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인상은 ‘충격’이었다. 1978년 MBC 제2회 대학가요제 TV방송을 통해 그를 처음 ‘만났던’ 순간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 속에 남아있다. 평범한 외모와 자그마한 몸집의 여학생이 흰색 그랜드 피아노 앞에 앉아 건반을 두드리며 불렀던 ‘그때 그 사람’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지금이야 ‘재즈피아노’가 대중화됐지만, 그때만 하더라도 가수가 재즈스타일로 직접 피아노를 치면서 부르는 트로트 가요란 듣도보도 못한 것이었다. 대학생들의 풋풋한 열기와 매력으로 넘쳐나는 대학가요제에서 심수봉이란 여학생의 존재는 매우 이질적이었다.
그렇게 첫만남을 가진 지 30여년의 세월이 흘렀다. 가수 심수봉은 이제 현대 한국 대중음악사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는 아티스트가 됐다. 20세기 한국사의 ‘결정적 순간’에 비극적으로 휘말려들어갔던 그의 인생은 새삼 거론하지 말자. 심수봉은 한국 트로트 가요 사상 최초의 여성 싱어송라이터이며, 재즈 댄스 랩 등 다양한 음악장르에 대한 실험을 계속해나가는 크리에이터이다.
‘주옥같다’는 표현이 아깝지 않은 가사와 선율의 곡들로 대중의 마음을 때론 후벼파고, 때론 달래줬던 심수봉씨를 만났다.
요즘 그는 데뷔앨범 ‘그때 그사람(1979년)’ 발표 30주년 순회공연을 강행군 중이다. 18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콘서트를 마무리지으면서, 연말까지 총 30회로 예정된 공연 중 얼추 반환점을 돌았다. 그는 그동안 부산, 대구, 마산, 울산을 비롯해 미국 시애틀에서도 콘서트를 열어 뜨거운 반응을 모았다. 하반기에는 중국 공연도 예정돼 있다. 7월초순쯤에는 ‘너에겐 내가 있잖니’ 등 신곡 4곡과 직접 개사한 북한 가요 등이 수록된 3장짜리 CD 앨범 ‘뷰티풀 러브’도 내놓는다.
“보통 공연에서는 다른 가수들의 곡들도 부르곤 하는데, 이번 투어공연에는 제 노래들로만 레퍼토리를 채웠어요. 한곡 한곡 모두 곧 제 인생이지요. 부르고 있노라면, 그 곡을 만들고 처음 불렀던 장면장면이 마음에 꽂힙니다. 청중들도 마찬가지인 것 같더군요. 자신의 인생에서 제 노래가 가슴에 꽂혔던 시절, 그때의 추억들을 되돌아보는 것이지요.”
맞다. 지난 30년, 그의 노래가 없었던 우리의 삶을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비가 오면 생각나는 그 사람(그때 그사람)” 때문에 가슴앓이를 했고, “남자는 남자는 다 모두가 그렇게 다(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를 부르짖으며 떠나간 사랑을 원망했고, “어제는 울었지만 오늘은 당신땜에 내일은 행복할거야(사랑밖에 난 몰라)”라며 눈물을 닦아내기도 했던 세월이었다. “나 당신 사랑해도 될까요(비나리)”라며 조심스럽게 마음을 털어놓고, “미워하는 미워하는 미워하는 마음없이 아낌없이 아낌없이(백만송이 장미)” 사랑을 준 적도 있지 않았던가.
올 한해 동안 이어지는 투어 공연의 전체 타이틀은 ‘뷰티풀 데이’. 그는 “이번 공연에선 다른 무엇보다도 희망을 전달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인생을 살면 살수록 이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역시 사랑이란 생각이 듭니다. 사랑만한 답이 없고, 열쇠가 없다고 믿어요. 어떤 이념적, 정치적 분열이든 결국 그것을 화합시키고 치유하는 것은 사랑이니까요. 그런 사랑을 찾을 수 있다는 희망을 모든 이들에게 알리고 싶어요.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 어떤 생각과 마음을 갖고 있는가가 바로 음악 또는 공연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인데, 제 노래를 듣는 분들이 사랑을 찾을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셨으면 좋겠네요.”
그렇다면 그는 과연 사랑과 희망을 찾았는가. 심씨는 “요즘처럼 삶이 아름답고 세상 모든 사람이 소중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지난 30년은 준비기간이었고 새롭게 출발하며 너무너무 설레는 마음” “희망과 사랑의 본체인 영혼의 노래를 할 수 있게 됐다는 것 자체가 너무나 큰 변화”라고도 했다. 지난 4월 투어계획을 공개한 기자회견에서도 그는 데뷔 후 처음 10년을 ‘두려움을 떨쳐낼 수 없고 꿈을 빼앗긴 암울한 시절’, 그후 10년은 ‘가정사로 힘들었던 시기’, 이후부터 현재까지의 10년을 ‘아픔이 긍정적으로 바뀌고 정리된 시간’으로 정의했었다.
“얼마 전까지 만해도 인생이 어떻게 이토록 고달플 수 있을까 생각했었죠. 최근 리허설 때 ‘미워도’란 곡을 연습한 적이 있었는데, ‘술잔을 붙잡고’란 가사가 나오는 부분을 부르면서 새삼 쑥스러워지더라고요. 마침 그 자리에 목사님이 계셔서 더 그랬던 거같아요. 겸연쩍은 마음에 “예전에 술잔 많이 붙잡았었지…”라고 했더니 모두들 웃더라고요.”
는 이제 ‘운명’이란 단어를 절대 입에 올리지 않는다. 그것을 대신 하는 말이 ‘소명’. 한글자만 달라졌을 뿐인데 의미는 하늘과 땅 차이다. 전자가 염세적이고 잔혹한 느낌이라면, 후자는 긍정의 에너지를 담고 있다.
“2007년 발표한 11집에 수록된 ‘오늘 문득’이야말로 제 인생의 전환점이 된 곡입니다. 어린시절부터의 상처를 치유하고, 인생의 방향을 긍정 쪽으로 확 돌린 것이지요. 자기연민으로부터 마침내 일어나서 오늘이 내 인생의 가장 찬란한 날임을 고백하고 선포한 곡이라고 할까요.”
‘오늘 문득’의 가사는 이렇다. “어릴적 눈물의 고향은 그래도 생각해보면 한번쯤 날 미소짓게 한 추억은 있을거야/세상을 향해 나올 땐 난 누굴 의지했나/땅거미 진 창가 별 하나 보여주던 그도 이미 떠난 사랑/너도 가고 나도 가고 이 세상은 보이는 곳 아니야 / 괴로워 말기 원망도 말기 아름다운 세상만 보기….”
심수봉은 태어날 때부터 가수로서의 ‘소명’을 지닌 사람이었다. 증조할아버지는 피리 명인이었고 큰아버지는 가야금 명인, 고모는 승무 무형문화재 소유자다. 3살 때 돌아가신 민요수집가 아버지를 거쳐 심수봉에 이르기까지 음악 또는 소리에 대한 열정은 심씨 집안 DNA에 각인돼 전해졌다. 그는 초등생 시절 옆동네 양복점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듣기 위해 매일 먼길을 돌아다니기도 했다. 가난한 살림형편에도 그의 어머니는 음악적 재능을 타고난 딸을 위해 4살 때부터 피아노를 가르쳤다. 10대소녀 심수봉은 드럼과 재즈에도 심취했고, 고교시절부터 이미 가발쓰고 미8군과 호텔 바 무대에서 노래를 불렀다.
수 데뷔에 나훈아씨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어요. 18살 때 나훈아씨가 우연히 제 노래를 듣고 당장 레코드회사 사장을 소개시켜주셨지요. 그때 앨범이 나오지 못하면서, 대학가요제에서 당선되면 앨범을 낼 수 있을 것이란 생각에 참가하게 된 겁니다(훗날 두사람은 ‘여자이니까’를 듀엣으로 부른 곡을 발표했다).”
그에게 음악은 힘겨운 인생의 버팀목이자 생명이다. 음악 없는 세상은 상상만 해도 지옥이다. 인생의 방향이 긍정적으로 전환하면서 “작품에도 어마어마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고 그는 말했다. 소리에 대한 관심도 예전보다 더 커져서, 오는 9월 전주에서 열리는 ‘세계소리축제’에 참가해 소리에 대한 다양한 실험을 모색해볼 생각도 갖고 있다.
그는 30년 뒤 아티스트로서 자신을 어떻게 상상하는가란 질문에 한참 곰곰이 생각한 후 이렇게 답했다.
“평생 유행에는 한번도 끌려본 적이 없습니다. 누가 ‘요즘 이런 게 잘 먹힌다고 하던데’라고 제의하면 ‘내가 왜 따라해야 하는데’라고 생각하지요. 이제부터 새출발하는 마음이지만 구체적인 계획은 없어요. 내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시대가 요구하는 대로, 감동이 가는 대로 꾸준히 창작해나갈 겁니다.”
aeri@munhwa.com
심수봉은…
▲1955년 충남 서산에서 출생(본명 심민경)
▲1978년 명지대 재학중 제2회 MBC 대학가요제에서 자작곡 ‘그때 그 사람’으로 입상
▲1979년 데뷔앨범 ‘그때 그 사람’ 발표. KBS 올해의 신인가수상, MBC 10대 가수상 수상
▲1979년 10월26일 박정희 대통령시해 사건 발생
▲1981년 10·26사태로 인해 방송출연 금지
▲1984년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가 수록된 앨범 발표. 방송출연 금지조치 해제
▲1986년 ‘사랑밖에 난 몰라’ 앨범 발표
▲1993~1995년 MBC 라디오 프로그램 ‘심수봉의 트로트 가요앨범’ 진행
▲1994년 ‘비나리’ 음반 발표, 자서전 ‘사랑밖에 난 몰라’ 발표
▲1997년 ‘백만송이 장미’수록 골든베스트 앨범 발표
▲1999년 데뷔 20주년 기념 콘서트
▲2005년 데뷔 25주년 기념음반 ‘베스트 오브 베스트’ 발표
▲2009년 데뷔 30주년 기념 콘서트 ‘뷰티풀 데이’ 투어공연 중. 7월초 기념음반 ‘뷰티풀 러브’발매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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