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여우의 영화 이야기/영화 이야기

‘카포티’ 그리고 ‘인 콜드 블러드’

bluefox61 2006. 6. 26. 17:11

1984년 8월 28일.뉴욕타임스 부고란에 한 남자의 사망을 알리는 장문의 부음 기사가 실렸다. 부고는 이렇게 시작된다.


“트루만 카포티. 명징하게 빛나는 탁월한 문장으로 전후 미국 문단을 대표하는 작가 중 한 사람이었던 그가 59세 나이로 어제 로스앤젤레스에서 숨졌다. 카포티는 소설가이자 단편작가이며, <인 콜드 블러드>로 논픽션 소설 장르를 개척한 문단의 셀레브리티(유명인사)였다. 십대 시절 첫 단편소설 <미리암>으로 데뷔한 이래 그는 총 13권의 작품집을 남겼으나, 진정으로 위대한 미국 작가의 반열에 오르지는 못했다. 그의 오랜 친구인 존 말콤 브리닌에 따르면, 카포티는 명성과 부(富), 그리고 쾌락을 좇는 데 자신의 시간과 재능, 건강을 탕진했다.”

 


국내 영화팬들에게 트루만 카포티란 이름은 주로 오드리 헵번 주연의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의 원작자 정도로만 기억되고 있다. <인 콜드 블러드>가 최근 번역 출간되기 이전까지 그의 작품들이 국내에 제대로 소개된 적이 거의 없었던 탓이다. 이처럼 정보가 부족한 상황에서,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의 헵번 이미지와 로맨틱한 분위기는 카포티에 대한 오해를 조성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카포티는 한 마디로 ‘모순’의 인물이었다. 쾌활하고 다감한 그의 겉모습 뒤에는 극도의 자기애와 이기주의가 버티고 있었고 미국사회의 환멸과 도덕적 붕괴를 정확히 짚어냈으면서도 정작 자신은 부와 돈, 그리고 명성의 노예였으며, 이성애 사회 속의 동성애자였다.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은 원작 소설과 상당한 거리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영화에서는 여주인공 홀리(오드리 헵번)의 직업이 돈많은 부자와 유명인사들을 노리는 일종의 ‘그루피’처럼 묘사돼 있지만, 소설에는 홀리의 직업을 창녀로 명확하게 드러내고 있다. 58년 소설이 발표된 후 3년 뒤 제작된 영화는 헵번의 이미지를 살리기 위해 많은 설정을 바꾸거나 순화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예를 들어 홀리가 남자, 여자와 모두 성관계를 갖는 바이섹슈얼이란 설정도 영화에서는 빠졌다. 영화는 홀리가 윗층에 사는 작가 프레드(조지 페퍼드)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해피엔딩으로 끝나지만, 소설은 홀리와 프레드의 미래에 대해 훨씬 복잡미묘한 뉘앙스를 남기는 식으로 마무리된다.


어쨌거나 영화와 소설의 그 모든 차이를 제쳐둔다 하더라도, 50년대 후반 미국인들에게 몸을 팔아 생계를 이어나가는 젊은이들(프레드도 돈많은 연상의 인테리어 디자이너 애인 ‘툴리=패트리샤 닐’에 기식하며 살아간다)의 모습이나 세상을 바라보는 시니컬한 태도는 상당히 파격적이고 충격적이었을 것이다. 결국 이 짤막한 단편소설은 2차세계대전 후 미국사회의 낙관주의에 대한 고별이자, 60년대 격변과 갈등시대의 도래를 알리는 작품이 됐다.


20세기 미국 문학사에서 천재이자 괴짜로 각인돼 있는 카포티는 1924년 9월 30일 루이지애나주 뉴올리언스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트루만 스트렉퍼스 퍼슨스. 부모의 이혼과 어머니의 재혼으로 그의 이름은 트루먼 가르샤 카포티로 바뀌었다. 어린시절 뉴올리언스 인근 몬로빌의 친척집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야 했던 그는 옆집 소녀 하퍼 리와 평생의 친구가 됐다. 그 당시 주민들은 늘 붙어 다니던 이 소년과 소녀가 훗날 미국 문단을 뒤흔들 유명 작가가 되리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남부의 흑백 인종갈등을 고발한 명작 <앵무새 죽이기>를 쓴 하퍼 리는 카포티가 <인 콜드 블러드>를 위해 무려 7년 동안이나 조사와 집필에 매달리는 동안 충실한 리서처이자 친구로 그의 곁을 지켰다.


1959년 11월 캔사스 시골마을 홀컴의 한 존경받는 농장주 클러터와 그의 아내, 그리고 아들과 딸이 참혹하게 살해당한 사건을 상세히 기록한 <인 콜드 블러드>는 세계 최초의 진정한 논픽션 소설이자 팩션(팩트+픽션)이며, 뉴저널리즘의 탄생을 알린 획기적인 작품이었다. 카포티는 이른바 ‘홀컴 학살’로 불리는 이 사건을 묘사하면서, 서로 아무 상관없는 클러터 가족들과 두 범인 (페리 스미스, 리처드 딕 히콕)의 일상을 꼼꼼하게 그려나가다가 엽기적인 사건이 발생하는 파국과 그 이후 범인들의 심리상태, 그리고 평화로운 시골 마을의 집단적 패닉현상을 박진감넘치게 기록하고 있다.


<인 콜드 블러드> 이전까지만 해도 저널리즘의 정도는 일체의 수식과 평가를 배제한 엄격한 중립성이었다. 그러나 카포티는 철저한 사실을 토대로 하나의 사건을 자신의 시각에 따라 픽션으로 재구성했고, 그것이 기존 저널리즘의 사실나열보다도 훨씬 더 진실에 가깝다는 것을 확신했다. 물론 카포티가 히콕과 동성연애 관계였다느니, 히콕에 대해 지나치게 인간적으로 그렸다니 하는 비난도 적지 않았다. 66년 에스콰이어 잡지를 통해 연재되자마자 엄청난 충격을 불러 일으킨 <인 콜드 블러드>는 카포티가 어린시절부터 그렇게도 원했던 부와 명성을 가져다 줬다. 이 작품은 67년 리처드 브룩스에 의해 영화화됐는데, 사건이 실제 벌어진 클러터 농장저택에서 촬영돼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96년에는 TV 드라마 시리즈로도 선보였다.


카포티는 이 이후 단편들을 계속 발표하는 한편, TV 토크쇼에 단골손님으로 얼굴을 내밀고 온갖 파티들을 전전하는 등 쾌락의 세계에 점점 더 깊숙히 빠져들게 된다. 마약과 술에 찌들면서 영혼과 육체는 서서히 파괴돼 갔다. 그의 주변에는 내로라하는 명사들과 사교계의 아름다운 여인들이 득실댔지만, 정작 카포티가 탐욕스런 상류세계를 (주인공 이름만 바꿨을 뿐 누구인지를 훤히 드러낸) 소설로 폭로하자 그들은 냉혹하게 관계를 끊어버렸다. 사교계로부터 거절당한 카포티는 관계를 회복하려고 애썼지만, 결국엔 쓸쓸하게 외면당한 채 죽음을 맞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원색의 튀는 옷차림과 가는 목소리, 그리고 신랄하기 짝이 없는 말투로 한 시대를 주름잡았던 카포티가 사망했을 당시 그의 곁은 지켰던 것은 다량의 약들뿐이었다.


그의 시신은 로스앤젤레스 공동묘지에 안장됐다가 94년, 두 해 전 사망한 전애인 잭 던피의 유해와 함께 화장돼 롱 아일랜드의 한 연못에 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