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여우의 영화 이야기/영화로 본 세상

이란 영화계에도 개방 훈풍 불까

bluefox61 2015. 5. 15. 06:50

핵협상 타결로 이란의 개혁,개방이 가속화될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이란 영화계에도 과연 개방의 훈풍이 불어닥칠 수있을지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이란은 아바스 키아로스타미, 자파르 파나히, 아쉬가르 파라디, 모흐센 마흐말바프 등 걸출한 감독들을 배출한 영화 강국이지만, 자국 내에서 제작되는 모든 영화의 각본을 사전 검열하는 등 표현의 자유를 강하게 억압하고 있다. 이란에서 순수한 동심을 소재로 한 작품이 유난히 많은 것은 이런 제작 현실과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
 

하지만 이란 영화계에도 조금씩 개방의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고 파이낸셜타임스(FT)가 최근 보도했다. FT는 지난 4월 말 테헤란에서 열린 제 33회 파즈르국제영화제의 개막작으로 키아로스타미의 ‘증명서(국내 번역 제목은 ‘사랑을 카피하다’)’가 개막작으로 상영된 것을 의미심장한 변화로 평가했다. 키아로스타미 감독도 개막작 상영에 앞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나뿐만 아니라 (이란 당국에 의해)추방당했던 영화들이 이런 대접을 받게 될 줄은 예상치 못했다"며 감격스러워했다. 키아로스타미 감독은 당국의 사전검열을 강하게 비판하면서 "국내에서는 더이상 영화를 만들지 않겠다"고 선언한 바있다.
 

<택시>에 운전기사로 출연한 파나히 감독


‘증명서’는 키아로스타미가 프랑스 자본으로 이탈리아에서 올로케이션한 2010년 작품이다. 이탈리아 투스카니를 방문한 영국인 남성 작가와 프랑스인 여성 골동품 수집가가 우연히 만나 하룻동안 뜻하지 않게 부부행세를 하면서 겪는 일과 감정을 그린 작품이다. 골동품 수집가로는 프랑스의 대표적인 여배우 쥘리에트 비노슈가 출연했다.


중년 남녀의 만남을 담백하게 그린 이 영화가 이란 당국에 의해 상영금지 처분을 받은 이유는 의외로 단순하다. 영화 속에서 비노슈가 목부분이 깊게 파진 옷을 입고 나와 가슴 윗부분이 드러난다는게 이유였다. 이번 영화제에서는 비노슈의 가슴 부분을 흐리게 처리해 상영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국이 상영금지 처분을 내렸던 작품에 대해 상영을 허가했다는 것자체에 의미가 있다고 FT는 지적했다.


삼촌 대신 베를린영화제 황금곰상을 받은 파나히의 조카


이란의 대표적인 반체제 영화감독으로 꼽히는 자파르 파나히에 대한 당국의 한층 누그러진 태도도 주목할 만하다.‘순환’‘오프사이드’‘붉은 황금’ 등 강렬한 사회비판을 담은 작품들을 만들어온 파나히 감독은 지난 2009년 대선 후 부정선거 시위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3개월 수감형,20년간 작품활동 금지,출국 금지 등의 중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파나히 감독은 예술가로서 ‘사형선고’와 다름없는 형벌에 굴복하지 않고 집안에서 ‘닫힌 커튼’‘이것은 영화가 아니다’(2010년작)를 만들어 해외 영화계에 몰래 전달한데 이어, 올 2월에는 신작 ‘택시’를 당국 허가없이 독일 베를린국제영화제에 출품해 최고영예인 황금곰상을 수상하기까지 했다. 


영화는 파나히가 택시운전사로 등장해 테헤란 곳곳을 돌아다니며 만난 승객들과 솔직한 대화를 나눈다는 내용이다. 승객 역은 모두 비전문 배우들이 맡았다. 출국이 금지된 파나히는 시상식에 직접 참석하지 못했고, 영화에 출연했던 자신의 조카를 보내 상을 수상했다. 미국 감독인 대런 아로노프스키 심사위원장은 ‘택시’에 대해 "예술과 공동체, 조국과 관객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찬 영화"라고 극찬했다.
 

해외 영화계에서는 파나히가 테헤란 시내를 돌아다니면서 ‘택시’를 촬영했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있다. 전작인 ‘닫힌 커튼’‘이것은 영화가 아니다’와 달리 버젓이 공개된 장소에서 영화를 촬영했는데도 경찰에 체포되거나 제지를 받지 않았다는 것이다. 심지어 파나히가 ‘택시’시사회를 테헤란에서 가졌는데도 당국은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이란영화위원회는 ‘택시’를 경쟁부문에 선정한 베를린국제영화제 조직위원회에 "이란의 현실을 왜곡할 수있다"고 불만을 제기하기는 했지만, 이 작품이 황금곰상을 수상하자 파나히 감독에게 공개적으로 축하메시지를 보내기도 했다.


파나히 감독은 지난해 하산 로하니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에서 "로하니 대통령은 표현의 자유를 확대하겠다는 자신의 공약을 지키지 않고 있다"면서 "이란 감독들 중 불과 5%만이 사회현실을 다룬 영화를 만들고 있으며 그들이 만든 영화의 90%가 상영기회조차 갖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또 "감독에게 가장 큰 상은 자신의 영화를 고국의 관객들에게 보여주는 것"이라며 "로하니는 새로운 검열제도를 만들지 말라"고 촉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