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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벨기에에 가다-3. 브뤼허의 성혈성당

bluefox61 2023. 4. 3. 17:33

'유럽북부의 베네치아'로 불리는 벨기에 브뤼허는 오랫동안 저의 여행 버킷 리스트 중 하나였습니다. 계기는 영화였지요. 2008년 개봉한 마틴 맥도너 감독의 <킬러들의 도시(In Bruges)>에서 두 주인공 콜린 패럴과 브렌단 글리슨은 영국 대주교를 암살한 후 브뤼허로 숨어들어옵니다. 영화는 이곳에서 지내면서 다음 명령을 기다리던 두 사람이 결국엔 또다시 쫓고 쫓기는 처지가 되는 과정을 보여주는데, 긴박하고 잔인한 상황과 달리 아름답고 고즈넉하기 짝이 없는 운하 도시의 풍경이 매혹적이었지요. 그때, 저 곳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더랬습니다.

 

대개 북유럽 지역을 여행하는 사람들은 벨기에 브뤼셀에 하루 이틀 묶으며 근교 도시 브뤼허와 겐트를 당일치기로 다녀오는 듯합니다.  개인적으로 저의 벨기에 여행 목적은 우선 브뤼셀 구도심 그랑 플라스와 왕립미술관, 그 다음으로 브뤼허였고 그 중에서도 성혈성당이었습니다. 

 

브뤼허의 랜드마크인 마르크트 광장의 종탑입니다. 저는 꼭대기에 올라가지는 않았지만, 높은 종탑이 압도적입니다. 

아래 사진은 마르크트 광장 인근에 있는 부르그 광장의 시청입니다. 성혈성당은 시청사의 오른편에 자리잡고 있는데, 언뜻 보면 눈에 띄지 않을 정도의 작은 규모입니다. 그래서 브뤼허를 찾는 관광객 대다수가 놓치고 가기 쉬울 듯해요. 하지만, 이곳은 종교적으로나 역사적으로 엄청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곳이예요.  

여기가 성당으로 들어가는 입구입니다. 

성당의 정식 명칭은 영어로 Basilica of the Holy Blood입니다. 바실리카라는 단어는 로마 시대의  다목적 건축물을 가리키는 용어로, 기독교의 예배당을 가르키는 말로도 사용됩니다. 역사적, 예술적, 신앙적인 면에서  중요성이 인정되는 성당에 붙여진다고 하네요. 

브뤼허의 이 성당에 성혈이란 이름이 붙은 이유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내린 후 그의 피를 닦은 수건이 이곳에 있기 때문이지요.  뿐만 아니라 성당 전체가 마치 작은 보석상자처럼 아름답기 짝이 없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헉! 하고 감탄이 터져나오더라고요.  

 

먼저 성당 안의 모습을 보겠습니다. 목재 천장에서 오랜 역사를 짐작해볼 수있습니다. 

스테인드글래스 창문들도 아름답기 그지 없습니다.

그림을 보면, 그리스도의 피가 묻은 수건을 브뤼허로 가져다가 국왕에게 바치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2차 십자군 전쟁(1147~1148)에 참여한 알사스의 티에리 백작이 1150년 베들레헴에서 성혈이 묻은 수건을 가지고 브뤼허에 돌아와 국왕에게 바친 것으로 전해집니다.   13세기 전반부에 이 건물에 성혈을 모시고 '성혈성당'이란 이름을 붙였다고 합니다.   이후 매년 브뤼허에서는 예수승천일에 성혈의 행진이 열립니다. 

 

신약외경에 따르면,  아리마태아의 부자 요셉이 예수의 시신을 십자가에서 내려 옆구리에서 흐르는 피를 천으로 닦은 후 굴 무덤에 매장했다고 합니다. 요셉은 최후의 만찬에 쓰인 성배도 보관했다고 하는데 , 바로 이 이야기에서 아서왕의 전설 등 성배와 성혈에 관한 많은 전설과 문학작품들이 탄생했다고 하네요. 

저는 성당 안에 들어가기 전까지만 해도 워낙 귀하다 보니, 별도의 박물관 같은 곳에 모셔져 있는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런데, 아래 사진처럼 성당 한 쪽에서 모든 사람들에게 공개하고 있었습니다. 사진 속 여성이 미소를 머금고 내려다 보고 있는 것이 유리관 안에 들어있는 성혈 수건입니다. 미사 때에는 신도들이 유리관을 만질 수있게 허용하기도 한답니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1250년대 이전까지는 브뤼허의 성혈 존재와 관련된 기록이 없다고 합니다. 따라서 기존에 알려져 있는 것과 달리 2차 십자군 때가 아니라 , 4차 십자군전쟁의 핵심 지도자였던 플랑드르 백작 보두앵 9세(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십자군이 세운 라틴제국의 초대황제 보두앵 1세)의 군인들이 콘스탄티노플에서 가져왔을 가능성이 높다고 합니다.  그 이후부터 브뤼허에서 아주 중요한 위치와 의미를 갖게 됐지요. 

 

사실 4차 십자군전쟁(1202~1204)은 유럽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수치스러운 사례로 꼽힙니다. 원래 목표는 이슬람에 빼앗긴 예루살렘을 되찾으려는 것이었지만, 정작  같은 기독교도 국가인 동로마(비잔티움)제국을 공격했기 때문입니다.  비잔티움 제국은 동방정교를 신봉하는 기독교 국가였는데, 권력다툼 중이던 알렉시우스 앙겔루스가 십자군에게 자신이 권좌에 오르게 도와주면 십자군의 원정을 지원해주고 콘스탄티노플을 로마 가톨릭의 관할로 넘기겠다는 제안을 했다고 해요. 그래서 십자군은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해 승리했고 앙겔루스는 알렉시우스 4세로 국왕 자리에 올랐지만, 그후 반대파가 그를 폐위시키는 등 극도의 혼란이 벌어졌습니다. 이 와중에 십자군은 콘스탄티노플에서 인류역사상 유례없는 약탈과 방화, 강간 등을 저질렀습니다. 

 

연구결과가 사실이라면, 브뤼허의 성혈은 그 때 약탈해온 것이란 이야기이죠. 

어쨋든 1310년 교황 클레멘트 5세가 교황령을 내려서 신도들에게 브뤼허 순례를 허용했다고 합니다.

 

또 과학적 연구에 따르면, 성혈이 들어있는 유리관은 크리스탈로 만들어져 있고 11세기 또는 12세기에 콘스탄티노플 지역에서 향수병으로 사용되던 것과 유사하다고 합니다. 그 안에 든 헝겁과 피의 진위 여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아마도 과학적 분석 자체를 해본 적이 없는 듯합니다.  예수 수의로 알려진 '토리노의 수의' 경우, 과학적 분석을 따라 수의의 연대측정 결과를 근거로 14세기에 만들어졌다는 사실이 밝혀진 바 있지요. 

 

저는 기독교 신자가 아니지만 매우 특별한 감정이 솟는 순간이었습니다.  어떤 블로거들은 미신신봉처럼 썼던데, 저는 과학적 확인 여부를 떠나서, 수천년동안 신앙을 지키고자하는 사람들의 그 간절한 마음 자체만으로도 소중하다고 생각합니다. 

 

 

 

근접 촬영이 금지돼 있고, 대신 자그마한 설명서 같은 것을 건네줍니다. 

 

성당의 1층은  성바실리 경당입니다. 전형적인 로마네스크 양식의 내부 모습을 가진 이곳에도 많은 작품들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피에타상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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