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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과 매력'의 땅 발칸반도를 가다-보스니아 스레브레니차⓷

bluefox61 2024. 1. 14. 16:40

스레브레니차 - 포토카리 인종말살 기념센터& 추모묘역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여행 계획을 세웠을 때 가장 고민했던 여행지는 스레브레니차였습니다. 스레브레니차는 수도 사라예보에서 자동차로 2~3시간 걸리는 지점에 있는 마을입니다. 행정구역상으로는 세르비아계 주민들이 대다수인 스릅스카공화국에 속합니다. 1992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가 유고연방으로부터 독립하자 세르비아계 주민들이 많이 살고 있던 지역에서 스릅스카공화국 독립을 선언하고 보스니아를 공격하면서 내전이 발생했습니다. 초대 대통령은 라도반 카라지치. 그는 당시 유고연방 대통령으로 대세르비아주의자인  슬로보단 밀로세비치의 지원을 받아 일으킨 내전에서 끔찍한 반인도주의적 범죄들을 저질렀지요.  미국 중재로 열린 데이턴 협상으로 내전이 막을 내렸지만,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안에 스릅스카공화국의 존재를 인정해주는 조건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스릅스카공화국이 남아있는 겁니다. 

 

 

지도를 보면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내에서 스릅스카공화국 면적이 상당히 넓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치권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엄연히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에 속합니다. 현재 지도자는 밀로라도 도디크라는 인물입니다. 별도의 국기가 있고, 주민 대다수가 이슬람이 아닌 세르비아정교 신자입니다. 

<2023년 11월 20일>

옌스 스톨텐베르그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사무총장이 우크라이나 전쟁 속에 다시 안보 불안이 심화하고 있는 발칸반도 서부 4개국 순방에 나섰다.

AP, 로이터 통신에 따르면 스톨텐베르그 사무총장은 20일(현지시간) 첫 방문국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수도 사라예보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우리는 분리주의적이고 분열적인 구호와 러시아를 포함한 외국의 악의적인 간섭에 대해 우려하고 있다"고 말했다.

보스니아 내 세르비아계 반자치 스릅스카공화국의 지도자 밀로라도 도디크가 러시아와 세르비아의 지원을 받아 분리 독립을 추진하면서 긴장이 고조하는 상황에 대해 우려를 표명한 것이다.서방은 러시아 정부가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한 전 세계의 관심을 분산시키기 위해 보스니아와 발칸반도의 정세를 불안케 하려 한다고 우려한다.

보스니아는 보스니아계(이슬람), 세르비아계(정교회), 크로아티아계(기독교)가 뒤엉킨 인종, 종교 간 갈등으로 1992∼1995년 최소 10만 명이 숨지는 피비린내 나는 내전을 겪었다.현재는 보스니아계와 크로아티아계가 지배하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연방과 세르비아계의 스릅스카공화국으로 1국 2체제 국가를 이루고 있지만, 도디크는 공화국이 완전히 독립해 민족·종교가 같은 세르비아로 합병돼야 한다고 공공연히 주장해 왔다.

이에 대해 스톨텐베르그 사무총장은 "안정을 해치고 개혁을 방해한다"며 모든 정치 지도자가 단합을 유지하고 통합적인 국가 제도를 구축하며 화해를 이루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촉구했다.이어 "나토는 수년간 보스니아에 전념해 왔다"며 "여러분의 안보는 서부 발칸 지역에 중요하고 유럽에도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스톨텐베르그 사무총장은 또 이날 보르야나 크리쉬토 보스니아 각료이사회 의장을 만난 뒤 "모든 국가는 외국의 간섭 없이 자국의 안보 체계를 선택할 권리가 있다"며 러시아의 개입 우려를 지적했다.

지난해 2월 말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눈앞에서 본 보스니아는 나토 가입을 서두르고 있지만 스릅스카공화국이 이에 반대하고 있다. 사라예보 주재 러시아 대사관은 지난해 보스니아가 나토 회원 가입을 추진한다면 "러시아는 이 적대 행위에 대응할 것"이라고 경고했다.스톨텐베르그 사무총장은 이후 코소보, 세르비아, 북마케도니아를 차례로 방문한다. 

출처:연합뉴스

 

저와 여행파트너의 고민은 "스레브레니차를 갈 것인가 말 것인가"였습니다.  우리는 스레브레니차에서 벌어졌던 참혹한 학살에 대해 익히 알고 있었습니다. 사실 너무 많이 알고 있다해도 좋을 정도였습니다. 많은 외신기사들과 책들을 읽었고, 많은 사진들과 영상을 봤으며, 많은 글을 쓰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그 곳을 찾으려면 왠지 용기가 필요한 것같았습니다. 스레브레니차의 학살 현장에 섰을 때 엄습해올 비극의 무게감을 과연 감당할 수있을지 자신이 없었던 것도 같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온전히 하루를 스레브레니차에서 보내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그 곳에 제 마음을 담아 꽃 한송이를 꼭 바치고 싶었습니다.

 

자동차를 타고 사라예보에서 스레브레니차로 가는 시골길은 참 아름다웠습니다. 파트너는 "토스카나 구릉지대 못지않다"고 하더군요. 출발지 근처에서 많이 보였던 이슬람 사원들이 점차 사라지고 정교 교회들이 자주 보이기 시작하면 그곳이 바로 스릅스카 공화국입니다.  

 

스레브레니차에 도착해 첫번째 방문한 곳은 '스레브레니차-포토카리 인종말살 기념센터'입니다. 희생자 추모 묘역이죠. 스릅스카공화국 땅 안에 있지만 국립시설이기때문에 당연히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국기가 걸려 있습니다.

 

입구에 들어서면 , 가장 먼저 커다란 돌에 새겨진 숫자가 눈에 들어옵니다. 8372명....

 

이런 기념비석도 있습니다. "세계 어디에서도 스레브레니차가 결코 다시 벌어지지 않기를..." 신에게 비는 기원이 담겨있습니다. 

 

저는 당초 계획대로, 추모비에 꽃 한 송이를 바쳤습니다. 

 

 

1995년 7월, 세르비아계 민병대는 보스니아계 이슬람신도들이 많이 살고 있었던 스레브레니차를 점령한 후 주민들을 끌고 가 학살한 뒤 마을 곳곳의 구덩이에 묻어버렸 습니다. 유엔이 파견한 평화유지군이 주변에 있었지만 민병대를 막기에 힘이 없었습니다. 아니, 사실상 방조했다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유엔 그리고 유엔군의 무능을 전 세계에 드러냈던 치욕스러운 일이었습니다. 

 

 

 

희생자들의 이름이 적힌 기념비도 있습니다. 자세히 보면 같은 성을 가진 희생자들이 많습니다. 즉, 일가족이 몰살당했다는 이야기이지요. 집성촌을 이루고 살기도 했기 때문에 한 마을에 같은 성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고, 이들이 한꺼번에 희생됐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정말 말문이 막힙니다.  아직도 희생자 발굴이 계속되고 있기 때문에 무덤은 계속 늘어나고 있는 중이라고 합니다. 

 

가이드에게 물었습니다.  이런 역사를 다시 반복하지 않기 위해, 이곳이 역사교육장으로 활용되고 있느냐고. 세르비아 국민 또는 세르비아계가 많이 방문하냐고요. 대답은 "안타깝지만 그렇지 못하다"였습니다. 가이드는 십대 시절 사라예보 포위전을 직접 경험했다고 합니다. 

 

하긴, 남의 나라 이야기만도 아닙니다.  아직도 광주 민주화 운동을  '북한 공작'으로 철썩같이 믿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고 하니까요. 학교에서 광주 민주화 운동을 제대로 가르치고 있는지 솔직히 모르겠습니다. 

 

추모 묘역 맞은 편에는  내전 중 유엔군이 사용했던 자동차 배터리 공장이 있습니다. 지금은 '스레브레니차 인종말살 박물관' 입니다. 관련 전시물과 사진 동영상 등이 전시돼있는데, 스레브레니차 학살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유엔 군은 학살을 막기는 커녕 왜 사실상 방조했는지 등을 통렬하게 고발하고 있었습니다. 어찌보면 박물관 전체가  '유엔 고발장' 이라해도 될 정도였습니다. 

 

표지판의 설명문을 보니, 이 곳을 비꼬아 '블루 호텔'이라고 불렀다고 하네요. 유엔평화유지군의 깃발과 군모가 푸른색이기 때문에 생겨난 별명이었겠지요. 

 

민병대가 스레브레니차를 어떻게 공격했으며, 주민들이 대피하려다가 어떻게 학살당했는지 등을 보여주는 지도도 있습니다. 

 

스레브레니차 마을이 민병대에 완전히 포위된 것은 1993년초였습니다. 같은 해 유엔 안보리는 세르비아계 정치지도자들과 민병대를 비난하는 결의안을 통과시키고 유엔 평화유지군을 투입했습니다. 약 145km²의 인도주의 회랑인 '유엔 안전구역'도 지정했지요. 하지만 당시 현지에 있던 유엔 평화유지군은 캐나다군 150여명 뿐으로, 안전구역을 제대로 지킬 힘이 없었습니다. 그러는동안 국지전은 계속됐습니다.
같은해 9월 캐나다 유엔군이 철수하고 네덜란드 유엔군이 배치됐습니다. 이들은 단순히 무능한 차원을 넘어서서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주민들을 외면해 학살당하게 만든 공범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네덜란드 유엔군을 비꼬듯이 부른 말이 '더치뱃(Dutchbat)'이었다고 합니다.  이곳 배터리 공장을 차지하고 앉은 더치뱃들은 공장 안에서 맥주를 마시고 야한 여자 포스터들을 붙여놓는 등 나름 안락한 시간을 보냈던 모양입니다.
1995년 7월 라트코 믈라디치가 지휘하는 세르비아계 민병대는 세르비아로부터 지원받은 전력을 앞세워 스레브레니차 안전구역에 진입했습니다. 네덜란드군은 규모상 민병대와 맞붙을 수도 없었을 뿐더러 영내로 피난한 현지인들을 보호하는 데도 실패했습니다. 심지어 현지인들을 사실상 넘겨주다시피 했지요.
박물관에 전시돼있는 사진과 영상들을 보면, 정말 분노가 치밀어 오릅니다. 당시 네덜란드 사령관은 토마스 카레만스 (Thomas Karremans) 중령이었습니다. 한 영상에는 카레만스가 오만방자한 표정의 믈라디치 앞에서 마치 학생처럼 두 손을 조신하게 모으고 서서 그의 말을 듣는 모습이 담겨있습니다.
구글로 카레만스를 검색해보니, 그는 귀국한 후 대령으로 승진까지 했다고 합니다. 아래 사진은 카레만스(오른쪽 두번째)가 믈라디치(왼쪽)와 와인잔을 기울이고 있는 모습입니다. 

 

내전이 끝나고 스레브레니차 주민들은 믈라디치 등을 전범으로 처벌해줄 것을 끈질기게 요구했고, 네덜란드 정부에 사과를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이에 따라 2017년 네덜란드 대법원은 네덜란드군이 당시 기지에서 방출한 350명의 주민들이 입은 피해에 대해 네덜란드 정부가 10%의 배상 책임을 진다는 판결을 내렸죠.  생존자와 유가족들은 카레만스를 법적으로 단죄하려고 여러차례 시도했지만, 번번히 성공하지 못했고요. 
카레만스는 퇴역 후 스페인으로 이주해 스레브레니차와 관련된 자서전을 쓰기도 했는데, 자신이 받고 있는 비난에 억울한 심정을 나타냈던 모양입니다. 일종의 희생양이 됐다고 생각했던 듯합니다.  
박물관 내에는 네델란드 유엔군이었던 사람들이 이곳을 다시 찾아와 참담한 심정과 사과를 표하는 전시물이 있습니다. 하지만 카레만스가 사과했다는 이야기는 아무리 찾아봐도 없네요. 
 

 

<2015.3.19>

보스니아(현재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내전이 막바지로 치닫던 1995년 7월 유엔 안전지대인 스레브레니차에서 발생한  민간인 학살사건 20주년(7월 11일)을 앞두고,18일 세르비아 검찰이 학살에 직접 참여한 것으로 추정되는 용의자 7명을 전격 체포했다. 세르비아가 내전이 끝난 후 자국에 숨어있던 보스니아 세르비아계 정치지도자 라도반 카라지치와 민병대 사령관 라트코 믈라디치를 체포해 네덜란드 헤이그의 유고전범재판소(ICTY)에 넘긴 적은 있지만,스레브레니차 학살 사건의 직접적인 당사자들을 체포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지난 2004년 ICTY는 이 사건을 인종학살로 규정해 관련자들에게 국제 수배 영장을 발부한 상태이다. 보스니아 내전에 개입했던 세르비아는 한때 국제사회로부터 전쟁범죄 단죄에 소극적이란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최근에는 유럽연합(EU)가입을 앞두고 전범자 추적과 체포에 적극적인 자세를 나타내고 있다.  

블라디미르 부크체비치 수석검사는 18일 로이터통신과의 인터뷰에서 " 세르비아 내 여러 곳에서 오늘 새벽 동시다발로 체포 작전을 벌였다"면서 "당초 8명을 체포하려고 했는데 1명은 놓쳤다"고 말했다. 또 이번에 체포된 전범 용의자 7명의 신원에 대해 "내전 당시 보스니아 내 세르비아계 경찰 특수부대원들"이라고 밝혔다. 부수석 검사 브루노 베카리치는 "세르비아가 이제야 과거를 직시할 수있게 됐다"면서 "세르비아 뿐만 아니라 인근 국가에 은둔하고 있는 또다른 전범들을 추적하고 있다"고 말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최악의 민간인 학살로 기록된 스레브레니차 사건은 믈라디치가 이끄는 세르비아계 민병대가 유엔 안전지대인 스레브레니차에 난입, 보스니아계 이슬람 신도 주민 약 8000명을 집단살해한 만행을 가르킨다. 이번에 체포된 7명은 스레브레니차의 남성 주민 약 1000명을 창고로 끌고 가 총을 난사하고 폭탄을 터트려 몰살시킨 것으로 추정된다. 이 중 네델코 밀리드라고비치는 ‘도살자 네조’로 불렸을 만큼 악명높은 인물이다. 체포된 7명이 ICTY로  넘겨지는 것인지, 아니면 세르비아 또는 보스니아 법정에서 재판을 받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구체적으로 알려지지 않고 있다. 만약 세르비아에서 재판이 진행될 경우, 과연 이들이 어떤 처벌을 받느냐에 따라 세르비아 정부와 사법당국의 과거사 청산 의지가 확인될 것으로 보인다. 지난 2013년 세르비아의 토미슬라브 니콜리치 대통령은 보스니아 TV에 출연, "스레브레니차에서 세르비아인이 저지른 범죄를 용서해 달라고 이 자리에서 무릎 꿇고 빌겠다"며 "누가 범죄를 저질렀든 우리나라와 국민을 대표해 사과한다"고 용서를 구했다.

출처:https://bluemovie.tistory.com/753[푸른여우가 본 세상:티스토리]


 

믈라디치에 대한 단죄가 이뤄진 것은  2017년이었습니다. 네덜란드 헤이그에 있는 유엔 산하 국제유고전범재판소(ICTY)가 믈라디치에게 종신형을 선고한 순간 TV 화면으로 이를 지켜보던 스레브레니차 주민들은  손뼉을 치며 환호했으며 일부 여성들은 회한과 기쁨이 뒤섞인 울음을 터뜨렸다고 합니다. 하지만 종신형으로도 충분치 않다고 분노를 나타낸 사람도 많았습니다. 유엔 전범 재판에서는 사형이 없으며,  수감 시설도 상당히 안락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믈라디치는 올해 나이 81세로, 잘 살아있는 모양입니다. 

 

영화 <쿠오바이스, 아이다>

<쿠오바디스, 아이다>는 1992년부터 1995년까지 3년간 이어진 보스니아 전쟁을 어느 가족이 벌이는 며칠간의 고투 속에 압축적으로 담아냈다. 배경은 보스니아 스레브레니차. 유엔 안전지대로 선언되었으나 세르비아계 군대가 95년 7월에 마을을 불법으로 점령하면서 국제기구의 약속은 손쉽게 무력화된다.

유엔군의 통역관이자 지역 교사인 아이다(야스나 디우리치치)는 세르비아군의 공격을 피해 유엔 캠프로 몰려든 난민들 틈에서 남편과 두 아들을 들여오는 데 어렵사리 성공하지만 주민을 강제로 이송하려는 세르비아군의 음모를 간파하고 가족을 빼돌리기 위해 애쓴다.

동유럽 내전의 복잡한 역사를 단 며칠간의 타임 프레임 안에서 불같이 밀어붙이는 야스밀라 주바니치 감독의 장악력이 빛나는 영화로, 가족을 구하려 시종 동분서주하는 아이다의 뒷모습을 따르는 핸드헬드 카메라와 함께 내전 난민들이 겪는 참혹한 실상을 목도하게 된다. 남성을 중심으로 무고한 시민 8천여명이 학살된 뼈아픈 역사로부터 남편과 아들을 잃어야 했던 여성들의 운명을 선명히 비추고 있지만 주바니치 감독은 핵심을 찌르는 숏을 적재적소에 사용함으로써 정확한 슬픔을 겨냥할 뿐 결코 신파에 빠지지 않는다. 제77회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공개 후 아카데미 국제장편영화상 후보로 선정되었다.

출처:씨네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