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여우의 세상 이야기/내가 본 세계

BBC를 쑥대밭 만든 지미 새빌 스캔들

bluefox61 2012. 10. 29. 19:39

85년 역사를 지닌 공영방송의 상징, BBC가 창립이래 최대 위기를 맞고 있다.지난해 사망한 인기 프로그램 진행자 지미 새빌이 40여년에 걸쳐 수백명의 아동 및 여성들을 성폭행한 사실이 뒤늦게 폭로된데다가,  BBC 고위층이 이런 사실을 알고도 고의적으로 은폐하려던 정황이 드러나면서 공영방송으로서 생명과도 같은 국민신뢰에 막대한 타격을 입고 있기 때문이다. 



가뜩이나 BBC를 눈엣가시처럼 여겨온 보수정치인들을 이 참에 BBC의 시스템을 근본적으로 개혁해야한다며 공세를 펼치고 있다. 이번 사태가 과연 BBC의 미래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 전세계가 관심깊게 지켜보고 있다. 

 

▶BBC 은폐의혹 = 영국의 국민MC 새빌이 수십년에 걸쳐 미성년 소년소녀와 여성들을 성폭행했다는 사실은 지난 3일 민영방송 ITV가 방송한 다큐멘터리를 통해 밝혀졌다. 

1970년대에 BBC 분장실에서 새빌과 록가수 게리 글리터가 10대 소녀 2명을 성폭행을 당했다는 증언이 나왔다. 심지어 BBC의 한 전직 직원의 경우 성폭행 대상이 될 소녀들을 조달하는 임무를 맡았다는 보도까지 나왔다. 방송이 나간후에야 이뤄진 경찰조사에 따르면 최소 200명이 새빌에 의해 성폭행, 성추행을 당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문제는 ITV 다큐가 방송되기 이전인 지난해 11월 이미  BBC 보도국의 '뉴스나이트'팀이 자체적으로 새빌의 비행을 폭로한 탐사보도물을 제작 중이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책임PD 피터 리펀은 갑자기 "증거가 충분치 않다"며 제작중단 지시를 내렸다. 취재진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결국 보도물은 불방이 됐다. 

이번 사태가 벌어진 후, BBC 안팎에서는 당연히 고위층이 개입해 방송을 막은 것이 아니냐는 비난이 쏟아졌다. 헬렌 보덴 보도국장은 물론 그 윗선까지 새빌의 비리를 알고도 고의적으로 덮었다는 것이다. 조지 엔트위슬 BBC 사장은 23일 하원청문회에 출두해 최대 10명의 전·현직 직원을 대상으로 내사를 벌이고 있다고 말했다. 리펀은 이미 직무해임이 된 상태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내부 비리에 관대한 BBC 조직문화란 지적이 나오고 있다. 엔트위슬 사장 역시 23일 의회 청문회에서 "내부 문제를 체크하지 못한 BBC 조직문화에 문제가 있다"고 시인했다.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는 24일 "전국민이 충격을 받은데다가 갈수록 상황이 악화하고 있다"면서 "한점 의혹없는 수사"를 국민에게 약속했다.


▶바람잘 날 없는 BBC  = 1차세계대전의 상흔이 아직 남아있던 1927년에 창립된 BBC는 대공황, 2차세계대전 등 국가적 위기때마다 영국 국민들을 하나로 통합하는 한편 세계 구석구석에 뉴스를 전달하는 역할을 수행해왔다. 

그러나 찬사만 받았던 것은 아니다. 최근들어 겪었던 최대위기는 2003년 이라크 대량파괴무기(WMD) 정보왜곡 논란 속에 BBC 앤드류 길리건 기자가 무기사찰 전문가 데이비드 켈리 박사를 익명으로 인용하며 토니 블레어 정부를 맹비난했다가, 정부와 BBC 간의 갈등 사이에 끼어 시달리던 켈리박사가 자살한 사건이었다. 정부와 보수언론들은 "국민세금으로 운영되는 BBC가 오히려 정보를 과장해 한 사람을 죽음 속으로 몰아넣었다"고 비난을 쏟아냈다.
 

2년 뒤, BBC 경영진은 경영합리화를 이유로 약 4000명을 감원한데 이어, 다시 2년뒤인 2007년에는 향후 6년동안 2500개의 일자리를 없애 1만8000명을 감원하는 계획을 확정했다. 일각에서는 BBC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정부가 BBC 경영진에 압력을 넣어 조직축소 보복을 가했다는 분석을 제기하기도 했다.  2010년 캐머런 총리 역시 긴축재정을 이유로 BBC 월드서비스 지원삭감을 발표했다.
 

BBC는 현재 총직원 2만3000명(보도국 8000명) ,연간 예산 36억파운드( 약6조3616억원)에 이르는 거대조직이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24일자 기사에서 "BBC내 조직들이 왜 지금처럼 한지붕아래 있어야하나"란 의문을 제기하는 목소리가 적지 않다고 지적했다. 새빌 사태가 어떤 식으로 수습되든, 막강한 권위를 자랑해온 BBC로선 이미지 추락 등 만만치 않은 후폭풍을 겪게 될 전망이다. 

 

 


지미 새빌(1926∼2011년)은 40여년동안 영국 공영방송 BBC의 간판 진행자로 활동하는 한편 자선활동에 헌신해 국민의 사랑과 존경을 받았던 인물이다. 유쾌하면서도 다소 괘짜스러운 이미지와 유머감각으로 정평났던 그는 영국 대중문화와 BBC를 대표하는 아이콘이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리즈에서 7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새빌은 50년대말 룩셈부르크의 한 라디오방송국에서 디스크자키를 맡아 발군의 실력을 보인 것을 계기로 BBC에 발탁, 1964년부터 대중가요 인기순위 프로그램인 '톱 오브 팝스(Top of Pops)' 등 다양한 음악프로그램의 진행을 맡았다. 영국 대중음악계가 비틀스, 롤링스톤스 등 걸출한 아티스트들을 배출하며 전성기를 맞은 것과 때를 같이해 새빌의 방송 경력과 인기 역시 수직상승했다. 

새빌을 대표하는 또하나의 프로그램은 '지미 윌 픽스 잇(Jimm'll Fix It)'이다. 1975년부터 1994년까지 20여년동안 BBC에서 방송됐던 이 프로그램을 보고 자라지 않은 영국인이 없다고 할 만큼, '지미 윌 픽스 잇'은  영국인들에겐 어린시절의 추억과 마찬가지이다. 시청자들의 소원을 진행자 새빌이 직접 이뤄주는 형식의 프로그램으로, 출연자는 대부분 어린이들이었다.
 

새빌은 자선활동가로도 존경받았다. 특히 돈이 없어서 치료를 받지 못하는 사람이 없도록, 병원을 통해 저소득층 환자를 지원하는데 매우 헌신적이었다. 이같은 활동덕분에 1971년 여왕 엘리자베스 2세가 수여하는 대영제국훈장과 1996년 작위를 수여받았으며,교황 요한 바오로 2세로부터 교황기사단 단장으로 임명되는 엄청난 영광도 누렸다.
 

새빌은 평생 결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살았다. 한창 방송활동을 하던 시절에는 그의 사생활이 외부에 알려진 적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80년대중반 은퇴한 이후 성추문이 조금씩 흘러나오기 시작했으며, 1990년대말 일부 타블로이드신문들이 새빌의 아동성도착증 설을 보고하기 시작했다. 

당시 새빌은 " 사실 나는 아이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고 집에 컴퓨터도 없어서 음란동영상이 뭔지도 모른다"면서, 아동과 연루된 일체의 설을  "사악한 타블로이드가 퍼트리는 루머"로 일축했다. 하지만 30여년전 성추행 사건과 관련된 혐의로 2007년 경찰조사를 받은 적이 있고, 2008년 타블로이드 신문 더 선이 또다시 대대적으로 보도를 하는 등 새빌의 말년은 아동성추문으로 얼룩졌던 것이 사실이다.
 

새빌은 2011년 10월 29일, 85회 생일을 이틀 앞두고 집에서 시신으로 발견됐다. 사인은 폐렴 후유증으로 발표됐다. 병원 장례식장에는 수천명이 찾아와 머리를 숙였고, 교회에서 성대하게 열린 장례식에도 많은 사람들이 참석해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