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여우의 영화 이야기/영화로 본 세상

'리스본행 야간열차'로 본 포르투갈의 아픈 역사

bluefox61 2014. 6. 26. 16:45

이베리아 반도의 독재역사라고 하면, 으례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이 스페인 프랑코 독재(1939~1975년)입니다. 워낙 길고도 잔악했던 데다가, 수많은 예술작품의 소재가 된만큼 전세계인의 기억에 지금도 또렷히 박혀 있기 때문일겁니다.

반면 포르투갈 독재역사는 스페인에 비해 상대적으로 조명을 덜 받아온게 사실입니다. 안토니우 드 올리비에라 살라자르의 독재(1932~1968년)체제도 프랑코 못지않게 잔혹했다고 합니다. 30년 넘게 1당 독재정권을 유지하면서 비밀경찰 피데(PIDE)를 통해 인권탄압을 자행한 것으로 알려져있습니다.

 

                                                       <살라자르>

 

<살라자르 독재체제를 끝낸 1974년 4월 25일 청년장교들의 쿠데타 당시 모습. 시민들이 거리에 쏟아져나와 환영하고 있다. >

 

 

올해는 마침 포르투갈 독재의 역사를 끝낸 '카네이션 혁명'이 일어난지 꼭 40년이 되는 해이지요. 카네이션 혁명(포르투갈어: Revolucao dos Cravos, 별명: 리스본의 봄)은 1974년 4월 25일 발생한 무혈 쿠데타였습니다. 포르투갈 내에서는 날짜를 따 '4월 25일 혁명(포르투갈어: 25 de Abril)'이란 이름으로 더 자주 불린다고 합니다.

 

1974년 4월 25일, 30년 이상 계속된 독재정권인 살라자르 정권과 계속되는 식민지와의 전쟁에 대한 반발감으로 좌파 청년 장교들이 주도해 쿠데타를 일으켰습니다. 카네이션 혁명이란 이름은 혁명 소식을 들은 시민들이 거리의 혁명군에게 카네이션을 달아 지지의사를 표시한데서 비롯됐지요. 이 혁명 이후 포르투갈은 마카오를 제외한 모든 해외 식민지에 대한 권리를 일괄포기했고,  정권은 군부의 과도정부를 거쳐 투표에 의한 민간정부로 이양됐습니다.

 

물론 혁명 이후에도 한동안 포르투갈 정치는 요동쳤습니다. 1974년 5월 15일에 임시정부가 성립, 스피놀라 장군이 임시대통령으로 취임했지만 실제로 혁명을 주도한 청년장교 세력 '구국운동(MFA)'과 스피놀라 대통령 사이의 갈등이 갈수록 깊어진것이죠. 9월 30일 스피놀라 대통령이 사임했고, 코스타 고메스 장군이 대통령에 취임하고 중립적인 정부 운영을 실시했는데 1975년 3월 11일 스피놀라 장군이 권력을 탈환하려고 쿠데타를 일으키게 됩니다. 이 쿠데타는 실패했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각 정파의 권력 투쟁은 더욱 격렬해졌습니다. 그리고, 1976년 총선과 대통령 직접선거가 실시되고, MFA 출신의 안토니우 하말류 이아느스 장군이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겨우 포르투갈은 안정을 찾게 됐다고 합니다.

 

 

 

마침, 포르투갈의 아픈 역사를 '국외자'의 시선으로 바라본 영화가 상영되고 있습니다. '리스본행 야간열차'이지요.

당초 이 영화에 눈길이 갔던 것은 주연 배우 제레미 아이언스 때문이었습니다. 1948년 9월 생이니까 올해로 만 65세이지만 , 그는 언제나 제겐 영원한 '제레미 오빠'이니까요. 그 다음으로 관심이 갔던 이유는 '정복자 펠레'의 빌 어거스트 감독의 연출작이란 점이었습니다.

 

<베른의 다리위에서 자살하려던 여성이 놓고 간 붉은 가죽 코트 주머니 속의 책 때문에 리스본행 야간열차에 올라타는 그레고리우스>

 

영화는 파스칼 메르시에의 동명소설을 토대로 하고 있습니다. 영화를 보기전 소설부터 읽었는데, 사실 소설은 독재체체 포르투갈을 배경으로 하면서도 주인공인 의사 프라두의 인생에 대한 통찰에 더 무게를 두고 있습니다. 그래서 소설은 영화보다 훨씬 더 철학적이고 무거운 데 비해, 영화는 어느날 갑자기 스위스 베른에서의 삶을 버리고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탄 고전학 선생 그레고리우스가 오래전 사망한 프라두가 남긴 책을 단서삼아 그의  흥미로운 삶을 뒤좇는 미스터리적 이야기 구조에 더 무게를 두고 있습니다.

 

사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포르투갈 독재에 관한 에피소드들은 , 실제 독재를 경험했던 우리의 시각에서 보면 그리 새로운 것도 아닙니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악명높은 비밀경찰 '리스본의 백정' 멘데스 역시, 우리의 '고문기술자' 이근안에 비하면, 그다지 가공할만하지도 않습니다(영화에 나오는 루이스 멘데스가 실존인물인지를 구글로 찾아봤는데 확인하지는 못했습니다. 멘데스란 이름은 아니어도, 이런 인물이 충분히 현실에 존재했겠지요). 영화 속에서 지하 저항운동을 했던 노인이 " 독재를 경험하지 않은 스위스 사람들은 모른다"고 그레고리우스에게 말하는데, 그게 무슨 의미인지 한국사람들은 단박에 이해하지요. 영화에 등장하는 야학(여기서는 지하활동가들이 경찰의 눈을 피해 독서회란 이름으로 비밀집회를 갖습니다)도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것이고요.

 

<영화 속에서 고뇌하는 젊은 의사 프라두를 연기하는 잭 휴스턴>

 

전반적으로 봤을때, 영화는 그리 걸작이라고는 하기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르투갈 사람들이 과거 어떤 아픔을 겪었는지를 간접적으로나마 이해하기에는 좋은 텍스트 역할을 하는 작품이라고 할 수있습니다.

 

더불어, 제레미 아이언스와 '베를린 천사의 시'의 브루노 간즈, '참을수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레나 올린을 오랫만에 만나는 기쁨이 큰 영화이기도 합니다. 참고로 영화에서 젊은 에스테파니아로 출연하는 여배우는 요즘 한창 잘나가는 프랑스 출신의 멜라니 로랑입니다. 사색적이고 진실한 젊은 의사 프라두를 연기하는 남자배우는 미국 명감독 존 휴스턴의 손자 잭 휴스턴입니다. 친할아버지가 무려 존 휴스턴, 고모가 안젤리나 휴스턴이라니, 그야말로 할리우드 명문가 출신인거죠.  묘한 분위기가 매력적인 이 배우, 앞으로 눈여겨 봐야 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