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저런 이야기들

블라디미르 비소츠키 '야생마'

bluefox61 2014. 12. 22. 08:46

소련체제시절 저항가수이자 배우였던 블라디미르 비소츠키(Vladimir Vysotsky 1938~80)의

'야생마( Koni priveredlivii)'를 오랜만에 들으니 정말로 감격스럽네요.

'미생' 마지막 편 엔딩부분에 이 노래가 나와 정말 깜짝놀랐습니다.

예전에는 가사를 몰랐는데,알고들으니 그야말로 절절하고 감동적입니다.

 

http://pann.nate.com/video/77379826

 

나는 벼랑과 아슬아슬하게 맞닿은 협곡을 지나간다.

나는 내 말에 박차를 가하고 매섭게 채찍질한다.

숨이 가빠 바람을 마신다. 안개를 삼킨다.

나는 길을 잃고 죽음의 황홀경에 빠질것 같다.

말아, 천천히, 조금만 천천히 가자꾸나.

너는 내 채찍 소리가 듣기 싫겠지.

내 운명의 말은 자기들 기분내키는 대로 움직인다.

내겐 생명의 시간이, 일을 마칠 시간이 없다.

나는 내 말에게 물을 먹이고 내 노래를 마치리라.

그리고 잠시나마 그 강가에 머물며 숨을 돌리리라.

나는 죽어간다. 한 포기 이삭처럼 폭풍우 나를 쓰러뜨리리.

새벽에 썰매가 나를 눈속으로 끌고 가리.

말아, 부탁하자, 조금만 그 걸음을 늦출 수 없겠니.

마지막 피난처에 도달할 때까지는 내 최후의 날을 늦춰다오.

신에게 초대받으면 우리는 지체하지 않고 도착해야한다.

천사들은 왜 그토록 적의에 찬 분노를 노래하는가?

종은 왜 끝없이 오열하는가?

나는 내 말에게 울부짖는다. 속도를 좀 늦춰줄 수 없느냐고.

말들아, 좀 천천히...좀 더 천천히!

너희들에게 명령하는 채찍과 회초리가 아니다.

왜 나에게 이러한 야생마들이 주어졌을까?

끝까지 못살았고, 나는 마지막까지 노래를 부를 수 없었다.

나는 말들을 노래하리라. 못다한 노래를 부르리라.

절벽 끝에 단 한 순간이라도 멈춰서서...

우리는 성공했어요. 하느님 초청으로 가는 손님이 늦을 수 없어요.

왜 천사들이 저런 흉한 소리로 노래를 부를까요?

내가 통곡할 때, 새 종 너는 왜 울고 있느냐?

나는 왜 말에게 썰매를 빨리 끌지 말라고 소리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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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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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블라디미르 비소츠키 ( Vladimir Vysotsky, 1938 - 1980, 러시아 )

 

 

 

 

 

 Inner Link

 

뒷걸음 치는 말(Fastidious Steeds) - 블라디미르 비소츠키

 

 

 

  이오시프 스탈린

  레프 다비도비치 트로츠키

  미하일 고르바초프

  밥 딜런

  존 바에즈

  엘비스 프레슬리

  김민기

  마야코프스키

 

  에게 성균관 대학교, 흔히 '대학로'라고 부르는 그 곳엔 내 나름의 추억이 있다. 뒷골목에 점점이 흘리고 다닌 추억들이 있다. 그곳에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들락거리기 시작한 맨 시멘트 바닥의 막걸리집 목로주점이 있었고, 뒷골목에서 내가 등을 두드려주던 내 또래의 여고생이 있었다. 우리들은 가방 바닥에 유인물(일명 '피')을 깔고, 그 위에 교과서와 참고서 등속을 넣고 돌아다니며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 강제로 물건을 파는 행상처럼 구호를 외치고, 유인물을 돌렸다. 그리고 밤에는 어설픈 대학생 흉내를 내며 막걸리집에서 안주 없는 술을 마셨다. 1987년. 고2의 나는 그렇게 성균관 대학 인근의 거리를 헤맸다.

  나의 풋사랑과 영영 이별을 한 곳도 아마 그곳이었을 게다.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기도 전에 어딘가 먼 곳으로 떠나게 되었고, 마치 무슨 비장한 각오라도 한 모양으로 그녀를 불러내 안녕을 고했다. 그리고 먼저 그녀를 버스에 태워 떠나보내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초겨울에 내리는 비는 길바닥에서 젖어가는 낙엽만큼이나 처량한 내 신세를 알아주는 것 같았다. 나는 돈이 없었다. 나는 그런 비루한 기분을 위로받고 싶었고, 나의 상처받은 마음을 치료받고 싶었다. 그래서 인근의 아무 레코드 가게에 뛰어들어가 존 바에즈의 LP 두 장을 구입했다. 뱅가드에서 나온 그녀의 골든 프라이즈 앨범이었다. 지금 그 음반은 친구의 아내가 된 친구에게 가 있다.

스탈린의 대숙청과 제2차 세계대전의 포화 속에 어린 시절을 보낸 블라디미르 비소츠키에게 그의 부모는 건축기사가 될 것을 바랬지만 비소츠키는 배우가 되고 싶었다.

 

 

비소츠키는 1956년 모스크바 예술극단의 작은 지부인 네미로비츠 단첸코 스튜디오의 배우학교에 입학하여 4년 동안 배우 수업을 받는다. 그러나 그는 오랫동안 무명 배우로 지내야 했다.

 

 

블라디미르 비소츠키. 그는 리얼리즘이 사라진 소련의 예술에 현실의 고통스러움을 알려주었다.

 

 

만년의 비소츠키는 우울증 증세로 몹시 힘들고 괴로워했다. 25년간의 가수 활동 기간 동안 5장의 음반밖에 발표하지 못했다. 그의 노래 대부분은 비밀리에 제작된 지하의 카세트 녹음으로만 남았다. 그러나 그의 장례식 때는 그야말로 국장을 방불케하는 엄청난 인파가 운집하였다. 브레즈네프가 집권한 전 기간 중 자발적으로 이루어진 최대 규모의 군중 집회로 기록된다.

 


  빈털털이가 된 나는 대학로에서 집까지 걸어가야 했다. 그 거리가 얼마나 될까? 그리고 오랫동안 나는 대학로에 가지 않았다. 다시 갔을 때(1990년대)의 대학로는 예전의 그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막걸리집은 죄다 없어지고 그 자리엔 카페와 패션, 악세사리 집으로 변해 있었다. 그러다 찾아들어간 곳이 예전 이름은 잘 기억이 나질 않지만 'The Doors'라는 작은 카페였다. 현재까지도 1년에 서너 차례씩은 가게 되는 곳인데 현재는 나보다 다른 친구가 더 애용하는 곳이 되어 버렸다. 나는 그곳에 가면 꼭 듣는 곡이 몇 가지 있는데 하나는 명혜원의 <청량리블루스>이고, 다른 하나는 블라디미르 비소츠키의 <야생마>이다.

  블라디미르 비소츠키와 난, 살아온 시대도 다르고, 살았던 곳도 다르고, 살았던 체제도 다르지만 한 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가슴 속에 뭔가 터질 것 같은 울분을 가지고 살았다는 것이다(물론 나의 경우 현재도 그런지는 별개로 하고 말이다). 삶을 지속시키는 것은 희망이 아니라 의지라는 사실을 깨우치게 된 것은 그후로도 오랫동안 고민한 뒤 내린 결론이었지만 때로 고통스러운 현실과 대면해야 하는 자리에 섰을 때 과연 어떤 의지를 가지게 될런지…. 그의 노래를 듣다보면 다시 고민에 빠지게 된다.

비소츠키를 유명하게 만든 영화 <백야(White Nights)>

  라디미르 비소츠키에 대한 글을 쓰기 위해 인터넷을 검색하는 과정에서 많은 이들이 그에 대해 처음 알게 된 계기가 <사관과 신사>로도 유명한 테일러 핵포드 감독의 1985년작으로 국내에는 1986년 국내 개봉작 중 흥행 1위를 차지한 영화 <백야(White Nights)>의 영향이 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영화는 '라이오넬 리치'의 <세이 유 세이 미(Say You Say Me)>라는 대단한 히트곡을 남기기도 했는데 그 해 아카데미 주제가상을 타며 자격 논란을 빚었던 이 음악보다(왜냐하면 영화 내내 한 번도 쓰이지 않다가 엔드 크레딧이 올라갈 때 비로소 흘러나왔기 때문에 이것을 영화음악으로 보아야 하는가 하는 논란이 있었으므로) 미하일 바리시니코프(니콜라이 로드첸코 역)가 키로프 극장에서 홀로 춤추는 장면과 그때 흘러나왔던 소련 가수의 가슴을 쥐어뜯는 듯한 노래가 더욱 인상적이었다는 사람이 많았다는 것이다.

  실제 소련에서 미국으로 망명한 발레리노였던 바리시니코프가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배역 니콜라이 로드첸코를 연기하며 보여준 현란한 춤실력은 그 이후로도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고, 뭇여성팬들의 가슴을 설레게 했다.(물론 남자들은 이 영화를 통해 처음 영화에 데뷔한 잉그리드 버그먼과 로베르토 로셀리니 감독 사이에서 태어난 이사벨라 로셀리니(헬렌 미렌 역)로 인해 가슴이 설렜겠지만.) 이때 바리시니코프가 보여준 춤동작은 이후 CF에도 사용되는 등 대단한 인상을 남겼고, 상대역을 맡았던 그레고리 하인즈의 탭댄스 역시 이 영화를 찾게 되는 즐거움 중 하나였다.

  그토록 인상적인 장면에 쓰였던 노래는 우리에게 흔히 <야생마>로 잘 알려진 블라디미르 비소츠키의 노래였는데 잘 아시다시피 살아 생전에 단 한 장의 음반도 출반하지 못한 가수였던 비소츠키의 노래를 국내에서 구한다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보다 어려웠다. 한때는 소련의 유명한 합창단인 소련적군합창단(Red Army Chorus)의 음반을 구입하는 것조차 적성국의 고무 찬양 및 내통 혐의로 발전할 수 있는 중죄에 속하던 시절이므로 설령 음반이 있다고 해도 구하기 어렸을 것이다. 한때 라이센스 음반이 나온 적 있었는데 그 음반에는 이 곡이 들어 있지 않았다고 한다.

대숙청기에 태어나 아프가니스탄 침공 때 죽은 가수

  라디미르 비소츠키는 1938년 스탈린의 숙청 작업이 서서히 절정에 이르던 시기에 태어나 1980년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며 '악의 제국'이란 비난을 듣던 시기에 돌연 심장마비로 세상을 등진 가수이다. 그의 공식적인 직함은 모스크바 드라마 극장 소속의 배우로 햄릿과 돈  주안 등의 작품을 올렸고, 생전에 26편의 영화를 찍기도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는 소련 민중들이 사랑하는 시인이자 가수였다.

  비소츠키는 독·이·일이 방공협정을 체결하고 전세계에서 공산주의를 몰아내자는 추축국 동맹을 맺은 이듬해인 1938년 1월 25일 모스크바 도심의 한 조산원에서 태어났다. 이 무렵의 소련은 레닌 사후 시작된 권력 투쟁의 종막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1936년 12월 5일. 스탈린은 헌법을 개정하여 소련을 '노동자와 농민의 사회주의 국가'로 규정했다. 키로프 암살사건을 시발점으로 시작된 대숙청 작업은 그 결과 트로츠키와 부하린 등 스탈린보다 러시아 10월 혁명에 공이 컸던 혁명가들을 제거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자신의 개인 숭배 분위기까지 만들어 갔다. 압제받는 민중의 해방을 부르짖었던 사회주의 종주국 소련은 키르키스탄과 카자흐스탄을 소련 연방에 가입시키고, 독일의 히틀러와 불가침 조약을 맺으며 세계를 경악시켰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의 포성이 울렸다. 스탈린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몰디비아·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를 소련 연방에 가입시켰다. 독일이 소련을 침공한 것은 그 이듬해인 1941년의 일이었고 비소츠키는 4살이었다. 비소츠키는 제2차 세계대전의 포격과 공습 사이렌 속에서 유아기를 보냈다.

  어려서부터 자작시를 만들고 낭송하는 등 예술적 재능을 보이던 비소츠키였지만 그의 부모는 자식이 험난한 예술가의 길을 걷기보다는 건축 기사가 되길 바랬다. 그러나 부모의 권유에 못이겨 건축기사 양성학교에 입학한 비소츠키는 채 1년을 넘기지 못하고 중도에 학업을 포기하고 만다. 그는 "그것은 내가 할 일이 아니었다. 나는 도저히 기하학과 건축학과는 친해질 수가 없었다. 나는 배우 학교에 들어가고 싶었다"고 이 시절을 회고했다.

세상의 혼란 - 배우 수업의 시작

  1956년 6월 비소츠키는 드디어 모스크바 예술극단의 작은 지부인 네미로비츠 단첸코 스튜디오의 배우학교에 입학하여 4년 동안 배우 수업을 받는다. 같은 해 2월 제20차 당대회에서 흐루시초프는 스탈린을 비판했다. 이때 그의 나이는 18살이었다. 나는 1986년에서 1989년에 이르는 3년의 고교 교육 과정을 통해 역사가 어떻게 바뀌는지 보았다. 그것은 혼란이었다. 광주 사태는 광주 민주화 운동에서 광주 민중 항쟁으로, 5·16 군사 혁명은 5.16 쿠데타로 사건의 본질은 그대로였지만 교과서는 시대의 변천에 따라 변모해갔다. 어제까지 군사 혁명의 당위성을 가르치던 교사들은 오늘은 군사 쿠데타로, 그리고 광주 사태를 북한 간첩의 소요 책동으로 가르치던 것을 오늘은 민주화 운동으로 교육했다. 배우는 학생에게 교과서는 세상을 읽는 가장 초보적인 잣대이다. 그리고 그것을 가르치는 교사는 세상을 바라보는 창()이 될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창은 혼미를 반복하더니 더 이상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창의 구실을 할 수 없음을 자인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비단 소련의 민중과 비소츠키 만의 문제가 아니라 박정희가 죽었을 때 눈물 흘리며 슬퍼했던 이 땅의 소시민들도 함께 겪을 수밖에 없었던 문제이기도 하다.

  1920년대 러시아 혁명의 진행 과정을 바라보는 전세계 민중과 지식인들의 눈은 경이로움으로 가득했다. 러시아 혁명은 인류가 품고 있던 휴머니즘적 이상,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의 '유토피아'의 이상과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혁명 직후 레닌이 보여주었던 탁월한 활동들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유토피아라는 이상을 현실 세계에서 실현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을 한껏 부풀게 해주었다. 그는 혁명 과정의 어려움을 민중들에게 솔직히 고백했고, 민주적 토론 속에서도 일단 결정된 사안에 대해서는 과감히 실천해나가는 혁명의 대의에 충실한 삶을 살았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소비에트 연방(소련)의 공식 예술은 '사회주의 리얼리즘'이었다. 그러나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러시아 공산당의 공식적인 예술 지도 이념으로 채택된 것은 레닌이 주도하던 혁명 전반기의 일이 아니라 스탈린이 정권을 잡은 뒤의 일이었다. 러시아 10월 혁명을 주도하고,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예술가들은 리얼리즘과 같이 특정 사조의 인물들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급진적인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이었다. 10월 혁명의 결과 수립된 볼셰비키 정권의 예술은 이들 아방가르디스트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스탈린이 집권한 뒤부터 아방가르드 예술은 지도적 지위를 잃었고, 수많은 예술가들이 그들이 그토록 혐오해 마지 않던 부르주아 사회로의 망명길에 올랐다. 그 결과 소련의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리얼리즘을 표방했음에도 현실은 사라지고 당의 공식적인 구호와 희망 사항만 남고 말았다.

  비소츠키는 대학 4학년이 될 무렵부터 무대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에게 주어지는 역할은 행인3, 걸인2와 같이 대사도 몇 마디 없는 형편없는 단역 밖에는 돌아오지 않았다. 대학을 졸업하고 1961년 푸시킨 극단에 입단한 비소츠키는 여전히 싸구려 단역배우를 전전하였지만 극단은 그와 정식 계약을 맺지 않았다. 그러나 이 시기에 그는 시를 쓰고 있었다. 그후 몇 편의 영화와 영극에서 단역배우 생활을 전전하던 그는 레프코차리안과 몇몇 친구들 앞에서 자신이 작곡하고 가사를 붙인 노래를 불렀다. 레프코차리안은 친구의 음성을 카세트에 녹음했고, 비소츠키의 이 음반은 곧 소련 전역에 널리 퍼지게 되었다. 배우로서 고뇌의 길을 걷던 한 무명 배우에게 민중의 갈채와 사랑이 쏟아졌다.

자유를 향해 달린 음유시인. 비소츠키

  연히 친구 앞에서 자신의 자작곡을 부르고, 그 노래를 녹음하여 두었던 친구. 그는 친구의 노래가 혼자 듣기에는 너무 아깝다는 생각에 테이프를 복사해서 친구들에게 돌렸고 친구들 역시 비소츠키의 노래 테이프를 주위 사람들에게 돌리기 시작한다. 비소츠키의 전설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비소츠키의 노래들은 사실 단조로운 포크 리듬에 가사를 읊조리는 형태로 되어 있어 어찌 들으면 단순히 시를 낭송하는 것처럼 들린다. 그의 노래에서 가사가 차지하는 비중은 상당히 높은 것이다. 다음의 일화를 한 번 보자.

 


 

야생마(뒷걸음 치는 말)

나는 벼랑과 아슬아슬하게 맞닿은 협곡을 지나간다.
나는 내 말에 박차를 가하고 매섭게 채찍질한다.
숨이 가빠 바람을 마신다. 안개를 삼킨다.
나는 길을 잃고 죽음의 황홀경에 빠질 것 같다.
말아, 천천히, 조금만 천천히 가자꾸나.
너는 내 채찍 소리가 듣기 싫겠지.
내 운명의 말은 자기들 기분 내키는 대로 움직인다.
내겐 생명의 시간이, 일을 마칠 시간이 없다.
나는 내 말에게 물을 먹이고 내 노래를 마치리라.
그리고 잠시나마 그 강가에 머물며 숨을 돌리리라.
나는 죽어간다. 한 포기 이삭처럼 폭풍우 나를 쓰러뜨리리.
새벽에 썰매가 나를 눈 속으로 끌고 가리.
말아, 부탁하자, 조금만 그 걸음을 늦출 수 없겠니.
마지막 피난처에 도달할 때까지는 내 최후의 날을 늦춰다오.
말아, 천천히, 조금만 천천히 가자꾸나.
너는 내 채찍 소리가 듣기 싫겠지.
내 운명의 말은 자기들 기분 내키는 대로 움직인다.
내겐 생명의 시간이, 일을 마칠 시간이 없다.
나는 내 말에게 물을 먹이고 내 노래를 마치리라.
그리고 잠시나마 그 강가에 머물며 숨을 돌리리라.
신에게 초대받으면 우리는 지체하지 않고 도착해야 한다.
천사들은 왜 그토록 적의에 찬 분노를 노래하는가?
종은 왜 끝없이 오열하는가?
나는 내 말에게 울부짖는다, 속도를 좀 늦춰줄 수 없느냐고.
말아, 천천히, 조금만 천천히 가자꾸나.
너는 내 채찍 소리가 듣기 싫겠지.
내 운명의 말은 자기들 기분 내키는 대로 움직인다.
내겐 생명의 시간이, 일을 마칠 시간이 없다.
나는 내 말에게 물을 먹이고 내 노래를 마치리라.
그리고 잠시나마 그 강가에 머물며 숨을 돌리리라.
말들아, 좀 천천히..좀 더 천천히!
너희들에게 명령하는 채찍과 회초리가 아니다.
왜 나에게 이러한 야생마들이 주어졌을까?
끝까지 못살았고, 나는 마지막까지 노래를 부를 수 없었다.
나는 말들을 노래하리라. 못 다한 노래를 부르리라.
절벽 끝에 단 한 순간이라도 멈춰서서…
우리는 성공했어요.. 하나님 초청으로 가는 손님이 늦을 수 없어요.
왜 천사들이 저런 흉한 소리로 노래를 부를까요?
내가 통곡할 때, 새종 너는 왜 울고 있느냐?
나는 왜 말에게 썰매를 빨리 끌지 말라고 소리치는가?
(정확한 노래 가사는 아니지만 대충 이런 뜻이라고 한다.)
 

 

 

 

관련 사이트 & 참고 도서

 『삶이 괴로워서 음악을 듣는다』 / 김갑수 지음/ 풀빛미디어/ 1998년  - 대중음악에 대한 에세이 중 가장 훌륭한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으로 지금 현재 단연 첫 손에 꼽혀야 하는 사람은? 정답: 시인 김갑수. 사람마다 음악을 듣는 제각각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시인 김갑수는 삶이 괴로워서 음악을 들었고, 그만큼 밀도있는 글이 되어 나왔다. 대중 음악 전반에 걸쳐 차분하면서 넘치지 않는 대중성을 가지고 읽을 수 있는 아주 좋은 책이다.

 V.S.Vysotsky Foundation : The Official Site - 블라디미르 비소츠키를 영어로 표기하는 방식은 몇 가지가 있는 것으로 안다. 그러나 본 사이트에서는 위의 사이트가 표기하는 방식을 따랐다. 비소츠키의 공식 홈페이지이지만, 그나마 영어 지원도 잘 되지 않아 러시아어를 모르는 이에게는 무용지물인 사이트이다. 그러나 비소츠키의 공식 사이트 답게 그에 대한 사진 자료는 충실한 편이다.

 


  
어느날 일단의 광부들이 지질학 연구소에서 주최한 설문조사에 응한 적이 있었다. 설문 가운데 다음과 같은 것이 있었다.

  "여러분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은 누구입니까?"

  그들은 모두 한결같이 블라디미르 비소츠키라 썼다고 한다.

  "여러분, 잠깐만."

  사회학자는 대답을 정정하고 싶었다.

  "저는 여러분들에게 가장 좋아하는 시인이 누구냐고 물었는데 여러분은 시인이 아닌 가수의 이름을 쓰셨군요."

  그러자 광부들이 대답했다고 한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비소츠키는 시인입니다. 그를 가수로 분류한 것은 당신네들입니다."

  비소츠키의 시낭송은 다이나믹하며 극적 구성과 기타가 동원되는 등 소도구를 적절히 사용한 것으로 넓은 층의 청중들을 사로잡았다. 그는 당국으로부터 낙인찍힌 시인도, 추방당한 시인도 아니었다. 겉으로 드러나게 체제에 반대하거나 이의를 제기한 시인도 아니었지만 그는 청중들의 가슴속에 어떤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시낭송을 추구했음이 분명하다. 그것은 인류 보편의 자유에의 추구였다고 요약할 수 있다.

그의 시는 간결하면서도 호소력 있는 내용들을 담고 있는데 잦은 반복을 찾아볼 수 있다. 그의 시를 한 편 인용하기로 하자. 이 시는 묻고 답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는 작품이다. 제목은「볼쇼이 카레트니 거리」이다.

너의 열일곱 살이 존재하는 곳은 어디지?
볼쇼이 카레트니 거리지.
너의 열일곱 불행이 존재하는 곳은 어디지?
볼쇼이 카레트니 거리지.
너의 검은 연발총이 숨겨진 곳은?
볼쇼이 카레트니 거리지.
그럼 네가 사라진 곳은?
볼쇼이 카레트니 거리지.

친구여, 넌 이 거리를 기억하겠니?
아니지, 넌 볼쇼이 카레트니를 영원히 잊지 못할 거야.
볼쇼이 카레트니라는 이름 한 번 들어본 적 없던 사람이
그의 인생의 절반을 잃어버린 곳이니 말이야.
그거야 두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지.

너의 열일곱 살이 존재하는 곳은 어디지?
볼쇼이 카레트니 거리지.
너의 열일곱 불행이 존재하는 곳은 어디지?
볼쇼이 카레트니 거리지.
너의 검은 연발총이 숨겨진 곳은?
볼쇼이 카레트니 거리지.
그럼 네가 사라진 곳은?
볼쇼이 카레트니 거리지.

이하 생략(*바다저작권번역실 역)

「이오니스트」지의 1988년 11월호에 실린 것을 인터넷 사이트에서 재인용
 

  포크 음악은 대중음악의 그 어떤 장르보다 가사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크다. 김민기, 김광석, 존 바에즈, 밥 딜런 등의 노래를 좋아한다는 것은 그들의 노래가 담아내고 있는 삶에 대한 성찰과 민중에 대한 애정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미권 가수들이 포크 음악의 가사들은 우리가 좀더 쉽게 접할 수 있는데 반해서 비소츠키는 우리가 쉽게 접할 수 없었던 러시아어로 쓰여진 것이다. 비소츠키는 살아 생전에 단 한권의 시집도 낸 적이 없었지만, 1980년 7월 27일 세상을 떠날 때까지 연극을 통해 햄릿역의 최고 배우로, 700곡의 저항가요를 부른 가수로 활동했다. 그러나 그는 살아 생전 단 한 번도 공식적으로는 가수라는 호칭으로 불리운 적이 없었다. 그러나 민중들은 그를 음유시인으로 기억한다.

혁명을 배신한 혁명가와 민중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혁명을 비판한 가수

  1922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연방은 1991년 공식적으로 깃발을 내리기 전까지 거의 60여년의 체체 실험을 지속했다. 19세기에 수립되었던 최초의 민중권력인 파리 코민이 고작 70여일을 버텨냈던 것을 생각해보면, 근대 여러 혁명의 역사가 거듭된 실패의 역사였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러시아 10월 혁명은 참으로 놀라운 것이었다. 자본주의 이후의 사회를 갈망했던 전세계의 혁명 세력과 빈곤과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을 갈구했던 전세계 민중들에게 그것은 하나의 신화였다. 비록 러시아 혁명을 전범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던 변혁과 혁명의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으나 전범으로서 받아들이지 않으려 했던 세력조차 이를 교재로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러시아 혁명이 전세계에 그토록 놀라운 영향력을 미칠 수 있었던 것은 혁명 자체의 즉각적이고 지속적인 성공과 새로운 대안적 권력의 창출에 일단은 성공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혁명의 성공은 짜르의 권력에서 새로운 지배집단으로의 권력 이전에 그치고 말았다. 러시아 혁명의 성공은 비록 아름다운 것이었으나 혁명의 지속은 혁명의 지속적인 타락 과정이었다. 10월 혁명의 아름다운 씨앗에서 피어난 꽃은 결코 아름답지 않았다. 러시아 혁명의 성공은, 소련의 지배집단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자본주의 세계의 지배집단에게도 어떤 의미에서건 자신들의 기득권과 지배권을 강화하는 기회로 이용했다. 입으로 말하는 주의, 주장은 달랐지만 한쪽은 자본가 계급이, 다른 한 쪽은 국가가 모든 것을 장악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비소츠키는 입으로만 인민을 부르짖는 정부 관료들을 향해 날카로운 비판과 함께 고단한 삶을 이어가야 하는 민중의 삶을 위로하는 노래를 불렀다. 그는 단 한 장의 공식 앨범도 발표하지 못했지만 그의 노래는 복제 테이프들을 통해 대학과 공장, 음악 클럽 등으로 퍼져나가 소련인들의 사랑을 받았다. 그의 사후에 등장한 고르바초프는 '비소츠키 거리'를 지정하고 그를 기념하는 동상을 세워 그의 뜻을 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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