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세월에 길들여지지 않는 사람이었다. 아무리 모난 돌이라도 긴 시간동안 구르다보면 어느새 둥근 차돌이 되게 마련이다. 하지만, 험하기로 소문난 영화계에 반세기동안이나 몸을 담아 왔던 그는 둥글둥글해지는커녕 더 날이 서고 카랑카랑해질 뿐이었다. 그가 둥글둥글해지지 않았던 것은 평범한 돌맹이가 아니라 다이아몬드 원석이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70대 나이에 받았던 심장이식수술도 그의 에너지와 성마른 기질을 누그러뜨리지는 못했던 모양이다. 다섯번이나 아카데미 영화상 작품상과 감독상 후보에 올라놓고도 단 한차례 수상의 기쁨을 누려보지 못했을만큼 할리우드의 미운털이 깊이 박혔던 그가 지난 3월 드디어 생애 유일의 오스카 트로피를 가슴에 안았다. 일명 ‘평생공로상’.
그는 수상 소감을 이렇게 말했다.
“십여년전에 심장이식 수술을 받았더랬습니다. 30대후반 나이인 젊은 여성의 심장이었죠. 그러니 지금 내 몸 속에서 뛰고 있는 심장은 이제 겨우 40대 중반 나이입니다. 그래선지 아무래도 평생공로상을 너무 일찍 받은 것 같습니다. 앞으로 40년은 더 (심장을) 쓸수 있을 겁니다. 이 상(아카데미)을 그동안 내가 만들어왔던 그 모든 영화들에 대한 인정의 의미라고 생각하겠습니다. 전 이제야 겨우 기나긴 한편의 영화를 완성시킨 느낌입니다. ”
이런 수상소감으로 그날 수상식에 참석했던 수많은 스타들과 시청자들의 눈시울을 붉히게 만들었던 그도 사실은 자꾸만 지나가는 시간과 점점 시들어가는 자신의 건강을 걱정했던 모양이다. 수상식이 끝난후 열린 기자회견에서 기자들이 ‘왜 십년이나 지난 지금에야 그 엄청났던 수술사실을 공개하게됐냐’고 묻자 , 그는 이렇게 답했다. “내가 그런 수술을 받았다는 것을 영화사 간부들이 알면 내게 일을 주지 않을지도 모르니까…”
미국 영화계에서 가장 고집스럽고, 괴팍하고, 시니컬하며, 성질 급하고, 독창적이었고, 진정한 인디정신의 소유자였던 감독 로버트 알트먼이 여든한날의 나이로 20일 사망했다. 사인은 암에 의한 합병증. 지난 18개월동안 그가 암투병중이었다는 사실도 최근에서야 측근들에게만 알려졌을 뿐이었다.
그의 마지막 작품은 최근 국내에서 조용히 개봉됐다가 종영된 <프래리 홈 컴페니언>. 암과 싸우면서도 알트먼은 이 영화를 촬영하고 , 편집하고, 개봉시켰으며 죽음이 목전에 닥치기 직전까지도 내년 봄 촬영에 들어갈 새영화의 프리프로덕션 작업을 끝내놓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50년대 중반 데뷔이래 반세기가 넘는 세월동안 그가 내놓은 작품은 모두 86편. 한해 두편의 영화를 만든 적이 많았다는 이야기다. 영화계가 그에게 붙여준 별명들은 수없이 많다. 위대한 도박꾼, 할리우드의 미친 늙은 아저씨, 우상타파주의자, 이단아, 독불장군(매버릭) , 모험가,부도옹(不倒翁) 등등.
특히 알트먼은 할리우드 대형 영화사 간부들에겐 진절머리나는 싸움꾼이었다. 그와 함께 작업했던 스태프들은 알트먼이 새벽 두세시까지 촬영과 편집이 끝나면 ,하루 일과는 위스키와 대마초로 마무리하곤 했다고 회고하고 있다. 그런가하면, 그가 연출권과 편집권을 사수하기 위해 영화사 중역 사무실에 쳐들어간 적도 한두번이 아니다.
한국전 당시 야전병원 의료진을 다룬 <매쉬(MASH)>에 출연했던 엘리엇 굴드는 알트먼의 죽음이 알려진 직후 발표한 추도사에서 이렇게 고인을 추모했다.
“알트먼은 존 포드 등으로 대표되는 미국의 위대한 영화감독 전통을 이어나간 인물이다. 그는 혁신적인 예술가였다. <매쉬>를 찍을땐 너무 혁신적이어서 탈이었지만. 어찌나 유별나게 굴던지, 정말 확 그를 감독에서 짤라 버릴려고 했었다. 하지만, 그는 우리들에게 그 누구보다도 자유를 부여해줬다. 그는 배우로서 내게 날 수 있는 기회를 줬다.”
사실 그에게 흥행감독의 타이틀을 달아준 <매쉬>는 70년 당시로선 보기드믄 풍자와 블랙유머로 관객과 평단을 깜짝놀라게 만들었던 문제작이었다. 국내에서는 한국을 지나치게 남루하게 그렸다는 지적을 받기도 했지만, 사실 알트먼이 말하고자 했던 것은 한국전이 아니라 모순되기 짝이없었던 베트남전이었다.
영화에서 미군 야전병원 병사들의 적은 베트콩이 아니라 군대의 관료조직이었다. 시사회때 20세기폭스사 간부들은 알트먼의 독설로 똘똘 뭉친 영화를 처음 본후, 뒤로 넘어갔던 것으로 전해진다. 영화사측에서 영화 내용을 사실상 거의 다 잘라내려하자,알트만이 폭스 사무실을 쳐들어가 담판을 지었던 것은 유명한 일화다.
결국 이 영화는 개봉후 엄청난 화제와 흥행돌풍을 불러일으켰으며, 폴린 카엘 같은 영화평론가는 “미국 영화사상 최고의 전쟁영화”로 극찬하기까지 했다. 71년 아카데미 영화상은 <매쉬>를 작품상, 감독상 등 5개부문에 노미네이트시켰다.
그러나 <매쉬>는 단 한 개의 수상도 하지 못했다. 그해 작품상을 받은 작품은 2차세계대전 영웅을 다룬 <패튼>이었다. 전쟁때면 똘똘뭉치는 미국사회의 분위기, 그리고 알트먼이란 독불장군을 바라보는 영화계의 불편한 시선이 낳은 당연한 결과였다.
이후 파격적인 서부영화 < 맥케이브와 밀러부인>(1971년) , 알트먼 최고의 작품으로 꼽히는 <내쉬빌>(1975년)을 잇달아 내놓은 그는 80년대 기나긴 침체기를 겪어야만했다. 내놓는 작품마다 악평과 흥행실패가 이어졌고, 그에게 제작비를 선뜻 대겠다는 사람들도 점점 줄어들던 시절이었다. 알트먼은 미국 영화계에서 “이제는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거장감독”반열에 오르는듯했다.
하지만, 알트먼이 누군가. 92년 영화계의 검은 속내를 신랄하게 까발긴 <플레이어>로 많은 사람들을 깜짝놀라게만들었던 그는 <숏컷>(1993년) <패션쇼>(1994년) <캔사스시티>(1996년)를 잇달아 내놓았고, 2001년에는 예전같은 신랄함에 세련미까지 더한 <고스포드 파크>로 자신의 건재함을 전세계에 알렸다. 진정 , 사라지기를 거부하는 고집쟁이다왔다.
수많은 캐릭터들을 씨줄날줄로 엮어내는 이른바 ‘앙상블 연출’, 그리고 숨가쁘게 겹쳐져 이어지는 대사 등 알트먼 특유의 스타일은 수많은 감독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크래쉬><바벨>등 까마득한 후배감독들의 최근작들이 대표적인 경우.
알트먼은 지난 93년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요즘 제작자들은 좋은(good)영화를 만들기 보다는 성공적인 (successful) 영화를 만드는데 더 관심이 있다. 지금 영화계를 움직이는 것은 마케팅 전문가들이다. 그들은 돈버는 능력은 있을지 모르지만, 영화의 생명(life)이나 미래에는 관심이 없다. 이제 영화계에서는 그 누구도 “40년 지난 훗날까지 과연 사람들이 이 영화를 봐줄까”라고 묻지 않는다. 비전을 가진 사람이 없다.”
그렇게 꼬장꼬장했던 감독이 결국 그의 영화를 사랑했던 팬 곁을 떠났다.
과연 우리는 알트먼같은 감독을 또다시 만날 수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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