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여우의 세상 이야기/내가 본 세계

키워드로 본 만델라의 생애

bluefox61 2013. 12. 6. 11:32

마디바가 세상을 떠났다. 대통령과 노벨평화상 수상자란 명예로운 타이틀보다는 출신 부족의 이름에서 따온 마디바란 애칭으로 불리기를 더 좋아했던 남자, 27년에 걸친 수감생활에도 불구하고 평생 희망과 온화한 미소, 유머감각을 잃지 않았던 거인이 눈을 감았다.


넬슨 만델라가 전세계인의 존경을 받은 것은 남아프리카공화국 최초의 흑인대통령이란 점도 있지만, 화합을 통해 악명높은 아파르트헤이트(흑백인종차별정책)시대를 평화롭게 종식했기 때문이다. 그가 없었다면 남아공은 백인정권에서 흑인정권으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극도의 혼란과 유혈분쟁을 피하기 어려웠을 것이며, 그가 없었다면 남아공이 지금의 신흥경제국으로 성장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5개의 키워드를 중심을 만델라의 삶을 되돌아본다.

 


자유

 

만델라는 1918718일 남아공 음바셰 강변에 자리한 음베조라는 작은 마을의 템부 부족 추장 가문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명은 롤리흘라흘라 달리붕가. 그가 태어나기 이미 75년전부터 백인정부의 통치 때문에 가문의 사회적 지위는 추락해있었다


그는 자서전 자유를 향한 머나먼 길에서 그 자신이 언제부터 자유를 위한 투쟁에 일생을 바치겠다고 결심했는지 정확히 기억할 수는 없지만, “남아프리카에서 흑인으로 산다는 것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인식여부에 상관없이 정치화될 수밖에 없음을 의미한다고 밝히고 있다. 어느 한순간에 깨달음을 얻었다거나 계시를 받았다거나 진지를 깨우쳐 투사의 길에 들어선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쌓여온 모욕감과 모멸감이 그 안에서 분노심과 저항심을 키웠다는 것이다


9살 때 아버지를 잃고 가문의 보살핌 속에 성장한 청년 만델라는 1943년 비트바테르스란트대 법학과에 들어가 법률공부를 시작했고, 같은해 아프리카민족회의(ANC)에 합류했다. 1912년 창립된 ANC는 남아공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흑인전국조직이었으며, 남아공의 완전한 시민이 되고자하는 목표를 전파해온 단체였다. 만델라는 자서전에서 ANC 저항 활동을 통해 열등감과 (자신에 대한)의혹으로부터 자유로워졌으며, 백인들의 힘과 제도로부터 마침내 해방돼 진정한 자유투사로 태어났다고 밝혔다.


ANC 활동으로 1956, 1962년 각각 반역죄로 체포돼 재판정에 섰던 만델라는 1964년 다시 체포돼 종신형을 선고받고 악명높은 로벤섬에 수감됐다. 27년에 걸친 기나긴 죄수생활이 시작된 것이었다.


1990211, 남아공정부의 전격적인 석방발표로 만델라는 자유의 몸이 됐다. 환호하는 군중들에게 그는 평화와 민주주의와 자유의 이름으로 모든 분들에게 인사드립니다. 저는 선지사로서가 아니라 겸손한 종으로 이 앞에 섰습니다였다.


만델라는 자서전의 마지막 페이지에 이렇게 적어놓고 있다. “ 억압받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억압하는 사람도 해방돼어야 한다. 다른 사람의 자유를 빼앗은 사람은 증오의 포로가 되어 편견과 편협심의 창살에 갇혀 있게 된다. 자유로와진다는 것은 단지 쇠사슬을 풀어버리는 것이 아니며, 다른 사람의 자유를 존중하고 증진하는 방식으로 사는 것이다.”

 

평등

 

만델라가 평생 추구해온 것은 피부색과 상관없이 인간 모두가 마땅히 누려야할 평등한 권리였다. 평등에 대한 그의 강한 신념과 철학을 가장 잘 잘보여주는 것은 1963420일 반역죄 재판정에 서서 행한 진술이다. 이날의 진술은 남아공 역사뿐만 아니라 흑인인권사에 명연설로 기리 남아있다


여기에서 그는 아프리카인은 무엇보다 무능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평등한 정치적 권리를 원하고 있다. 나는 백인지배에 맞서 싸웠을뿐만 아니라 흑인지배에도 맞서 싸웠다. 모든 사람이 조화롭게, 동등한 기회를 가지고 함께 사는 민주적이고 자유로운 사회를 위해 살아왔으며 필요하다면 목숨을 버릴 준비가 돼있다고 토로했다.

 

용서

 

만델라의 가장 큰 업적은 아파르트헤이트를 종식시키면서 일체의 정치보복을 가하지않고 과거를 용서함으로써 평화로운 정권이양과 체제변화를 이룩해냈다는 점이다. 그렇다고해서 백인 독재정권의 반인도주의적 과거를 덮어버린 것은 아니었다. 한마디로 용서하되 잊지는 않는다(Forgive without Forgetting)“는 것이었다. 이런 방식은 이후 남미 독재정권 청산 등 각국의 과거사 처리방식의 한 모델이 됐다.


1994427일 총선에 의해 대통령에 취임한 만델라는 백인정당 국민다오가의 험난한 협상을 거쳐 19957국민통합 및 화해촉진법을 제정하고,과거 인권침해범죄에 대한 진실을 밝히기 위한 진실과 화해위원회(TRC)’를 설립했다. 2차세계대전 후 나치 전범재판인 뉘른베르크식의 재판을 해야한다는 목소리도 높았지만, 만델라는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데스먼드 투투 주교를 TRC 위원장에 임명함으로써 위원회의 궁극적 목표가 화해에 있음을 분명히했다


일체의 정치권력으로부터 독립된 TRC에 접수된 인권유린 사건은 약 21300건에 이르렀고, 피해자는 305만명에 이르렀다. 사면을 청구한 가해자는 약 7000명이었으며, 소환된 범죄자들은 TV로 생중계되는 공개청문회에 서서 조사를 받았다. 국민앞에 자신의 범죄행위를 고백한 자만이 사면을 받을 기회를 얻을 수있었다


2년반동안 조사를 진행한 TRC1998년 대통령에게 제출한 보고서에서 피해자 약 2만명에 대한 보상금 지급과 함께 진실을 고백한 가해자에 대한 사면조치를 건의한 후 2003년 임무를 끝냈다. 물론 끝까지 증언을 거부한 자들도 적지 않았다. TRC가 진실을 밝히지 않은 자들을 법적 기소해 처벌을 가하지 않은 점은 한계로 남았다.


만델라는 개인적으로 자신을 탄압하고 학대했던 사람들에게 화해의 손을 내민 것으로도 유명하다. 대통령에 당선된 후 백인정권의 윌렘 데클레르크를 부통령에 임명한 것부터 로벤 섬 교도소의 교도관들을 대통령 취임식에 초대했고, 아파르트헤이트 정보책임자 니엘 바너드, 자신에게 종신형을 선고한 퍼시 유타 검사, 로벤 교도소의 총사령관 윌렘스 장군을 대통령 관저로 초대해 극진히 대접했다


초대를 받은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생애에서 잊을 수 없는 놀라운 체험으로 말했다. 심지어 로벤 교도소 소장 야니 룩스 장군은 오스트리아 대사로 임명하기까지 했다.

 


평화

 

만델라가 지도자로서 추구하는 궁극의 목표는 자유로우면서도 평화로운 국가였다. 평화가 없는 자유란 혼란에 불과하다는 것이 그의 신념이었다. 1990211일 교도소 문을 나선 다음날, 12만명이 모인 대규모 집회에서 그가 가장 강조한 말은 바로 "문명이 없는 자유, 즉 평화롭게 살 능력이 없는 자유는 결코 진정한 자유가 아니다"였다.


만델라의 생애에서 가장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공산당과의 관계이다. 그는 백인정권과의 투쟁과정에서 마르크스주의에 관심을 가지게 됐으며, ANC내 공산주의자들의 위치를 인정하게 됐다고 밝힌 바 있다. 남아공 백인정부는 ANC와 만델라를 공산주의로 몰아부쳤다. 이에 대해 그는 자서전에서 공산주의자와 대화하기 위해 반드시 내가 공산주의자일 필요는 없었다공산주의자들이 ANC를 이용하고 있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지만 ANC 역시 그들을 이용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있는가라고 반문하기도 했다.

 

사랑


평생을 자유와 평화를 위해 투쟁해온 만델라의 생애를 단 한 개의 단어로 정리한다면, 그것은 바로 사랑, 즉 인류애라고 할 수있다. 그는 자서전에서 용감한 사람이란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그 두려움을 정복하는 사람이라면서 사람들이 증오를 배운다면 사랑도 배울 수있다고 말했다. 인간의 마음에서 사랑은 그 반대인 증오보다 훨씬 더 본성적이기 때문이란 것이다.


27년에 걸친 수감생활을 비롯해 생애 대부분을 탄압과 폭력에 시달려왔던 만델라가 늘 얼굴에 늘 편안하고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남다른 유머감각을 과시하곤 하는데 대해  전세계인은 경이와 의문을 동시에 나타내왔던 것이 사실이다. 그것은 만델라 개인의 성품 탓이기도 하지만, 인간 그자체에 대한 신뢰와 애정에서 우러나온 것이라고 할 수있다. 


1918년 7월 18일 트란스케이 음베조의 마디바 부족에서 출생. 아버지 가들라 헨리 음파카니스,어머니 노세케니 파니. 본명 롤리훌라훌라(말썽꾸러기)

 

1927년 아버지 사망.
 
1937년 포트보포트의 웨슬리언대학 힐트타운대 입학. 포트헤어대 수학. 평생의 친구 올리버 탐보와 우정 맺음

 

1939년 학생회 선거와 관련해 학교정책과 마찰을 빚다가 퇴학 압력을 받고 음케케즈웨니로 돌아감. 중매결혼을 피하기 위해 요하네스버그로 이주. 광산경비원,변호사사무실 직원을 일하면서 남아프리카대 통신교육코스를 이수

 

1942년 학사학위를 수여받음.

 

1943년 변호사가 되기위해 비트바테르스란트대 입학. 아프리카민족회의(ANC)가입. 

 

1944년 올리버 탐보,월터 시슬루와 ANC 청년동맹 구성. 첫 아내 이블린 은토코 메이스와 결혼. 총 세 자녀를 둠.

 

1948년 남아공정부,흑인 자유를 제한하는 법 도입. 

 

1952년 올리버 탐보와 함께 남아공 최초의 흑인 법률사무소를 개설. 가난한 흑인들을 위해 무료 또는 저렴한 법률자문 서비스를 제공. 같은해 ANC 저항캠페인에 두각을 나타냄.

 

1955년 국민의회에서 반아파르트헤이트 ,평등권리를 위한 자유헌장 채택

 

1956년 12월 5일 155명의 정치운동가들과 함께 폭력적 정부전복 및 반역죄로 기소. 56~61년 반역범죄 관련 재판을 받았다가 기소유예 처분.

 

1957년 첫번째 부인과 이혼. 

 

1958년 두번째 부인 위니 마디키제바와 결혼.두명의 아이를 둠

 

1959년 남아공 의회, 흑백인종분리 확대법안 통과.

 

1960년 샤프빌 학살사건 발생.경찰, 평화적 시위대에 발포해 69명 사살. ANC 불법화. 만델라 지하로 은둔해 무장저항 군조직 구성.

 

1961년 무장봉기 촉구. 새로 구성된 음콘토트 게릴라운동 지도자로 선출.

 
1962년 8월 5일 7개월에 걸친 도주 끝에 체포. 요하네스버그 요새에 수감..
         10월 25일 5년형을 선고받았으나 도주.

 

1964년 6월12일 체포. 파업, 반역혐의로 무기형 선고받음.로벤 섬에 수감됨.

 

1968년 어머니 사망. 맏아들 교통사고로 사망. 장례식 참석 불허

 

1969년 5월 19일 부인 위니 만델라 구금

 

1974년 유엔, 흑백분리정책 취한 로디지아 퇴출

 

1976년 6월 소웨토, 샤프빌에서 학생봉기 발생. 약 600명 사망

 

1977년 저항운동가 스티브 비코 사망 

 

1980년 망명 ANC운동가 올리버 탐보 , 만델라 석방을 위한 국제캠페인 시작.

 

1982년 3월 로벤섬에서 케이프타운 폴스무어 교도소로 이감 .

 

1983년 남아공정부, 흑인폭력으로부터의 보호를 명분으로 백인 농부들의 무장화 허가.

 

1984년 남아공 정부, 1983년 이후 흑인에 의한 사망자120명. 상해 25명, 성폭행 47명, 절도 284건이라고 발표

 

1985년 케이프타운 폭스병원에서 전립선 비대증 수술받음

 

1986년  남아공에 대한 국제사회의 각종 제재 강화. 6월 12일 정부 국가비상태선포.
           만델라, 코비 코에체 법무장관 전격 회동

 

1987년 코베 코에체 장관 재회동. 비밀회담 제안 .ANC 창립 75주년 .5월 백인 총선거에서 국민당이 압도적 지지.

 

1988년 5월 비밀운영단의 1차회의가 폴스무어 근교 관료클럽에서 개최. 만델라, ANC와 공산당은 인종적 억압을 뒤집어 엎고 인종차별없는 남아프리카 국가의 탄생을 기도한다는 단기목적을 공유한 별개조직이며 ,각자의 장기목적은 다르다는 점을 강조하며 남아공 정부의 공포를 불식시키위해 노력. 정부는 87년에 이어 88년에도 국가비상사태 선포. 미국 하원 남아공 제재법안 통과 12월초, 빅터 버스터 교도소 내 단층집으로 이감. 

 

1989년 7월 5일 보타 대통령과 비밀회동. 약 30분간 우호적 분위기에서 대화. 모든 정치범의 조건없는 석방요구. 한달뒤인 8월 보타 대통령직에서 사임. 드클레르크 국민당 당수가 대통령 집무대리 선서. 클레르크 , 취임연설에서 평화지향하는 어떤 단체와도 협상할 것이라고 선언.
         10월 10일, 클레르크, 시슬루 등 8명 석방발표
         11월 보타시절 만들어진 비밀조직 국가안전관리부 해체 발표
         12월 13일 만델라, 드클레르크 비밀회동

 

1990년 2월 2일 드클레르크, 의회 개회사에서ANC ,남아프리카공산당 등 기타 31개 비합벅적 조직에 대한 금지해제, 비폭력저항으로 투옥된 정치범 석방, 사형제도 폐지, 긴급사태에 의해 부과된 각종 규제사항폐지 선언. 협상을 위한 시기도래 선언.
         2월 9일 만델라, 드클레르크 재회동. 석방통보받음. 
         2월 11일 27년만에 석방. ANC, 국민당 다인종민주국가 건설을 위한 협상 개시.
 
1991년  ANC 부의장으로 선출. 국제올림픽위원회 남아공에 대한 제재를 21년만에 해제 
 
1992년  4월 위니만델라와 별거 .
 
1993년  3월 위니 만델라와 이혼 
              만델라, 데클레르크 노벨평화상 수상
 
1994년 4월 26일 총선서 승리. ANC,총 400석 중 252석 확보
         5월 10일 대통령 취임식. 로벤섬 교도관 3명 등 취임식에 초청. 힐러리 클린턴, 필립공, 카스트로,                              아라파트, 헤르조그 이스라엘 대통령 등 참석. 데클레르크 부통령 취임.

 

1995년 세계럭비컵 대회 우승으로 흑백단합 이뤄냄.  
 
1998년 80세 생일에 그라사 마셸과 재혼  

 

1999년 대통령직에서 퇴임.  

 

2004년 6월 모든 공직활동 중단 발표

 

2005년 1월 6일 아들 막가토 에이즈로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