해보이는 중산층 가정 또는 그 구성원이 전혀 의외의 사소한 사건으로 인해 내재된 치부나 약점 등을  드러내보이면서 스스로 붕괴해가는 과정을 스릴러 형식으로 그려낸 영화들이 있다. 데이비드 린치의 <블루벨벳><트윈픽스> 같은 영화들이 대표적인 예다. 알프레드 히치콕도 <마니> <새 > <이창><현기증> 등에서 중산층의 불안증을 다뤘다.


독일계 프랑스 감독 도미니크 몰의 2005년 칸영화제 개막작 <레밍>은 히치콕으로부터 받은 영향을 한눈에 드러내는 스릴러 영화다. 스칸디나비아에서만 서식한다는 쥐의 일종이 ‘레밍’이  일상의 모든 것을 바꿔버리는 계기가 된 점에서 <새>와 일맥상통하며, 영화 후반부로 갈수록 여자주인공 베네딕트(갱스부르)의 아이덴티티가 모호해진다는 점에서는 <현기증>을 연상케하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일탈의 욕구와 무의식을 핵심 주제로 하고 있으며, 특히 ‘레밍’자체가 어떤 중요한 사건의 고리인 듯 보여도 사실은 구체적인 연관성이 없는 일종의 ‘맥거핀(속임수,미끼) ‘적 존재란 점도 히치콕의 영화들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다. <레밍>은 이처럼 선배 스릴러 영화들에 맥을 대고 있으면서도,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보다 적극적으로 무너뜨리고 있다는 점에서 차별화를 이루고 있다.

남자주인공 알랭 게티는 벨-에르(미국식 발음은 벨에어)란 이름의 신흥 교외도시에 있는 한 자동화전문화 기업 연구소에서 일하는 엔지니어이다. 그는 젊고 아름다우며 가정적인 아내 베네딕트와 깔끔한 새 주택에서 아기자기하게 살고 있으며, 직장에서는 능력을 인정받고 있다. 그는 미니 로봇을 통해 집밖에서도 가사 일을 신속하게 통제할 수 있는 프로젝트를 이끌고 있다. 한마디로 그는 항상 이성이 제대로 작동하는, 의지에 따라 모든 것이 관리되는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다.

 알랭과 베네딕트의 이런 일상은 어느날 저녁 부엌 개수대 파이프안에서 쥐한마리가 발견되고, 저녁식사에 초대했던 사장 리처드 폴록과 부인 알리스의 다툼으로 인해 완전히 무너져내린다. 부하직원 부부의 저녁식사 초대 자리에서 남편을 “창녀와 놀아나는 남자”로 맹비난하면서 와인을 끼얹어버린 알리스의 행동에 알랭 부부는 어이없어 한다. 두사람을 배웅하고 들어오던 베네딕트는 남편에게 이렇게 이야기한다.  “내가 나중에 저렇게 되면 안락사시켜줘.”“물론 “이라고 웃으며 가볍게 받아치는 알랭의 반응에는 “우리가 저들처럼 될리 없다”는 자신감이 섞여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파국은 의외로 빨리 다가온다. 실험실에서 홀로 일하던 알랭을 유혹하려다 실패한 알리스가 베네딕트를 찾아와 “당신 남편이 내 유혹을 물리쳤지만 한순간 (선을 넘으려고) 머뭇거렸다”고 폭로한뒤  2층 손님방으로 올라가 권총자살을 해버린 것. 이후 베네딕트는 알랭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리고 , 심지어 끔찍하게 최후를 마감한 알리스에 사로잡혀버리게 된다.

알리스가 죽기전에 알랭과 남편 폴록에 대해 한 말은 과연 사실일까, 알랭은 정말 그 자신이 주장했던 것처럼 알리스에게 한 순간이라도 끌린 적이 없었는가, 폴록 사장은 과연 어떤 사람인가, 집안을 완전히 점령해버린 레밍 떼는 실제인가 아니면 알랭이 만들어낸 환상인가, 알랭이 목격한 베네딕트와 폴록의 섹스 광경은 진짜인가. 영화 끝부분에서 죽었던 알리스가 알랭 앞에 나타나 집 열쇄를 건네주며 증오하는 남편 폴록을 완벽하게 살인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는 지점에 도달하면, 과연 알리스가 죽은 것이 사실인가란 근본적인 의문까지도 생겨나게 된다.

<레밍>은 내면에 숨겨진 욕망과 불안감을 예민하게 건드리는 감독의 연출력과 배우들의 안정된 연기가 돋보이는 영화다. 다만, 사변적이고 극적 스릴감이 다소 느슨한 것이 흠. 50을 넘긴 나이에도 몽환적인 눈매와 온몸에 흐르는 긴장감을 잃지않는 샬롯 램플링의 연기를 특히 눈여겨볼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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