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여우의 영화 이야기/내가 본 영화들 34

[연인], 장예모의 진화 또는 변절?

장예모의 신작 '연인'에서 이론의 여지가 없는 것은 역시 스펙터클한 비주얼이다. 당나라 도성의 기방 깊은 곳에서부터 대나무 숲과 억새풀 우거진 들판을 거쳐 광활한 흰눈밭으로 장예모는 관객들을 휘몰고 다니며 현란한 액션과 색깔의 융단폭격을 퍼붓는다. 당대 최고의 스타일리스트 중 한사람인 장예모가 작정하고 스타일의 극치를 선보인만큼, 이 영화의 비주얼은 빼어나다. 두 남자주인공의 칼싸움이 낙엽지는 가을에 시작해 눈보라치는 겨울까지 이어지거나, 가을에 죽은(줄만알았던) 메이(장쯔이)가 눈 밭에 파묻혔다가 멀쩡히 기사회생하는 '대륙적 과장(또는 허풍)'마저도 이 영화의 탁월한 비주얼 덕분에 쉽게 잊혀질 정도다. 특히 장예모의 전작 '영웅'이 외국어영화로는 극히 이례적으로 미국시장에서 박스오피스 1위를 연속 2주..

공포영화팬들께 추천합니다-[쓰리몬스터][알포인트]

[쓰리 몬스터]와 [알 포인트]는 최근 개봉된 한국영화([쓰리몬스터]는 한,일,홍콩합작)들 중 단연 돋보이는 수작들이다. 공포 코드를 갖고 있는 두 작품은, 단순히 소재로서의 공포를 벗어나 인간존재의 핵심을 파고드는 깊이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 만하다. 특히 지금까지 국내에서는 한번도 시도된 적이 없었던, 분열적 자아의 공포(쓰리 몬스터 중 박찬욱 편 '컷')와 전쟁의 공포(알포인트)를 파헤친 시도가 돋보인다. [쓰리 몬스터]의 '컷' 는 한 천재 영화감독에 닥친 하룻밤의 악몽에 관한 이야기이다. 능력있고 착하며, 게다가 부자이고 인형같은 마누라까지 있는 영화감독 류지호(이병헌)의 집에 괴한이 침입한다. 괴한의 요구는 피아노 줄에 마리오네트마냥 매달린 아내의 손가락이 5분마다 잘려나가는 것..

내 남자의 로맨스, 아는 여자, 인어공주... 여름에 본 몇편의 영화

여름을 타는가 봅니다. 영화보기를 그리 게을리한 것은 아닌데, 이상하게도 글쓰기에는 한없이 게을러지는 요즘입니다. 그래도 최근 본 몇편의 영화들에 대한 생각을 정리해봤습니다. [내 남자의 로맨스] 웬만해서는 영화보다가 중간에 나온 적이 거의 없습니다. 아무리 나쁜 영화도 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최소한 얼마나 나쁜지를 확인해볼 수는 있으니까요. 그런데 이 영화만큼은 끝까지 앉아서 보는데 적잖은 인내심이 필요했습니다. 모 일간지 기자는 이 영화를 만든 박제현 ( 울랄라 시스터스, 단적비연수)감독의 메이 필름이 '한국의 워킹 타이틀'을 지향하는 것같다고 하더군요. 영화를 보고나서, 상찬도 이런 상찬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왜 이런 지적이 나오게 됐는지는 알겠더군요. 7년 사귄 커플 사이에 어느날 ..

이란 영화의 또다른 힘 -[취한 말들을 위한 시간]

할리우드 대형 오락물, 가벼운 연애담과 코미디 등이 점령한 여름시즌 극장에서 이 영화를 만나는 것은 행운이자 기쁨이다. 쿠르드계 이란 감독 바흐만 고바디의 '취한 말들을 위한 시간'은 단순함이야말로 가장 큰 힘이며 감동이 될 수있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영화의 줄거리는 매우 간단하다. 부모가 죽은뒤 가장이 되어버린 12살난 소년 아윱이 누나와 어린 여동생, 그리고 장애자인 남동생들과 생존해나가기 위해 악전고투하면서 훌쩍 어른이 되어버린다는 내용이다. 아윱은 6.25전쟁 후 지지리도 가난했던, 가족을 위해 희생을 묵묵히 감내해내야 했던 우리 부모세대의 모습 그대로이다. 아니, 이 땅 어디에선가 아직도 수많은 소년소녀가장들이 아윱으로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 영화는 인생경험의 폭과는 무관하게 관객의 마음을 ..

[더 블루스]-빔 벤더스의 세번째 음악편지

빔 벤더스의 영화에서 음악은 제 2의 주인공이다. 전후 미국 대중음악의 세례를 받으며 성장한 벤더스는 언제나 자신의 영화 속에서 음악에 대한 지극한 사랑을 표현해냈다. 그의 대표작 ‘파리 텍사스’는 황량한 이미지와 함께 라이 쿠더의 흐느끼는 듯한 기타 선율로 기억되며, ‘밀리언 달러 호텔’은 그로테스크한 인간군상만큼이나 보노의 노래가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더 블루스-소울 오브 맨’은 벤더스의 이른바 ‘음악 영화 3부작’ 중 세번째 작품이다. ‘브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에서 쿠바 음악의 거장들을 불러냈던 그는 두번째 음악영화 ‘비엘 파시에르트’에서는 동독출신의 포크록그룹 BAP를 통해 분단사의 비극을 짚어냈다. ‘더 블루스…’는 이미 오래전 사망해 전설인 된 미국 블루스 음악가 3인을 다루고 있다. 앞..

예쁜 스틸사진 -[투스카니의 태양]

그냥 아무 생각없이 아름답고, 사랑스럽고, 따스한 그런 영화를 보고 싶을 때가 있잖아요. 별로 대단한 영화는 아니지만, 지난주 개봉한 이 영화는 그런 욕구를 딱 적당하게 충족시켜 주더군요. 근데, 보기가 좀 어려웠어요. 강남 브로드웨이 딱 한군데서 하던데, 그것도 오전 10시 30분이랑, 새벽 4시에만 하는 것있죠. 전 일요일 오전 10시 30분에 봤답니다. 왠 열성이 뻗쳤냐 하시겠지만, 예상보다 꽤 괜찮았어요. 그리고 무엇보다 다이앤 래인이 나이는 좀 들었지만 매우 아름 답게 나온다는 사실!! 그리고 이탈리아를 그리워하는 분들껜 딱 어울릴만한 영화였답니다. 내용은 이혼녀가 이탈리아에서 자신의 삶을 되찾는다는...구태의연한 소재지만, 의외로 로맨스보다는 아기자기하게 정을 나누며 사는 사람들의 소박한 모습..

구로사와 기요시의 공포영화 [강령]

몇해전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은 일본영화와 관련된 기사의 첫머리를 이렇게 시작했다. “일본 영화계에는 두명의 구로사와가 있다. 한명은 구로사와 아키라고, 또 다른 한명은 구로사와 기요시다.” 우리에게는 공포영화 감독정도로 알려져 있는 구로사와 기요시를 세계적인 거장감독인 구로사와 아키라와 같은 반열에서 거론하고 있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타임지의 지적은 기요시의 영화가 단순한 공포물의 차원을 넘어 오늘날 일본사회, 나아가 현대인의 일상을 짓누르는 강박관념의 심연을 건드리는 날카로움과 깊이를 확보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하겠다. 기요시의 최근작 두편이 국내에서 개봉된다. 2000년작 ‘강령’과 2003년작 ‘밝은 미래’다. ‘강령’이 전형적인 공포물에 가깝다면, ‘밝은 미래’는 불안한 젊음의 내면을 따..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이미지의 육화(肉化)란 바로 이 영화를 두고 한 말이다. 4월 2일 국내개봉하는 멜 깁슨 감독의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는 성서에 기록된 2천여년의 사건을 '지금 바로 우리 눈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처럼 생생하게 펼쳐놓았다. ″예수의 고난을 가능한 현실적으로 묘사하고 싶다″는 멜 깁슨 감독의 야심은 100% , 아니 그 이상을 달성하는데 성공했다. 가시 면류관이 예수의 이마를 찌를 때 관객들은 마치 자신의 살갗 속으로 가시바늘이 파고드는 고통을 느끼게 되며, 철못 박힌 채찍이 예수의 육신을 갈갈이 찢어 발길 때 관객은 자신이 살점이 떨어져나가는 듯한 아픔과 신음을 참기 어려워진다. 예수의 두 손과 발에 대못이 박히는 장면에서 차라리 눈을 감고 싶어진다. 슬로모션으로 그 순간의 참혹함을 가능한 오래 연..

[사랑할때 버려야할 아까운 것들]...미국영화 속 중년 독신남녀에 관한 몇가지생각

다이앤 키튼 주연의 [사랑할때 버려야할 아까운 것들], 어떻게 보셨나요. 일단은 할리우드 영화에선 보기 힘든 50대 말 중년여성의 사랑, 그것도 섹슈얼한 욕구를 가진 존재로서의 여성을 그리고 있다는 점이 신선하게 느껴지더군요. 중년의 사랑이라면, 육체적인 부분을 은근슬쩍 생략하고 지나가는 다른 미국 상업영화들과 달리, 주인공의 벗은 몸까지 정면에서 드러내고 있다는 점 (물론 눈깜짝하는 순간에 지나가기는 하지만 ^ ^) 도 흥미로웠구요. 이 영화가 중년의 로맨틱 코미디로 가능했던 것은 , 아무래도 다이앤 키튼의 매력이 가장 큰 힘이 된 듯합니다. 보톡스를 맞지 않고 자연스럽게 주름진 얼굴, 그리고 중년의 몸도 잘 관리만 하면 아름다울 수있다는 사실을 키튼은 이 영화에서 증명해내고 있죠. 할리우드 영화에서 ..

흑백고전영화 2편 추천합니다^^ -인 어 론리 플레이스, 엔드 오브 어페어

이번 설날 연휴에 우연히 두편의 DVD를 보게 됐습니다. 최근 국내 출시된 험프리 보가트의 50년작 [인 어 론리 플레이스(In A Lonely Place)]란 작품과 데보라 커 주연의 55년작 [엔드 오브 어페어(End of Affair)]란 작품이었죠. 흑백 고전영화를 좋아하는 편이긴 하지만, 최근들어선 웬일인지 통 볼 기회가 없었거든요. 그런데 전혀 기대하지 않고 봤던 두 편의 영화에 반해버려서, 아예 옛 영화들을 작심하고 찾아다니며 봐야겠다는 생각까지 갖게 됐지요. 흑백영상은 컬러영상과는 또다른 깊이와 분위기를 갖고 있지요. 특히 흑백 콘트라스트가 강하고, 조명의 예술적인 쓰임새를 잘 살펴볼 수있다는 점에서 더 흥미로운 것같습니다. 물론 최근에도 흑백 영화를 만드는 감독들이 있지요. 코언 형제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