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저런 이야기들/여행

'슬픔과 매력'의 땅, 발칸반도를 가다-보스니아 사라예보 ⓵

bluefox61 2024. 1. 12. 13:48

"소련에 속한 국가들에서 분리독립 움직임이 계속 일어나고 있지만, 나는 유고 연방이 가장 걱정스럽다. 만약 이 나라가 분열된다면, 얼마나 엄청난 비극이 벌어질지 상상조차 할 수없다." 

 

2023년에 동유럽 발칸반도와 헝가리, 폴란드를 길게 여행했습니다. 사실 이 지역의 국가들은 저의 <여행 위시 리스트>에 들어 있지는  않았습니다. 직업적 특성상  '숙제'처럼 남아있기는 했지만  굳이 여행하는 기회가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더랬습니다. 발칸 반도 여행이 처음은 아니었습니다. 몇해전 크로아티아를 여행했을 때  두브로브니크 구시가 한가운데에서 폭탄공격으로 무너진 채 그대로 있는 집을 본 적은 있었지만, 발칸의 비극적 역사 속으로 깊이 들어간 느낌을 별로 없었습니다. 크로아티아는 로마시대 유적을 많이 가지고 있어선지, 이탈리아의 변방 국가 같은 이미지가 강했거든요. 실제로 이탈리아와 아드리아해를 마주하고 있는 크로아티아는 오랫동안 로마제국의 식민지였고, 특히 베네치아의 통치를 받았었지요. 

 

발칸반도 국가들 중에서도 특히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가 제 발길과 마음을  잡아당긴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글 맨 위에서 언급한 말 한마디 때문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오래 전의 일입니다. 1989년 독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후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 헝가리 등 소련 위성국가들에서 민주화 혁명이 일어나고, 소비에트 연방을 구성했던 공화국들이 속속 분리독립을 선언하던 당시였습니다. 유고슬라비아연방의 해체는 1991년 6월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의 독립선언으로 시작됐으니, 아마도 1990년 또는 1991년 상반기 쯤이었던 듯합니다. 소련 등 공산권의 대변혁에 관해 논의하는 학술모임에 참석할 기회가 있었는데, 유고슬라비아에서 오신 한 학자께서 무거운 표정으로 "나는 유고 연방의 분리독립이 가장 두렵다"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당시만 해도 전 세계의 관심은 소련으로, 유고슬라비아를 주목하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았던 듯합니다. 우리나라 언론들의 보도 역시 마찬가지였고요. 저 역시도 그랬습니다. 유고슬라비아는 무엇보다 티토의 나라이고, 일종의 '사회주의 제3의 길'을 걷고 있는, 제법 탄탄하고 국제적 영향력도 큰 나라로 알고 있었지요. 그래서 그 학자의 말이 제겐 좀 충격으로 다가왔던 것같습니다. " 꽤 잘살고 있는 유고슬라비아가 문제라고?" 

 

그런데, 그 분의 말씀은 곧 사실로 드러났습니다.  유고 연방을 구성하고 있던 슬로베니아, 크로아니아, 마케도니아, 보스니아, 몬테네그로 등이 줄줄이 분리독립을 선언했고, 이후 발칸반도에서는 2차세계대전 종전 이후 최악의 내전이 휩쓸면서 민족, 종교 갈등으로 인한 학살 등 끔찍한 범죄가 벌어졌지요. 매일같이 보도되던 유고 내전 기사들을 접하면서 , 저는 그 학자의 말씀을 떠올렸습니다. 발칸반도의 역사가 그토록 복잡하게 얽혀있었다는 사실을 비로소 알게 됐고, 민족과 종교 때문에 죽고 죽이는 비극에 몸서리도 쳤습니다. 유고의 분열이 두렵다던 그 분은 어느 쪽이셨을까요? 내전 통에 목숨을 부지하셨을까요? 지금도 궁금합니다. 

 

2023년 여름 발칸 반도를 찾은 이유는 직업적 관심 때문이기도 했지만, 30년 넘게 제 마음 속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었던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고 싶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발칸은 도대체 어떤 땅이길래 그토록 혹독한 비극을 겪어야만 했을까?

 

발칸반도, 또는 옛 유고 연방 중에서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에 대한 대다수 사람들의 인식은 아마도 비슷할 겁니다. 유럽의 변방, 전쟁이 휩쓸고 지나갔던 나라, 지금도 왠지 위험할 것같은 나라, 칙칙하고 무거운 분위기를 가진 나라, 일단 발을 들여놓으면 다크투어가 될 것같은 나라... 등등 일겁니다.  저 역시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내전의 피해가 가장 컸던 보스니아-헤르체비아가 위와같은 이미지를 가진 국가인 건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직접 여행을 해보니, 생각했던 것과 다른 점이 많았습니다. 비극과 슬픔을 간직하고 있기는 하지만 매력도 철철 넘쳐흐르는 나라가 바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이더군요.  동서양의 종교와 문화가 뒤섞여 있고, 놀 때는 화끈하게 놀 줄도 아는 사람들이 있는 나라가 바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이었습니다. 

 

저와 제 여행파트너는 2023년 여름, 카타르 도하를 경유해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수도 사라예보의 국제공항에 도착했습니다. 한 국가의 수도에 있는 국제공항치고는 아담한 규모이더군요. 깜짝 놀랐던 것은, 이 공항에서 타고 내리는 승객들 중 검은색 차도르를  입은 여성 등 이슬람 신도 또는 아랍계로 보이는 사람들이  매우 많았다는 점이었습니다. 제가 여행을 많이 했다고는 할 수없지만, 유럽 공항에서 이처럼 많은 이슬람 신도들을 만나기는 처음이었습니다(튀르키예 이스탄불 국제공항은 제외하고^^) . 비로소 유럽의 '이슬람 국가'에 왔음을 실감한 순간이었지요. 

 

저처럼 나이가 좀 든 한국인들이 사라예보라는 이름을 좀 친숙하게 느끼는 이유는 아마도 두가지 때문일겁니다. 첫번째는 1차세계대전의 도화선이 된 도시, 두번째는 전설의 탁구선수 이에리사의 '사라예보 승전보' 이지요. 첫번째는 1914년 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황위 계승자 부부가 암살당한 것을 계기로 1차세계대전이 일어났던 것을 말합니다. 두번째는 1973년 사라예보에서 열린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서 우리나라의 이에리사 선수가 중국,일본을 꺽고 우승을 차지했던 '사건'이지요. 지금이야 우리나라 스포츠 선수들이 많은 종목에서 1위를 차지하고 있고, 김연아 손흥민 같은 선수들도 있으니 정말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의 일이긴 합니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 구기종목 사상 세계 정상에 오르기는 처음이었고, 귀국한 선수들이 서울 시내에서 카퍼레이드까지 했었습니다. 그래서 어르신들 중에선 '사라예보' 하면 "아, 이에리사' 라는 반응하시는 분들이 있을 정도입니다. 

 

사라예보 시내 한가운데를 흐르는 밀랴츠카 강 주변의 풍경. 사실 '강'이라고 부르기엔 좁고, 얕고, 수량이 적어서 '개천'이라해도 과히 틀리지는 않을 듯합니다. 그래도 고풍스런 건물들을 둘러보며 강변을 산책하는 맛이 좋습니다. 전날 비가 내리더니, 상류에서 붉은 흙이 흘러내려왔는지 강물이 붉게 변해있습니다.

 

사라예보 여행은 대부분 이곳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바로 1차세계대전을 예고한 총성이 울려퍼졌던 곳, 라틴교 앞이지요. 

앞의 다리가 라틴교이고, 오른쪽 붉은 색 외관을 가진 건물이 프란츠 대공 암살사건에 관한 박물관입니다. 

 

보스니아의 세르비아계 민족주의자 가브릴로 프린치프가 프란츠 대공 부부를 향해 총을 쏜 지점에 만들어진 구둣자국 표시판.

 

당시 발칸 반도의 상황은 매우 혼란스러웠습니다. 14세기부터 약 400년간 발칸 반도를 지배해온 오스만 제국이 흔들리고 있는 와중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합병했고, 이에 대한 반발로 보스니아 뿐만 아니라 발칸 반도 곳곳에서는 세르비아를 중심으로 한 민족주의가 갈수록 거세지고 있었습니다.당시 세르비아는  이미 독립해 발칸의 주요 국가로 자리잡고 있었지요.

 

프린치프는 1911년부터 세르비아계 육군 장교들이 결성한 비밀 결사 조직인 흑수단, 혁명 조직인 청년 보스니아 대원으로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1914년 초여름 프란츠 대공은 보스니아 순방에 나서, 6월 28일 보스니아에 도착했습니다. 공교롭게도 이날은 1389년 세르비아 군이 튀르크 군에 참패한 '코소보 폴례 전투' 추모일이었습니다. 세르비아 민족주의자들에게는 치 떨리는 날이 아닐 수없죠. 

 

사실 프란츠 대공은 이날 암살을 모면할 수도 있었습니다. 자동차를 타고 시내를 지나던 중 수류탄 공격을 받았지만 다행히 목숨을 건진 그는 시청을 방문한 뒤 사라예보를 떠날 계획이었습니다. 하지만 막판에 마음을 바꿔, 앞서 폭탄테러로 다친 수행원들이 있는 병원을 방문해 위로해주려고 시내로 방향을 돌렸고, 라틴교 주변의 폭이 좁은 길을 천천히 지나가려던 순간 프린치프가 쏜 총에 맞아 숨지고 말았습니다. 그로부터 약 한달 뒤 결국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지요 

무어 양식이 돋보이는 사라예보 시청사. 프란츠 대공이 직접 방문했던 이 곳은 1896년에 세워졌습니다. 한때 대학도서관, 국립도서관으로 이용됐다가 1990년대 중반 내전 때 큰 피해를 입은 후 2014년 5월 시청으로 다시 문을 열었다고 합니다.

 

보스니아의 복잡한 역사를 모르더라도, 사라예보는 참 매력적인 도시입니다. 동서양 문화, 이슬람과 가톨릭, 동방정교와 유대교, 프로테스탄트 기독교 등 온갖 종교들이 이 작은 도시에 뒤엉켜있는 모습은 정말 신기롭기도 하고 감동적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내전의 원인이 되기도 했지만요..

 

사라예보 올드타운 중심가의 모습.전세계에서 온 관광객들로 바글바글합니다.
16세기에 세워진 정교 교회인 '대천사 미카엘과 가브리엘 교회'
올드타운의 아름다운 샘물 건물 . 이 시원한 물은 대체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요? 한여름 여행객들에게는 오아시스가 아닐 수없습니다.
정통 보스니아식 커피 한잔으로 피로한 다리를 잠깐 쉬게 해주는 중...옆에 앉은 금발의 언니들에게 "어디에서 왔냐" 물으니, 사라예보 사람이라고 간단히 말하고는 자기들끼리 수다를 떨더군요. 대체로 보스니아 사람들은 츤데레인듯합니다. 외국 관광객들에게 지나치게 친절하지도 않고, 크로아티아 장사꾼들처럼 한푼이라도 더 돈 벌려는 티를 팍팍 내지도 않지만, 잔돈 계산 하나는 정말 정확하더라고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