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여우의 영화 이야기/내가 사랑하는 배우들

수전 서랜든

bluefox61 2008. 2. 18. 15:45
이라크전쟁이 한창이던 해에 미국의 대표적인 진보파인 여배우 수전 서랜든이 [데드맨 워킹]으로 받은 오스카 여우주연상 트로피를 팔아먹으려다가 아카데미와 마찰을 빚은 적이 있었습니다.

트로피를 엿바꿔먹으려던 것이었냐고요?
물론 아닙니다. 트로피를 경매에 붙여서 얻은 수익으로 전쟁 구호기금으로 사용하려 했던 것이죠.
아카데미는 펄쩍 뛰었습니다. 감히 오스카 트로피를 상품으로 내놓다니 , 무엄하기 짝이 없다는 거죠. 서랜든은 이에 대해 ″한번 준 트로피를 가지고 왜 아카데미가 이래라 저래라 하냐″며 보수적인 아카데미를 신랄하게 성토했구요. 후속기사가 없어서 트로피의 행방이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지만, 아마도 서랜든이 트로피를 팔아먹으려던 계획은 물거품이 된 듯합니다.

서랜든이 요즘 언론에 거론되는 경우는 대개 정치적인 발언때문이죠.
그래서 배우로서의 서랜든의 진가가 조금 가려지는 것같아 아쉽기도 합니다.

46년생이니까 올해나이 벌써 57세이군요.
할리우드가 중년여성을 묘사하는 방식이 매우 마음에 들지 않는데 (대부분 인자한 어머니이거나, 타락한 여성 식으로...전형적인 마돈나 or 창녀의 이분법적 발상), 수전 서랜든은 그 나이(?)에도 할리우드에서 여성으로서, 그것도 섹슈얼한 여성으로 캐스팅될 수있는 매우 드믄 배우 중 한사람이라고 하겠습니다.

인간이 지혜를 터득하는 방법엔 대체로 두가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번째는 책이나 예술 , 또는 주변의 가르침 등 지식을 통해 얻게되는 지혜일겁니다.
흔히들 이런 지혜를 가볍게 여기는 경향이 있는데,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세상과 인간에 대한 좋은 생각(어떤 경우는 나쁜 편견까지도)을 갖게 되는데는 어떤 지식을 쌓았느냐가 매우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두번째는 세련된 지식이나 교양은 없어도, 직접 몸으로 부딪혀가며 무수한 실패와 좌절 끝에 얻은 지혜입니다. 전자가 두뇌적인 지혜라면, 후자는 육체적인 지혜라고 할까요.

제 개인적인 인상인지는 모르겠지만, 영화 속에서 메릴 스트립이나 캐더린 헵번이 연기하는 것을 보면 근본적으로 둘다 지적인 근본을 감출 수없다는 사실을 느끼게 됩니다.
물론 캐더린 헵번은 죽기 전 자신의 전기 작가와의 인터뷰에서, ″메릴 스트립이 너무 지적인 체한다″고 은근히 깎아내렸다고 하더군요.

두 사람의 반대편에 서있는 여배우가 아마도 수전 서랜든이 아닐까 싶습니다.
서랜든은 할리우드는 물론 미국에서 알아주는 진보주의자,반전론자입니다. 
그만큼 지적이고, 투철한 사회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죠.
하지만, 영화 속에서 그녀가 연기하는 캐릭터들을 찬찬히 살피다 보면 ″아 , 이 배우는 머리가 아니라 진짜 온 몸으로 인생이 무엇이란 것을 이야기하고 있구나″하는 것을
실감하게 됩니다.

신인시절 컬트영화의 효시 [로키 호러 픽쳐 쇼]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수전 서랜든은 83년 카트린 드뇌브와의 열렬한 딥키스 장면으로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악마의 키스(영어 원제가 훨씬 근사하죠. The Hunger)]에서 흡혈귀로 서서히 변해가는 자신과 싸우는 교수를 열연해 평단으로부터 인정받게 됩니다.
이후 87년 [이스트윅의 마녀들]을 거쳐 , 자신의 영화적, 개인적 삶에 결정적인 전환점을 이루게 한 작품 [19번째 남자](1988)에서 프로 야구선수들을 따라다니는 육감적인 그루피로 등장하게 됩니다.
(여기서 만난 12세 연하의 팀 로빈스와 아직도 결혼도 안한채 단란한 가정을 꾸미고 있답니다) 
[19번째 남자]를 통해 서랜든은 사회적으로 하위에 속하는 여성, 특히 늙지도 젊지도 않은 중년 여성의 섹슈얼 에너지를 품어내는 연기로 극찬을 받게 되지요 .
88년이니까,서랜든이 42살때 출연한 작품이군요.
이 작품을 계기로 서랜든은 일반적인 섹스심벌이기보다는 가공되지 않은 성적 에너지로 타인의 상처를 넉넉하게 품에 앉는 그런 섹스 심벌로 등극하게 됩니다.

이어서 그녀는 [델마와 루이스]의 여급, [로렌조 오일]의 불치병환자 아들을 둔 어머니, [의뢰인]의 알콜중독 변호사, [데드맨 워킹]의 수녀, [라버 앤 러버]의 연하의 유괴범과 사랑에 빠지는 아줌마, [여기보다 어딘가에]의 철딱서니없는 엄마, [와일드 클럽]의 록 그루피 아줌마 등으로 영화관객들을 찾아옵니다.

서랜든의 필모그래피를 쭉 살펴보면 , [데드맨 워킹]을 제외하면 하나같이 지성, 교양과는 거리가 먼 여성들입니다. 그녀들은 오갈데없어 처마 밑을 찾아들어온 동물과 비슷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상채기를 핥던 그 혓바닥으로 곁에 있는 누군가의 상처도 핥아주는 , 그런 여자들이죠.

제가 수전 서랜든의 영화 중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 바로 루이스 만도키감독의 [하얀궁전]입니다.
공원을 걷던 여자의 운동화 끈이 풀어진것을 본 남자가 무릎을 꿇고 앉아 끈을 다시 매주는, 그 유명한 장면이 나오는 영화죠.
(어쩌면 전 평생 제 운동화의 풀어진 끈을 매줄 남자를 찾아다녔는지도 모릅니다.)
이 영화에서 남자(제임스 스페이더)는 20대 후반의 성공한 광고쟁이입니다. 뭐하나 부러울 것없는 이 남자는 얼마전 교통사고로 죽은 아내를 못잊어 정신적으로 완전히 피폐해 있는 상태이죠.
남자는 어느날 햄버거 가게에서 여종업원인 서랜든과 싱갱이를 벌이게 됩니다.
이 장면에서 서랜든은 가스불 옆에서 하루종일 햄버거와 씨름하느라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땀으로 번들번들해져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드러낸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한마디로 무식하고, 가진 것도 없는 여자죠.

하지만 남자는 우연히 여자와 술집에서 다시 만나게 되고, 그날밤 술이 만취된채 여자 집으로 직행해 그야말로 화끈한 밤을 보내게 됩니다. 아침에 누추하고 구질구질한 여자집에서 눈을 뜬 남자. ″ 야, 이거 큰 실수를 했구나″하고 난감해하죠.게다가 여자가 자신의 취향과 완전히 다른 , 늙고 무식한 하층민이란 사실에 새삼 당혹해합니다.
그러나 남자는 여자곁을 떠나지 못합니다. 첫번째 이유는 도저히 잊을 수없는 엄청난 성적 쾌감이었고, 두번째는 여자 역시 얼마전 아들을 잃은 상처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죠.
영화는 서로 다른 사회적,경제적, 지적 배경을 가진 두 남녀가 모든 차이를 극복하고 진정으로 서로를 이해하며 사랑하는 과정을 낭만적이면서도, 씁쓸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이 영화엔 이런 장면도 나옵니다.
깔끔하고 이지적인 남자는 어느날 여자에게 진공청소기를 선물로 줍니다. 그러나 여자가 불같이 화를 내죠. 여자는 청소기 따위가 아니라 차라리 장미꽃 한송이를 선물로 받고 싶다고 말하죠. 덧없이 흘러가는 인생에서 , 남을 평가하거나(청소기를 선물했다는 것은 청소 좀 하고 살라는 비판적 평가를 상징한다는 이야기) ,남을 의식하며 소중한 시간을 허비하기보다는 마음에서 진짜 우러나는 따뜻한 배려와 감정이 훨씬 더 소중하다는 이야기이겠죠.
이 장면에서 서랜든의 얼굴엔 연하의 애인에 대한 컴플렉스, 상처받은 자존심, 애정에 대한 갈망 등 복잡한 감정들이 한꺼번에 드러나있습니다. 서랜든이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즉 본능으로 연기하는 배우란 점을 이 한장면이 잘 보여주고 있죠.

현대인은 누구나 높건,낮건 간에 보호장벽을 둘러치고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속깊은 감정을 드러내기도, 남이 내게 그런 감정을 드러내는 것도 부담스러워 하죠.
영화 속에서 서랜든은 그런 장벽에 그냥 몸을 내던져 부딪히곤 합니다.
때론 처절하게 실패하기도 하고, 때론 성공적으로 장벽을 무너뜨리기도 하죠.

온몸에 상처를 가진 , 그런 그녀가 전 좋습니다. 


'푸른여우의 영화 이야기 > 내가 사랑하는 배우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줄리안 무어  (2) 2008.02.18
크리스토퍼 워큰  (0) 2008.02.18
장만옥  (0) 2008.02.18
샬럿 램플링  (0) 2008.02.18
[킬빌]의 배우들  (0) 2008.0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