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여우의 영화 이야기/내가 본 영화들

유하의 '비열한 거리'

bluefox61 2006. 6. 26. 14:55

갱스터 혹은 조직폭력배를 영화 속에서 다루는 방식은 크게 두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식이고, 또하나는 마틴 스코세즈식이다.

 

코폴라식은 ‘대부’로 대표되는 비장미가 특징이다. 여기에서 조폭은 폭력과 불법을 일삼는 범죄자들이지만, 보통사람들이 범접하기 힘든 카리스마와 우직함, 그리고 의리를 생명처럼 소중하게 여기는 남성성의 소유자이다. 

 

하지만, '비열한 거리‘ ’ 좋은 친구들‘로 대표되는 스코세즈의 조폭영화에서는 코폴라가 ’대부‘에서 창조한 고상하고 과묵한 남성상을 찾아보기 힘들다. 대신 상스럽고 수다스러우며, 감정기복이 심하고 작은 이익에 배신하는 주변부 인간들뿐이다.

 

두가지 유형에 하나를 더한다면, ’저수지의 개들‘과 ’킬빌‘로 대표되는 퀜틴 타란티노를 들 수 있겠다. 그의 조폭영화는 상상을 초월하는 유혈낭자한 폭력성이 특징이지만 눈을 감고 싶을만큼 끔찍해 오히려 비현실적이며, 무엇보다도 유희적이다. 



유하 감독의 새영화 ‘비열한 거리’는 제목자체에서 드러나듯 , 조폭을 바라보는 스코세즈의 시선과 맥을 같이하고 있는 작품이다. 거리에는 정의와 사랑 따위는 물론이고 의리나 형제애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살기위해서는 타인을 이용하고 배신하며, 남을 죽여야 내가 생존할 수 있는 비열함만이 있을뿐이다.

 

‘비열한 거리’는 불우한 가정출신의 젊은 청년이 조폭세계에서 생존하기 위해 몸부림치다 몰락한다는 매우 익숙한 조폭영화의 공식을 기둥으로 하고 있다. 사실 이런 공식은 이창동감독의 ‘초록물고기’나 곽경택의 ‘친구’ 등을 통해 관객들이 이미 익숙하게 경험해왔던 것이다.

 

 ‘비열한 거리’는 언뜻 보기에 상투성을 답습하고 있는 듯 하지만, ‘초록물고기’의 가족에 대한 감상성이나 ‘친구’의 복고주의 또는 비장미를 과감히 거부하고 있다는 점에서 기존의 한국 조폭영화들로부터 한걸음 앞으로 나아간다.

 

특히 유하 감독은 이 영화에서 조폭세계의 넘버 쓰리인 주인공 병두(조인성)의 몰락을 통해 자본과 권력의 폭력성뿐만 아니라 소위 지식인으로 호칭되는 문화권력의 비열함까지 통렬하게 고발하고 있다.

 

병두는 병들고 가난한 홀어머니와 착한 고3 여동생, 그리고 툭하면 싸움질이나 하는 말썽꾸러기 동생을 걱정하는 가장이지만, 극한 상황에 몰려을 때 ‘초록물고기’의 막동이처럼 공중전화 박스에서 수화기를 붙들고 형에게 ‘좋았던 어린시절’이 생각나냐며 흐느끼기기보다는 자신의 어깨에 올려져있는 책임감을 버거워하는 캐릭터로 등장한다. 병두 덕에 철거촌에서 번듯한 아파트로 이사온 어머니도 경찰에게 쫓기는 깡패 아들을 무조건 보듬기보다는 “당장 집에서 나가라”며 거칠게 밖으로 몰아낸다.

 

우정관계 역시 비슷하다.  ‘친구’에서 상택은 조직폭력배인 고등학교 동창 동수와 준석의 비극적인 운명을 안타까워한다. 그러나 ‘비열한 거리’에서 영화감독 지망생인 민호는 조폭영화를 만들기 위해 의도적으로 초등학교 동창생 병두에게 접근하고, 그의 약점을 잡아 자신의 성공에 이용하며, 결국에는 병두를 최악의 상황에 빠뜨리는 비열한 지식인일 뿐이다.  성공하기 위해 조직의 넘버2를 밟고 올라가는 병두와 친구를 이용해먹는 영화감독 민호, 그리고 병두를 뒤를 돌봐주겠다면서  사실은 그를 일회용 해결사로 쓰고버리는 황회장(사실은 폭력조직의 넘버1) 중 과연 누가 더 비열한가. 유하 감독은  정의도, 의리도, 동정도 없는 비열한 세상을 일체의 감상주의조차 거부한채 그리고 있다는 점에 한국의 기존 조폭영화들과 차별성을 성취하고 있다.

 

‘비열한 거리’는 유하 감독의 전작 ‘말죽거리 잔혹사’의 속편 , 또는 확장판이란 점에서도 흥미롭다. 물론 두 영화의 캐릭터가 그대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병두는 ‘말죽거리 잔혹사’에서 학내 폭력을 주도하다가 결국에는 학교 밖으로 뛰쳐나가는 우식의 10년쯤 뒤의 모습이 아닐까싶을만큼 내재적인 연관성을 갖는다. 병두의 영화 속 나이가 고등학교 졸업후 10년쯤 흐른 스믈아홉살로 설정돼있다는 점에서도 이런 상상은 제법 그럴듯해보인다. 

 

‘말죽거리 잔혹사’에서 이소룡에 열광하던 현수와 민호는 영화를 매개로 연결돼있다. 섬세한 감수성과 달리 액션영화를 사랑했던 현수는 과연 10년뒤 감독 데뷔 한번 해보려고 악전고투하면서 죄책감을 무릅쓰고서라도 친구를 이용해 성공하고 마는 민호같은 스믈아홉살이 돼있을까.

 

민호에게서는 감독으로서, 나아가 지식인으로서 자기 자신 또는 이 시대의 ‘먹물’들을  바라보는 유하감독의 통렬한 시선이 읽힌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비열한 거리’가 ‘말죽거리 잔혹사’의 미래라기 보다는 발전된 아이템이라고 설명했다. 전작이 조폭의 탄생을 이야기했다면, 이번 작품에서는 이 사회 속에서 조폭이 어떻게 소비되는지를 객관적으로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한 점의 ‘겉멋’조차 거부하고 ‘객관성’을 유지하려는  감독의 자세는 액션 신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소위 ‘합’을 맞추는 안무에 까가운 액션 대신 이 영화에는 오로지 수컷들이 뒤엉켜 때리고 맞는 처절함만 강조된다.


영화는 조폭으로서 나름대로 성공해보겠다고 몸부림쳐온 병두가 자신의 목표를 어느 정도 이뤄내기까지의 과정을 그리는데 러닝타임의 약 3분의 2를 할애하고 있다. 사실 여기까지는 드라마의 상투성이 적잖게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병두의 몰락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후반부는 바닥없이 추락하는 한 인간의 모습과 빠른전개로  관객의 감정을 휘몰아친다.

 

모든 회호리 바람이 지나간 듯한 어느날 , 황회장은 민호를 룸싸롱으로 불러 함께 술을 마신다. 그는 지나간 일을 다 잊으라한다. 언젠가 이런 자리에 동석했던 병두는 이제 없다. 그래도 세상은 아무 일없었다는 듯 굴러간다.

 

황회장은 자신의 애창곡이라면서, 앨런 파슨스 프로젝트의 노래 ‘ 올드 앤드 와이즈(Old and Wise)'를 열창한다. 늙는다는 것, 현명해진다는 것은 우리의 인생에서, 비열함 뿐인 이 사회에서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묵직한 여운을 남기는 엔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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