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1년 언론사들이 선정하는 ‘올해의 10대 뉴스’에는 이런 항목이 있었다. ‘한국 영화의 조폭신드롬’. 되돌아보니, 그해 유난히 조폭이 등장하는 한국 영화들이 많긴 많았다. ‘친구’를 시작으로 ‘신라의 달밤’, ‘조폭마누라’, ‘달마야 놀자’가 모두 한 해에 상영됐으니 말이다. 2001년 끝자락에 조폭 코미디 한 편이 더 선보였다.
‘두사부일체’. 윤제균(40)이란 신인 감독이 만든 이 영화는 다른 조폭 코미디와는 조금 달랐다. 조직의 넘버2가 고교 졸업장을 따기 위해 뒤늦게 학교로 돌아간다는 설정의 이 코미디는 사학비리에 대한 강력한 비판을 담고 있었던 것. ‘두사부일체’는 극장에 걸려 있는 동안 박스오피스 1위를 한번도 차지하지 못하면서도 350만여명을 동원하는 흥행기록을 세웠다.
8년 전만 해도 윤제균이란 신인 감독의 이름에 주목하는 이는 거의 없었다. 하지만 이듬해 내놓은 ‘색즉시공’이란 야하면서도 슬픈 코미디로 자신의 이름을 영화팬들에게 각인시키기 시작했던 그는 2006년작 ‘1번가의 기적’을 거쳐 2009년 ‘해운대’로 1000만 관객을 돌파하는 엄청난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지금 대한민국에서 ‘가장 행복한 사나이’로 불러도 좋을 윤제균 감독을 만났다. 그는 벌써 몇 주째 끝없이 이어지는 인터뷰 강행군 중이었다. 지난 27일 서울 영등포구 여의동의 한 카페에서 마주 앉은 윤 감독에게 “1000만 관객을 동원한 감독이 되니 달라진 것이 무엇이던가”라고 물었다.
“다음 영화 투자받기가 좀 좋아질 것이란 점 이외에는 변화가 없어요. 지난해 8월부터 11월까지 ‘해운대’촬영기간 동안 집에 들어간 날이 열흘도 안됐습니다. 아내와 두 아이(4·6세)에게 너무 미안했어요. 영화가 잘돼서 미안한 마음을 조금이나마 덜 수 있게 돼 다행이에요.”
그는 자신에게 붙은 ‘코미디 전문감독’이란 수식어 때문에 큰 스케일의 재난영화인 ‘해운대’의 투자를 받기가 너무 힘들었다고 되돌아봤다. 2004년 동남아 지진해일(쓰나미)이 발생했을 때부터 기획하기 시작했으니, 무려 5년이란 세월 동안 ‘해운대’에 매달렸던 셈이다. 아무도 감히 기대하지 않았던 흥행기록을 냈음에도 불구하고 윤 감독은 인터뷰 내내 들뜬 기색없이 매우 차분한 태도를 나타냈다.
흥행뿐만 아니라 사람의 부침이 심한 영화계에서 윤제균은 비교적 ‘운이 좋은’ 감독으로 꼽힐 만하다. 이른바 ‘충무로’ 제작부를 거치지 않고 직장생활을 하다 느닷없이 영화감독으로 데뷔한 과정도 그렇고, 첫 작품부터 흥행감독이란 평가를 그리 어렵지 않게 얻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윤 감독은 고개를 저으며, “세상일엔 무엇이든 공짜는 없다”며 힘들었던 순간들을 되돌아봤다. 그러면서 꺼낸 말이 ‘인생사 새옹지마’. “청소년기 이후 나의 20여년에 걸친 세월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바로 이 말일 것”이라며 “‘해운대’에도 인생이란 앞을 내다볼 수 없으니 사람 위에 사람 없다란 메시지를 담고 싶었다”고 그는 말했다.
“부산에서 태어나 자라면서 영화를 좋아하기는 했지만 감독을 꿈꾼 적은 한번도 없었어요. 공부를 좀 잘한 편이어서 서울대 법대에 응시했다가 두 번 낙방했고, 삼수 끝에 고려대에 진학해서도 경제학과를 택했거든요. 보수적인 가정에서 자라난 탓인지 경제학과를 졸업한 후엔 정해진 코스대로 당연히 취직한다는 생각이 확고했습니다. 10년 전만 해도 지금 내가 감독이 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지요.”
1996년 대학 졸업 후 그는 약 4년 동안 광고대행사 LG애드 전략기획팀에서 기획서 작성하고 예산 짜는 업무에 매달리는 직장인으로 지냈다. 캠퍼스 커플이었던 지금의 아내와 결혼한 1998년, 그는 자신의 인생에서 맵디매운 첫 번째 ‘새옹지마’를 겪게 된다. IMF구제금융 사태를 맞아 회사가 어려워지면서 ‘윤 대리’는 원치 않는 1개월 무급휴직대상이 된 것. 게다가 아내까지도 주부사원 우선퇴직 대상에 걸려 직장을 잃게 되면서 경제적 어려움이 극심해졌다.
“그때가 제 인생에서 가장 어려웠던 시절인 듯합니다. 결혼한 지 몇 개월밖에 안 됐는데 부부관계도 최악이었고요. 아침이 되면 나갈 직장은 없는데 하루종일 아내 얼굴을 보려니 너무너무 힘들더라고요. 정말 도피하는 심정으로 한 달 동안 작은 방에 틀어박혀서 영화 시나리오를 썼습니다. 그땐 진짜 영화로 만들 수 있을 거란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그 시나리오가 공모전에서 상금 3000만원이 걸린 대상에 덜컥 당선된 겁니다. IMF 사태가 없었다면 감독 윤제균과 ‘해운대’는 없었을 거라고 단언할 수 있어요. 지금쯤 전 기업의 임원 정도 돼 있겠죠.”
오늘의 윤제균을 있게 만든 단초역할을 한 시나리오가 바로 차승원 주연으로 제작된 영화 ‘신혼여행’이다. 시나리오 당선 덕분에 LG애드 광고카피라이터로 자리를 옮겼던 윤제균은 다른 회사로 이직한 직후인 2001년 감독이 되기 위해 시나리오 ‘두사부일체’를 들고 영화사 문을 두드렸다.
“직장인이 갑자기 운좋게 감독이 된 것 같이 보였겠지만, 사실은 힘든 순간이 많았어요. 감독하겠다고 마음먹은 이후부터 3시간 이상 자본 적이 거의 없었으니까. 제 소신이 ‘남들이 100%를 기대할 때 200%를 보여주자’입니다. 긴가민가 하는 제작사에 제 능력을 입증하기 위해 국내외 영화 비디오 50편의 핵심 장면들을 일일이 편집해 따다 붙인 15분짜리 데모테이프로 브리핑했죠. 일종의 스토리북이었던 셈인데, 한국 영화계에서 그런 식으로 제작기획서를 만든 감독은 한명도 없다고 하더군요.”
4년의 답답한 직장생활 동안 갈고 닦은 브리핑과 파워포인트 작성 능력이 제대로 빛을 발했던 셈이다.
‘두사부일체’에 뒤이은 ‘색즉시공’의 성공으로 윤제균은 흥행감독으로서의 입지를 탄탄하게 굳히는 듯했다. 하지만 또다른 ‘새옹지마’가 찾아왔다. 세 번째 영화 ‘낭만자객’이 참혹할 정도의 악평을 받으며 참패한 것.
“지금 생각하면 자신감이 아니라 교만에 찼던 것 같아요. 한마디로 제대로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너무 욕심을 부렸던 거죠. 그때만 해도 10년 동안 매년 한 편씩 영화를 만들 생각이었고, 그렇게 할 수 있을 것 같더라고요. ‘낭만자객’의 실패가 제게 많은 교훈이 됐어요. 이후 3년 동안 제작쪽에 열중하면서 제 작품을 준비해 나갔던 게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지요.”
윤제균 감독이 만들고 싶은 영화는 “관객의 기대를 200% 채워주는 영화”다. “생활 속에 살아있는 유머를 담은 영화” “2시간 동안 관객을 행복하게 만드는 영화”란 말도 했다. “전 거장 감독이 아니라 노장 감독이 되고 싶습니다. 임권택 감독처럼 오랫동안 현장에서 메가폰을 잡는 감독이 되는 게 제 목표입니다. 나이 70이 돼도 전 현장에 있을 겁니다.”
그는 최근 위축된 한국 영화를 되살리기 위해 “투자사와 콘텐츠 창작자(감독, 제작자)가 서로 배려하고 존중해주는 풍토가 절실하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극장부율(극장과 영화배급사 간의 이윤배분 비율)이 외화는 40%대 60%인 반면, 한국 영화는 50%대 50%인 관행도 하루빨리 개선됐으면 좋겠다는 지적도 덧붙였다.
“‘해운대’가 1000만 관객을 넘겼다니깐 다들 제가 떼돈을 버는 줄 알아요. 그동안 영화 제작 때문에 진 빚을 이제야 갚고 나면 제게 남는 건 거의 없을 듯 싶네요. 그만큼 콘텐츠를 만들어내는 창작자들이 많이 어려운 상황입니다. 하지만 전 제로 상태에서 다시 시작할 겁니다.”
aeri@munhwa.com
윤제균 감독은…
▲1969년 부산 출생
▲1996년 고려대 경제학과 졸업
▲광고대행사 LG애드 전략기획팀 및 광고 카피라이터로 근무
▲1999년 태창흥업 주최 시나리오 공모전에서 ‘신혼여행’으로 대상 수상
▲2001년 ‘두사부일체’로 감독 데뷔. 2002년 ‘색즉시공’, 2003년 ‘낭만자객’, 2006년 ‘1번가의 기적’ 발표. 2009년 ‘해운대’를 발표해 한국 영화사상 5번째로 1000만 관객 돌파 기록을 세움
▲ 제작사 두사부필름, JK필름 등을 설립해 자신의 작품뿐만 아니라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2005년·민규동 감독) ‘간 큰 가족’(2005년·조명남 감독) ‘색즉시공 시즌 2’(2007년·윤태윤 감독) 등을 제작. 자신의 모든 작품 시나리오를 포함, ‘도둑 맞곤 못살아’(2002년·임경수 감독) ‘첫사랑 사수 궐기대회’(2003년·오종록 감독) ‘색즉시공 시즌 2’ 등을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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