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정계가 지금 '멘붕'에 빠졌다. 마뉘엘 발스 프랑스 총리의 말처럼 유럽 정치구도를 뒤엎는 '대지진'이다. 지난 22∼25일 유럽연합(EU) 28개국에서 치러진 유럽의회 선거 결과 이야기이다. 어느정도 예견됐던 일이지만, 극우 정당들의 바람은 과연 거셌다. 프랑스의 국민전선, 영국독립당 등 각국의 극우정당들은 이번 선거에서 기성정당을 제치고 1위를 차지한데 힘입어, 지난 1979년 유럽의회 선거가 처음으로 치러진 이후 35년만에 처음으로 원내교섭단체 진출을 눈앞에 두고 있다. 그리스의 시리자, 독일의 '독일을 위한 대안'당은 극우는 아니지만 반유럽연합(EU)을 내세워 경제난에 지친 유럽 유권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데 성공했다.
그동안 '유럽만의 잔치'였던 유럽의회 선거가 올해 유난히 전 세계적인 핫이슈가 된 이유는 극우,극좌,반EU 포퓰리스트 정당들의 급성장으로 인해 유럽 의회민주주의가 심각한 위기를 맞게 됐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극우정당하면 신나치주의나 인종차별주의를 떠올렸지만, 지금은 지극히 평범한 유권자들조차 극우정당의 반이민정책, 반통합정책, 반세계화정책에 공감을 나타내고 있다. EU창설 이후 최악의 경제위기를 겪으면서, 기성정당 또는 정치인들이 나를위해선 한 일이 없다는 유럽인들의 불신감이 극단적인 포퓰리스트 정당의 높은 지지율로 드러난 셈이다.
지난 2009년 그리스발 유로존 경제위기 이후 유럽에서 치러진 각종 선거들을 뒤돌아보면, 사실 이번 유럽의회 선거 결과는 예정된 수순이었다. 지난 5년동안 심각한 경제위기를 겪은 유럽 각국에서 치러졌던 선거는 거의 예외없이 무조건 "갈아치우고 보자"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권자들은 경제난에 대한 불만과 고통분담만을 강요하는 정부·집권당에 대한 환멸로 선거 때마다 정권교체를 반복했다. '분노하라' 시위가 한 때 전유럽에 들불처럼 번졌던 것도 같은 맥락이다. 좌에도, 우에도 실망한 유권자들의 표심이 이제는 자연스럽게 반EU를 주장하는 극우와 극좌 정당 쪽으로 향하게 된 것이다.
지난 1989년 공산체제가 무너지면서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승리는 확고부동한 듯 보였다. 하지만 그로부터 25년이 지난 지금, 세계를 둘러보면 곳곳에서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위기가 포착되고 있다. '아랍의 봄'의 대표국가인 이집트와 태국에서는 민선정부가 쿠데타로 무너졌고, 독재정권이 붕괴되면 서구식 민주주의가 뿌리를 내릴 것이란 서구의 기대가 무색하게도 리비아는 내전 직전의 혼돈 속으로 빠져들어가고 있다. 블라디미르 푸틴과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이 이끄는 러시아와 터키는 갈수록 민주주의의 탈을 쓴 독재로 치닫고 있는 느낌이다. 두 사람은 공교롭게도 "우리에겐 우리 만의 민주주의 방식이 있다"는 궤변을 똑같이 늘어놓고 있다.
오는 6월 4일 지방선거가 치러진다. 지금 지구촌 곳곳에서 벌어지는 민주주의의 위기를 지켜보면서 민주주의의 뿌리이자 힘은 국민의, 유권자의 올바른 정치의식이란 가장 기본적인 원칙을 새삼 절감하게 된다. 유권자 한 명 한 명이 투표함에 넣는 표 하나하나가 소중한 이유이다.
유럽의회 선거 후폭풍이 유럽 정계를 강타하고 있다. 아일랜드, 스페인에서 주요 정당 당수들이 선거패배의 책임을 지고 사퇴했는가하면, 그리스에서는 아예 조기총선을 치르자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다.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 20일 벨기에 브뤼셀에서는 28개 유럽연합(EU)회원국 정상들이 한자리에 모인다. 이번 선거로 나타난 유권자들의 반EU 정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를 둘러싸고 각국 정상들 간의 격론이 벌어질 전망이다. 오는 11월 출범하는 새 집행위원장선출을 둘러싼 막후 교섭도 이뤄질 것으로 보인다. 퇴임을 앞둔 조제 마누엘 바호주 집행위원장은 26일 포르투갈에서 열린 유럽중앙은행(ECB) 컨퍼런스 연설에서 "유럽 시스템이 가장 힘든 스트레스테스트(위기상황에서 대응능력 평가) 를 받게 됐다"며 , 이번 선거 결과가 EU 체제의 미래에 미칠 영향에 주목했다.
각국의 정치지형도 요동치고 있다. 아일랜드에서는 이먼 길모어 부총리 겸 외교장관이 지방선거와 유럽의회 선거 참패 책임을 지고 노동당 당수직을 사임했다. 유럽의회 선거에서 노동당은 5년 전엔 아일랜드에 배정된 12석 가운데 3석을 얻었으나 이번에는 전멸했다.길모어 부총리는 이날 기자회견에서 "당을 새로이 하는 작업은 새 지도자가 하는 게 최선이라고 믿는다. 후임자가 선출되는 대로 당수직을 그만두겠다"고 말했다.
스페인에서도 제1야당인 사회당의 알프레도 페레즈 루발카바 당수가 26일 "유권자의 신뢰를 다시 얻지 못한 만큼 변화를 일으킬 새 지도자가 필요하다"며 당수직을 내놓았다. 군소 극우정당이었던 영국독립당이 보수당과 노동당을 제치고 승리하는 이변이 연출된 영국에서는 닉 클레그 부총리의 정치적 입지가 위협받고 있다. 클레그가 이끄는 자민당은 이번 선거에서 녹색당보다 적은 6.9% 득표율을 기록하는데 그쳤다. 또 영국에서는 EU탈퇴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앞으로 더 높아질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그리스에서는 집권당인 신민당을 제치고 26.6%를 득표해 1위를 차지한 좌파정당 시리자의 알렉시스 치프라스 당수가 조기총선 실시를 촉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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