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여우의 세상 이야기/내가 본 세계

인물로 본 가자사태

bluefox61 2012. 11. 21. 11:44

이스마일 하니야(1963년생) .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총리

 

현재 가자지구를 실효 통치하고 있는 하마스 정권의 총리이다. 이스라엘이 점령한 가자에서 태어난 하니야는 1차 인티파타에 참여해 이스라엘에 체포, 1989년부터 1992년까지 수감생활을 했다가 석방된 후 하마스의 설립자이자 정신적 지도자인 야신과 함께 레바논으로 추방됐다 이듬해 가자로 돌아와 하마스의 지도자로 급성장했다.



하니야가 가자지구의 최고지도자가 된 것은 2006년 1월 25일 팔레스타인 총선이후이다. 당시 총선에서 하마스는 132석 가운데 73석을 차지하며 40년 동안 집권해온 파타를 누르고 승리함으로써 집권당이 됐다. 하마스 승리는 야세르 아라파트때부터 수십년간 이어져온 파타당의 부패와 관료주의에 넌덜머리가 난 팔레스타인 인들이  반 이스라엘 무장투쟁을 벌이면서 한편으로는 사회운동을 병행, 가난한 주민들에게 교육·보건 혜택을 주고 식량 배급까지 하는 등 사실상 정부 역할을 수행해온 하마스를 택한 결과였다. 

 

그러나 하마스 승리 이후 같은해 6월 이스라엘이 가자를 공습하고 국제사회의 지원중단 압박이 가중되면서 하마스 정권의 위기가 초래됐고,  하마스와 파타는 연정 수립과 붕괴를 반복하다 2007년에는 급기야 내전이란 최악의 국면을 맞았다. 2006~2007년 이러한 혼란을 겪으며 하마스는 가자 지구를, 파타는 요르단강 서안을 장악하고 상대편을 각각 몰아냈다. 현재 두 정파는 이스라엘 영토를 사이에 둔 채 팔레스타인을 사실상 분리 통치하고 있다.

 

하니야는 무장조직이었던 하마스를 정치조직으로 변신시킨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팔레스타인 국민들 사이에서의 지지도는 압바스를 능가할 정도이다. 2011년 '중동의 봄' 이후 하니야는 외교노선에서도 변화를 보이고 있다. 가장 중요한 파트너는 이집트의 무슬림형제단이 이끄는 민선 정부. 이집트 새 정부가 하마스의 이집트 사무실 설치를 허용하는 한편 시나이반도와 가자지구 사이의 통행(라파 검문소) 제한을 완화했다. 게다가 2011년 10월 하마스와 이스라엘 사이의 수감자 맞교환 당시 이집트 정부가 중요한 막후 역할을 하면서, 하마스의 국제적 고립이 완화될 것이란 기대감도 높아졌었다. 

 

하마스와 이란 간의 관계도 모종의 변화를 겪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란은 여전히 하마스의 주요 무기공급 국가이다. 이번 가자사태에서 이스라엘의 강공은 이란 미사일을 공급받은 하마스가 텔아비브 등 이스라엘 주요지역을 타격할 수있는 화력을 갖춘데 따른 것이란 분석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하마스는 시리아 사태에서 알아사드를 지지하라는 이란 정부의 압력을 거부하고 사실상 중립을 지켜왔다. 2011년 8월 이란은 하마스가 아사드를 지키는 것을 거부하자 3억 달러에 달하는 원조금을 삭감했다. 게다가 하마스는 어떤 형태의 이스라엘과 이란의 전쟁에도 이란에 군사적 지원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


칼레드 마샬(또는 마샤알.1956년생 ) . 하마스 정치국 위원장 또는 하마스 최고지도자


22일 전격적으로 체결된 이스라엘과 하마스간의 휴전 협상에서 하마스 측 대표로 나선 사람은 가자지구의 이스마일 하니야 총리가 아니라 하마스 정치국 위원장 칼레드 마샬이었다. 하니야와 마샬은 같은 하마스 지도자들이지만, 한사람은 가자지구의 최고통지자로 , 또 한사람은 가자를 포함해 중동 각지에 있는 하마스 조직전체를 실질적으로 대표하는 사람으로 인식돼있다. 동지이자, 동시에 경쟁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팔레스타인 라말라 외곽 실와드에서 태어난 칼레드 마샬은 요르단으로 이주했다가 쿠웨이트에서 쿠웨이트대에 다니던 중 야세르 아라파트와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의 지배에 저항하는 운동에 투신했고, 1987년 하마스가 창설된 이후에는 쿠웨이트를 떠나 요르단을 거쳐 카타르로 이주했다가 시리아에 정착, 지난 2월 시리아 내전사태가 격화하면서 다시 카타르로 거주지를 옮기는 등 중동 주요지역을 옮겨다니며 살아온 사람이다. 

따라서 하마스 강경파이지만, 요르단강 서안의 압바스나 가자지구의 하니야에 비해 국제감각을 갖추고 있다고도 볼 수있다. 이스라엘 병사 길라드 샬리트의 석방과 팔레스타인 죄수 맞교환 협상을 막후 진행한 것도 마샬이었다. 하마스 정치국의 위원장에 선정된 것은 지난 2004년, 압델 아지즈 알 란티시가 암살당한 후였다.

 

지난 2월 외신들은  팔레스타인의 양대 정파인 파타와 하마스가 오는 5월 총선을 준비할 단일 임시정부 구성안에 전격 합의했다고 보도했다. 마무드 압바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과 하마스 지도자 칼레드 마샤알은 이날 카타르 국왕의 중재 하에 이같은 내용의 '도하 선언'에 서명했다. 하마스와 파타는 앞서 지난해 4월에도  단일 정부를 수립한다는 원칙에 합의했으나 대화 과정에서 묵은 감정을 드러내거나 임시 내각의 인적 구성 문제를 놓고 날카롭게 대립하기도 했다.

압바스는 당초 살람 파야드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총리를 임시 총리로 세우자고 제안했으나 하마스는 이를 거부했고, 이에 따라 압바스와 마샤알 간 대화가 이어져 오다가 결국 압바스를 총리로 하는 안에 합의했다.지난 2006년 하마스의 압승으로 끝난 총선 이후 하마스와 파타는 연정을 수립했으나 압바스가 내각을 전격 해산하면서 하마스 출신 이스마일 하니야 총리가 쫓겨나고 하마스가 가자지구를 무력으로 장악하면서 2007년 6월 '분단'이 시작됐다.

 

지난 9월 마샬은 하마스 최고지도자 은퇴의사를 나타내 관심을 모으기도 했다. 그는 이집트 카이로에서 열린 고위급 회담에서 가자지구 이슬람 지도부의 잦은 정책 변화에 지친다면서 지도자 선거 불출마를 선언했다고 소식통들이 전했다. 2월 도하선언을 한 이후 마샬은 가자지구 지도부와 내분을 겪어온 것으로 알려졌다. 마샬의 자리를 대신할 차기 지도자로는 가자지구의 하마스 지도자이자 총리인 이스마일 하니야와 1990년대 초반 하마스 지도자를 지낸 무사 아부 마르주끼가 물망에 오르고 있다. 
 


베냐민 네타냐후 ( 1949년생).이스라엘 총리

 

이스라엘의 강성 총리이다. 리쿠드당 소속으로 1996~99년 9대 총리를 지냈던 그는 2009년에 다시 총리로 컴백했다. 애칭은 '비비'.

이스라엘이 건국된 이후인 1949년 텔아비브에서 태어났다. 대학 교수인 부친을 따라 1963년 미국으로 건너갔으며, 이후 6년간 군복무를 한 것을 제외하고는 1980년대 후반 이스라엘 정계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거의 미국에서 활동하였다. 매사추세츠 공과대학교와 하버드 대학교에서 공부하였고, 보스턴 컨설팅 그룹에서 근무하였다. 1982년에는 워싱턴의 주미 대사관에서 근무하였고, 1984년 ~ 1988년 주 UN 대사를 지냈다. 1988년 국회의원으로 선출되었고, 이츠하크 샤미르 정권에서 각료로 재직했다.



1993년 리쿠드당 당수로 선출된 그는 1996년 총선을 치르게 된다. 총선 직전 팔레스타인의 소행으로 보이는 테러 사건이 연달아 일어나면서, 네타냐후는 온건파인 시몬 페레스 당시 총리를 공격하였고, 결국 페레스를 1% 포인트 차로 제치고 총리로 당선됐다. 당시 이스라엘 역사상 최연소 총리였고, 또한 이스라엘 건국 이후 이스라엘 영토 안에서 태어난 최초의 총리였다.

 

총리로 재직하면서 팔레스타인에 대한 적대적인 감정을 드러내고 야세르 아라파트와 대립하기도 했으나, 미국과 요르단의 중재로 와이리버 협정을 체결하여 영토분쟁을 종식시킬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협정 체결은 그를 지지하던 우파의 신임을 잃게 된 결과를 초래했고, 개인적인 문제와 부패 스캔들 등으로 구설수에 올라 1999년 총리 선거에서 노동당의 에후드 바라크에게 패하여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이에 그는 리쿠드당의 당수직도 내놓고 잠시 정계에서 물러났다.

 

그 후 아리엘 샤론 정권의 각료로 참여하게 되어, 2002년 ~ 2003년 외무장관으로 재직하였고, 2003년 재무장관으로 임명되었다. 또한 아리엘 샤론이 맡고 있던 리쿠드 당 당수직도 다시 노리게 되었다. 

그런 가운데 2005년 8월 9일 샤론 총리의 가자 지구 유대인 정착촌 철수 계획에 반대하며 재무장관직을 사임하였다. 그리고 샤론 총리가 리쿠드 당을 탈당하고 카디마 당을 창당하자 그 해 12월 리쿠드 당 당수직 선거에서 다시 당수로 선출되었으며, 2006년 총선에 출마하였다. 총선 결과 리쿠드 당은 원내 제1당의 자리를 카디마당에 빼앗겼으며, 총리는 카디마당의 에후드 올메르트가 선출되었다.

 

이후 네타냐후는 자신이 다시 총리가 되면 이란 핵시설에 선제 공격을 하겠다고 발언하는 등 초강경 우파의 행보를 이어갔다. 그 후 이스라엘 정국은 경제위기, 집권당인 카디마 당의 부패 스캔들, 가자 지구 문제 등으로 혼란이 계속되었다. 비리에 연루된 에후드 올메르트 총리 이후 새 정부 구성이 이루어지지 못하자, 2009년 2월, 조기 총선이 실시됐다. 

가자 사태가 쟁점이 된 총선 기간 중에도 강경 우파 행보를 이어갔으며, 이에 호응하는 유권자들의 반응에 카디마 당에 대한 국민들의 반감도 작용하여 그와 리쿠드 당에 대한 인기가 높았다. 총선 결과 그가 이끄는 리쿠드 당은 카디마 당에 1석 차로 패했으나, 그는 에후드 바라크 전 총리가 이끄는 노동당 등과 연정을 구성하여 3월 31일 총리 자리에 올랐다.  

이스라엘 역대 정부가 팔레스타인 정책에 있어 강성기조이지만, 네타냐후는 그 중에서도 초 강성파로 분류되고 있다. 2009년 가자를 침공해 수많은 인명피해를 초래했던 것이 대표적. 네타냐후는 팔레스타인 뿐만 아니라 이란 핵문제에 있어서 수차례 폭격을 위협해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의 관계가 껄끄러운 상태이다.

 

 

버락 오바마 (1961년생 ). 미국 대통령

 

오바마 대통령이 2009년 취임하면서 제시한 중동 및 이슬람 권에 대한 정책의 핵심은 이라크전 미군철군, 아프가니스탄전 마무리, 이란 핵문제 해결, 그리고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갈등해소였다. 1기를 마무리한 현 시점에서 이중 완수된 것은 이라크에서 미군철군 하나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12년 7월 백악관에서 '미국-이스라엘 안보강화협력법에 서명하는 오바마 대통령   


이-팔문제에 대한 오바마의 야심을 보여준 것은 2009년 1월 취임 직후 조지 미첼을 중동특사로 임명한 것이었다. 1월말 팔레스타인을 방문한 미첼 특사는  마무드 압바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과 회담 후 기자회견에서 이스라엘이 가자지구 국경 봉쇄를 해제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그는 “가자지구의 무기 밀수를 성공적으로 차단하려면 합법적인 물품의 유통을 보장하는 장치가 반드시 마련돼야 한다”면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독립국가가 공존하는 ‘두 국가 해결안’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다  그러나 2년간의 활동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성과가 나오지 않자, 결국 조지 미첼은 2011년 자진사퇴했다.

 

오바마는 지난 2011년  중동정책 연설을 통해 중동판 마셜정책 외에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국경선은 지난 1967년 경계선을 기준으로 해야 한다”면서 새로운 국경선 개념을 표명, 상당한 파장을 낳았다. 1967년 경계는 이스라엘이 3차 중동전쟁을 통해 동예루살렘, 요르단강 서안, 가자 등을 점령하기 이전 상태를 의미한다.팔레스타인이 줄곧 주장해왔던 것과 유사하다. 

반면 이스라엘이 주장하는 것은 ‘2004년 경계’다. 2004년 미국은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과의 평화협정에 따라 요르단강 서안에서 1967년 당시 경계를 넘어 주요 정착촌을 유지할 수 있도록 약속했다. 1967년 경계를 무력화한 것이다.이스라엘 정부는 성명을 통해 오바마의 제안이 2004년 미국의 약속을 깨트린 것이라고 반발했다.

 

네타냐후는 2011년 5월 워싱턴을 방문해 상하원 합동연설을 하면서 그야말로 반오바마 발언을 쏟아내 공화당의 열렬한 환영을 받기도 했다.

미 의원들은 이날 네타냐후 총리의 40분간에 걸친 연설 도중 29차례나 기립박수를 쳤다. 미국 언론들에 따르면 의원들은 하도 자주 일어나는 바람에 거의 앉아있을 때가 없었을 정도였다.  네타냐후는 시종일관 자신 있는 모습으로, 때때로 양손을 흔들거나 들면서 중동평화 정책에 대한 자신의 구상을 의원들에게 설명했다. 

 

오바마는 지난 2011년 프랑스 칸에서 열린 G20 정상회담 중 마이크가 켜진것을 모르고 사르코지 대통령과 네타냐후에 대한 속마음을 드러내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사르코지가 "네타냐후를 못 참겠다,그는 거짓말쟁이다"라고 불만을 마구 털어놓자, " 매일 그를 상대하는 나는 어떻겠냐"고 했던 것. 오바마는 지난 9월 유엔총회 참석차 미국을 방문한 네타냐후 측이 양자회담을 제안했지만 시간이 없다면서 만나주지 않기도 했다.

 

하지만, 과연 오바마가 네타냐후와 거리를 유지하고 팔레스타인에 조금 더 가까운 정책행보를 보이느냐하면 , 그렇지만도 않다. 미국은 이번 이스라엘의 하마스 군지도자 표적살해와 가자공습에 대해 "자위권" 발동으로 지지했고, 이집트의 요구로 열린 유엔 안보리에서도 이스라엘에 대해 아무런 움직임을 나타내지 않았다. 게다가 재선캠페인이 한창이던 지난 7월  오바마는 밋 롬니 공화당 대통령후보가 이스라엘을 방문하기 바로 전날, 워싱턴에서 이스라엘의 단거리 미사일방어시스템인 아이언돔의 강화를 위한 7000만달러 지원을 발표하기도 했다.

 

 

마무드 압바스 (1935년생) .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대통령)

 

팔레스타인의 온건파 인물. 2005년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해 대통령이 된 이후 무장투쟁 종식을 선언했다. 지난해 유엔 옵저버 자격에 도전했다가 실패한뒤 유네스코 정회원국 승인을 이끌어냈고, 올해 또다시 유엔 옵저버국에 도전하고 있는 등 무력투쟁보다는 국제외교를 통해 팔레스타인의 입지를 다지는데 더 주력하고 있다. 

이같은 정책으로 인해 강경파들의 비판을 받고 있으며, 여기에 최대정파인 파타 당의 고질적 부패와 관료주의에 대한 국민들의 환멸 등이 겹쳐, 팔레스타인 내부적으로는 그리 인기가 높지 않은 편이다. 일각에서는  '미국의 하수인'이란 비판까지 제기하고 있다.



1935년 영국 위임통치령이었던 팔레스타인 사페드에서 태어난 압바스는 이집트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모스크바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58년 아라파트와 함께 파타운동을 창설, 아라파트가 PLO 의장을 맡고 있는 동안 오른팔 노릇을 했다.  

해외 망명 시절 아라파트와 더불어 요르단·레바논·튀니지 등지를 전전하며 팔레스타인의 대의명분을 설파하며 동지들을 넓혀나갔다. 아랍 지도자들·정보기관장들과 폭넓은 인맥을 쌓아온 덕에 PLO 활동자금 모집책으로 뛰어난 역량을 발휘했고, 사무총장 자리에까지 이르렀다.
 
그가 실용주의·온건노선을 걸어온 것은 꽤 오래전부터이다. 이·팔 평화협상이 본격적인 궤도에 오르기 전인 1970년대에 이스라엘 온건파와 대화를 주창했고, 1993년 이·팔 공존의 청사진을 담은 오슬로 평화협정도 사실상 그의 작품이었다는 분석이 많다. 그는 팔레스타인의 '인티파다(무장봉기)'에 대해 "역효과만을 낳을 뿐"이라고 공개 비판하기도 했다. 

그의 온건 노선은 지금까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양측의 강경 목소리에 눌려 제 입지를 찾지 못하고 있다. 압바스의 위상은 2006년 총선이후 가자지구를 기반으로 한 하마스와의 치열한 갈등과 반목을 겪다가 이스마일 하니야가 가자총리를 선언하면서,  라말라를 중심으로 한 요르단강 서안 지역만을 통치하는 반쪽짜리 대통령으로 추락하게된데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이번 이스라엘의 가자공습으로 요르단강 서안에 가자주민들에 대한 연대의식이 다시 높아지고 있다는 외신보도가 나오고 있다. 현재까지 압바스 정부가 어떤 움직임을 나타내고 있는지는 별로 알려지지 않고 있다. 사실 , 압바스가 할 수있는 일이 없는게 지금의 현실이다.

 


하산 나스랄라( 1960년생) .레바논 헤즈볼라 지도자

 

현재 이슬람권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인물 중 한명. 일각에서는 나세르 이집트 대통령에 비유하기까지 한다.  미국 등 서방세계에서는 테러조직 지도자로 보지만, 이슬람권에서는 저항운동가의 반열에 올라있다. 팔레스타인 하마스가 정당으로 변신했듯이, 헤즈볼라도 2008년 총선에 정당으로 참여해 연정을 구성하는 등 정치조직으로 변신했는데, 그 뒤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 바로 하산 나스랄라이다.



나스랄라는 1960년 8월 31일 레바논 베이루트에서 태어났다. 1975년 레바논 내전 당시 조상들의 고향인 레바논 남부의 알 바주리야로 옮긴 뒤 당시 시아파 정치조직인 ‘아말운동’에 가입했다. 그는 이란에서 이슬람 공부를 한 뒤 당시 헤즈볼라 지도자였던 아바스 알 무사위가 세운 학교에서 공부하기 위해 레바논으로 돌아왔다. 이스라엘이 1982년 레바논을 침공하자 나스랄라는 22살의 나이에 헤즈볼라에 가입해 레바논 남부지역과 베카계곡에서 항전을 벌였다. 

그는 10년 뒤인 1992년 알 무사위에 이어 헤즈볼라 최고지도자에 올랐다. 그의 지도하에 헤즈볼라는 이스라엘과의 끈질긴 투쟁 끝에 2000년 이스라엘이 레바논 남부로부터 철수케 하는 데 성공했다. 이 때문에 나스랄라는 레바논은 물론 아랍국가에서 이스라엘을 물리친 영웅으로 떠올랐다. 그는 또 2004년 이스라엘 기업인과 사망한 병사 3명을 430명의 헤즈볼라 및 팔레스타인 수감자와 맞교환한 일은 그가 투쟁력뿐만 아니라 협상력도 갖춘 지도자임을 보여줬다.

 

나스랄라가 이끄는 헤즈볼라는  2008년 총선에서 돌풍을 일으키며 연정에 참여, 각료 30석 중 11석을 장악했지만 2011년 지난 1월 사드 하리리 당시 총리의 정책에 반기를 들며 일괄사퇴를 감행해 연정을 붕괴시켰다. 라피크 하리리의 아들인 사드 하리리가 아버지 암살사건의 주범으로 헤즈볼라를 지목하면서 유엔특별재판소(STL)에 수사 확대를 요청했기 때문이었다. 

라피크 하리리는 약 15년에 걸친 내전 종식 후인 1992년부터 1998년까지, 2000년부터 암살 때까지 두 차례 총리를 역임했던 인물이다. 국가 재건을 위한 서방 지원과 시리아 점령군의 철수를 추진했던 그는 2005년 2월14일 차량폭탄테러로 22명과 함께 사망했는데, STL은 공개한 공소장에서 용의자 4명 모두 무장조직에서 정당으로 변신한 헤즈볼라 소속이라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나스랄라는  “STL이 구체적인 증거 없이 주변 정황만으로 4명을 범인으로 몰아가고 있다”고 맹비난한바있다. 연정붕괴 이후 레바논에서는 장기간 정치혼란이 이어졌다가, 2011년  6월 통신재벌 출신 정치인 나지브 미카티의 총리 취임을 헤즈볼라가 동의하면서 정부가 겨우 구성될 수 있었다.

 

이스라엘은 2006년 헤즈볼라가 자국 군인 2명을 납치해갔다는 이유로 레바논 침공을 단행했다. 이스라엘은 70년대에도 레바논 내전에 개입했다가 흐지부지 철군한 적이 있는 등 수차례 레바논을 공격한 전력이 있다. 그런만큼  헤즈볼라는 하마스와 반이스라엘 연대를 형성하고 있다. 여기에 시리아 알아사드 정권까지 합세했던 것이 사실이다. 

 

시리아 사태가 장기화되고 있는 국면에서 시리아-레바논 국경지역/ 이스라엘-시리아 국경에서 각각 충돌이 벌어진 가운데 이번 가자침공사태까지 악화돼 헤즈볼라가 개입하게 되면 중동지역이 그야말로 불바다로 변하는 최악의 시나리오도 배제하기 어렵다. 물론 현재까지 헤즈볼라는 가자사태 개입에 신중한 태도를 나타내고 있다.

 

최근 AP통신은 헤즈볼라가 가자사태에 대한 무력 개입에 소극적인 이유는 우선 국내에서 만만찮은 도전에 직면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그러잖아도 지난 11월 이란산 무인기를 이스라엘로 들여보냈다가 '괜히 이스라엘을 자극하느냐'는 역풍을 맞았기 때문에 가자사태에 발을 들여놓을 경우 국내에서 강력한 반전 여론에 직면할 우려가 있다.

레바논에서 헤즈볼라는 서방의 지원을 받던 이전 정부를 몰아냈으나 나라 자체가 종파와 정파간 이해 관계가 워낙 첨예하게 엇갈려 있어 헤즈볼라도 갈수록 거세게 무장해제 압력을 받고 있는 형편이다.또 이슬람 시아파 계열인 헤즈볼라가 소수 시아파 정권과 다수 수니파 반군이 싸우는 시리아 내전에 엮여 있기 때문에 이전과 같은 반이스라엘 공동전선을 주도하기 어려운 형국이다.

헤즈볼라는 근 4만명의 희생자를 낸 시리아 아사드 정부의 강력한 후원자로 여겨져 이전과 달리 수니파가 다수인 중동지역에서 곱지 않은 시선을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