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여우의 영화 이야기/내가 사랑하는 배우들

크리스토퍼 워큰

bluefox61 2008. 2. 18. 15:48
누구나 인생에서 영원히 잊지못할 영화 한장면이 있을 겁니다.
제 경우엔 그게 지나치게 다종다양하다는게 문제이긴한데, 그래도 그중 톱 5를 차지할 만한 것을 골라본다면 바로 마이클 치미노의 디어헌터의 러시안 룰렛 장면입니다. 78년작이니까 제가 고등학교 재학중이던 소싯적의 영화군요.

사실 이 영화에는 기억나는 장면이 너무나 많습니다.
우선, 펜실바니아의 작은 철강도시에 형성된 러시아 이주민 커뮤니티가 흥미로웠고, 추운 겨울날 친구들이 사슴사냥을 하는 장면,영화 초반부의 흥겨운 러시아식 결혼식도 생각나네요.
무엇보다 배우들이 인상깊었는데, 진중한 이미지의 로버트 드 니로부터 그를 감싸안는 지적인 여성으로 등장한 메릴 스트립, 섬약한 감성의 소유자를 연기한 존 새비지, 그리고 크리스토퍼 워큰 등 휼륭한 연기자들이 총출동하고 있습니다.

이 영화에 출연했을 당시만 하더라도 존 새비지와 크리스토퍼 워큰은 그리 유명한 배우가 아니었습니다. 존 새비지는 디어 헌터 이후 올리버 스톤의 살바도르에서 엘살바도르 내란현장을 취재하다 총에 맞아 사망하는 사진기자(로버트 카파처럼!) 역을 거쳐 TV 드라마 다이너스티로 인기를 끌었고, TV 아역 스타 출신인 크리스토퍼 워큰은 디어 헌터로 아카데미 남우조연상을 받으며 할리우드의 최고 연기파로 급성장하게 됩니다.

월남전이 막바지에 이른 혼란한 베트남에서 붉은 두건을 머리에 둘러쓰고 광기어린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옛친구 로버트 드니로에게 최후의 러시안 룰렛을 제안하던 그의 모습은 영화사에 남을 명연기임에 틀림없을 겁니다.
그 때 이후 저는 크리스토퍼 워큰의 영화라면 무조건 빼놓지 않고 보는 광 팬이 됐지요.

워큰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바로 킹 오브 카리스마(아벨 페라라는 그에게 킹 오브 뉴욕이란 칭호를 헌정했지만...)라고 할 수 있을 것같습니다. 한국에 최민수가 있다면, 할리우드엔 크리스토퍼 워큰이 있는 셈이죠.

43년생이니까 올해 우리나이로 꼭 환갑이시네요. 나이때문인지 지난해 스티븐 스필버그의 캐치 미 이프 유 캔에서는 사기꾼 아들을 감싸는 아버지같은 가정적인 역도 맡았지만, 워낙 강한 이미지 탓인지 독특한 분위기를 풍기는 것은 어쩔 수 없더군요.

배우와 감독들 중에는 유난히 궁합이 맞는 커플이 있습니다. 이런 경우를 흔히 ″어떤 배우는 어떤 감독의 페르소나다″라고 표현하죠.
클라우스 킨스키가 파스빈더의 페르소나이고, 로버트 드 니로가 마틴 스코세즈의 페르소나인 것처럼 말이죠.

크리스토퍼 워큰은 40년이 넘는 긴 배우 활동동안 수많은 감독들과 작업을 했는데, 그중에서도 궁합이 제일 잘 맞는 감독을 꼽는다면 단연 B급 갱스터 누아르 영화의 거장 아벨 페라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워큰의 퀭한 듯하면서도 광기 넘쳐흐르는 눈빛,그리고 심장을 얼릴듯한 냉기가 뿜어져나오는 무표정 연기가 가장 생생하게 살아날 때는 바로 아벨 페라라 영화들 속에서라고 생각합니다. 그의 필모그래피 중 걸작으로 꼽고 싶은 것도 단연 페라라의 작품들이구요.

페라라의 킹 오브 뉴욕(90년작)에서 워큰은 집행유예 출소 후 구역탈환을 위해 혈투를 벌이는 뉴욕 밤세계의 황제로 출연했고, 어딕션(95)에서는 인간의 피를 빨지 않고도 흡혈귀로 살아남는 방법을 터득한 매우 지적인 흡혈귀를 연기했으며, 퓨너럴(96)에서는 비명횡사한 막내동생의 살인자를 찾아다니는 마피아 갱스터 맏형으로 등장해 강렬한 연기를 펼쳤습니다.
페라라는 워큰에 대해 ″미세한 몸의 움직임으로도 엄청난 힘이 느껴지는 배우″라고 평했다죠.
그밖에 게리 플래더의 당신이 죽을 때 덴버에서 해야할 일(95)에서 갱단의 보스나, 수어사이드 킹(97)에서 조무라기 대학생 5명에게 어이없이 납치되는 마피아 보스, 팀 버튼의 슬리피 할로우(99)에서 목없는 밤의 기사 역 등은 페라라 영화들을 통해 만들어진 음울하고 냉혹한 이미지의 연장선에 있는 작품들라고 할 수있습니다.
최근작으로는 아메리칸 스윗하트에서 영화기자들을 황당하게 만드는 미치광이같은 영화감독으로 카메오 출연했구요.
이같은 영화들 덕분에 저같은 광 팬들은 화사하게 빛나는 대낮의 햇빛과 워큰을 연결한다는 것 자체가 상상이 가지 않는답니다.

미국 영화 속에서 워큰은 사실 타이프 캐스트(한번 굳혀진 이미지를 가지고 반복적으로 비슷한 역할에 계속 캐스팅되는 방식)의 대표적인 배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캐치 미의 아버지 역같은 것도 있지만, 마피아 두목하면 크리스토퍼 워큰을 자동적으로 연상하게 될 정도이죠.

그런데도 신기한 것은 매번 비슷한 배역에 비슷한 이미지를 보게돼도, 워큰의 그 강렬한 카리스마 앞에 무기력하게 항복하고 만다는 것이죠. 수어사이드 킹에서 의자에 꽁꽁 묶인 상태에서도 자신을 납치한 대학생들을 심리적으로 좌지우지했던 것처럼, 워큰은 극장 의자에 앉아있는 관객을 자신만의 독특한 매력으로 무장해제 시켜버리고 맙니다. 최민수의 카리스마가 희화화되기 일쑤인 반면, 워큰의 카리스마는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시들지 않는 것같습니다.

워큰의 최신작은 니콜 키드만 주연의 스탭포드의 아내들입니다. 예전에 이 영화를 보신 분들은 기억하겠지만, 어느날 한가로운 교외주택가로 이사온 한 주부가 한결같이 완벽한 현모양처인 동네 주부들로부터 이질감을 느꼈는데 알고 보니 전부 외계인들이었다는 내용이죠. 

워큰이 어떤 역할로 출연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벌써부터 궁금해지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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