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여우의 세상 이야기/내가 본 세계

재미로 보는 교황의 역사- 카노사의 굴욕부터 아비뇽의 유수까지

bluefox61 2013. 2. 12. 10:40

교황 베네딕토 16세의 전격적인 퇴위발표 뉴스를 계기로 굴곡 많은 교황의 역사를 다시한번 들여다보는 것이 어떨지. 외신들은 생존 교황이 사퇴하기는 1415년 그레고리우스 12세가 추기경들에 의해 파면돼 강제적으로 사임한후 598년만이라고 언급했다. 당시 교황청에서는 과연 무슨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카노사의 굴욕


교황과 관련해서, 모든 학생들이 세계사 시간에 배우는 사건이 바로 '카노사의 굴욕'이다.


1077년 1월경, 신성로마제국의 하인리히 4세가 자신을 파문한 교황 그레고리오 7세를 만나기 위해 이탈리아 북부의 카노사 성으로 가서 관용을 구한 사건을 말한다. 교회의 성직자 임명권인 서임권을 둘러싸고 분쟁하던 신성 로마 제국 황제와 로마 교황의 대립의 정점에 있었던 사건으로 이후 교회의 권력에 세속 권력이 굴복한 대표적인 사건으로 기록돼있다. 

개혁적인 교황 그레고리오 7세는 재임 초기부터 강력한 교회 개혁과 쇄신운동을 펼쳤는데 당시 세속의 군주가 관습적으로 가지고 있던 성직자 임명권, 즉 서임권을 다시 교회로 가져오려고 시도하였다. 당시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였던 하인리히 4세는 이에 반발하였고 교황은 그를 파문하고 황제를 도와주는 귀족이나 사제도 파문한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하인리히는 계속 저항하고자 했으나 이미 몇몇 독일 귀족들은 그에게서 등을 돌렸고 새로운 황제를 추대할 움직임이 있었다. 이미 반란이 일어 나고 있었기 때문에 하인리히는 어쩔 수 없이 교황과 화해할 수밖에 없었다.


1076년 겨울 교황 그레고리오 7세는 하인리히 4세가 이탈리아로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황제가 자신을 몰아내려고 오는 것으로 알고 두려워 했는데 이때 카노사 성의 백작부인 마틸데는 교황을 자신의 성으로 초청하여 하인리히의 공격에 대비한 피난처로 삼게 하고 자신의 성채에서 머물게 했다. 마틸데는 서임권 분쟁 때 열열히 교황을 지지한 교황의 절친한 동맹자였다.


하인리히 4세는 독일에서 자신의 입지가 점점 줄어들고 반란의 기미가 보이자 교황을 만나기 위해 이탈리아로 떠났다. 그는 쥐라 산맥을 넘으면서, 자비를 구하는 고해자의 모습을 하고 카노사를 향해 갔다. 수도사들이 입는 거친 옷과 신발을 신지 않은 맨발로 1077년 1월 25일 교황이 머물고 있는 카노사 성문 앞에 도착했다. 그러나 교황은 하인리히를 성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하인리히는 계속 성문 앞에서 고해복을 입고 금식을 하며 교황의 허가를 기다렸다. 교황은 하인리히를 용서하기 싫었지만 1월 28일 성 안으로 들어오게 허락했고(일설에 의하면 황제 하인리히는 무릎을 꿇고 교황에게 빌었다고 전해짐) 그 날밤 마틸데와 하인리히는 함께 교황이 집전하는 미사에 참석함으로써 하인리히에 대한 교황의 파문은 종결되었다.


역사의 현장인 이탈리아 카노사 성.현재는 거의 무너진 성채만 남아있다


하인리히는 교황의 사면을 받았지만 자신의 권력까지 복권받은 것은 아니었다. 독일 제후들은 라인펠트의 루돌프를 황제로 추대했고 하인리히는 루돌프를 상대로 내전에 돌입했다. 교황은 1080년 하인리히를 다시 한번 파문하고 폐위를 선언했다. 그러나 내전을 끝내고 승리한 하인리히 4세는 이탈리아로 쳐들어가 결국 오랜 숙적 그레고리오 7세를 로마에서 쫓아내고 대립교황 클레멘스 3세를 새 교황으로 세웠다.

그레고리오 7세는 아풀리아-칼라브리아 공작 노르만인 로베르토 기스카르의 도움으로 겨우 목숨을 건져 로마를 탈출하였고 결국 1085년 비통함 속에서 살레르노에서 병사했다.


오늘날, 카노사라는 말은 일종의 굴복, 복종, 항복을 나타낸다. ‘카노사로 가다’라는 표현("go to Canossa"; 독일어: "nach Canossa gehen"; 스웨덴어: "Canossavandring"; 이탈리아어: "andare a Canossa")은 하기는 싫지만 억지로 굴복해야 하는 상황을 나타내는 말로 자주 쓰인다.



'아비뇽의 유수'의 시발점이 된 '아나니성 교황 유폐사건'의 그림


그로부터 약 200년후 이번에는 교황이 세속권력에 무릎을 꿇는 이른바 '아비뇽의 유수'사건이 벌어진다.

십자군 전쟁이 실패로 끝나자 이를 주도했던 교황의 권위가 급속히 몰락하는데, 그 상징적 사건이 바로 1303년 아나니 사건이다. 

프랑스 국왕 필리프 4세가 전비충당을 위해 교회에 세금을 부과하자 보니파시우 8세 교황이 반발하였고, 이에 국왕은 교황의 별궁인 아나니를 습격하고 교황을 납치한 후 3일간 유폐시켜 퇴위를 강요하였다. 나중에 교황은 풀려났지만 곧 죽게 되고, 그 후 프랑스 국왕의 간섭하에 새로운 교황인 클레멘스 5세가 선출되었다. 


클레멘스 5세는 프랑스 국왕의 요청에 따라 로마로 돌아가지 않고 아비뇽에 새롭게 교황청을 만들면서 가톨릭은 프랑스 국왕의 보호 아래 놓이게 된다. 이것을 고대 유대인들이 바빌론으로 끌려간 사건에 빗대어 ‘아비뇽 유수’라고 부른다. 기간은 1307년부터 1377년까지이다. 


1377년, 교황 그레고리오 11세가 드디어 로마로 귀환함으로써 아비뇽 유수기는 종식되었다. 그레고리오 11세는 다음해에 선종하였으며, 로마에서 새로 선출된 교황 우르바노 6세가 등극하지만, 프랑스인 추기경들이 콘클라베가 무효라고 선언하고 일방적으로 탈퇴하여 1379년 아비뇽에 또다른 교황청을 세워 이른바 '대립 교황'을 선출하였다. 이로서 로마와 아비뇽 두 곳에 교황에 존재하는 극심한 혼란이 빚어지게 된다. 



로마 가톨릭교회의 극단적 혼란기를 상징하는 프랑스 아비뇽의 교황청


교회 분열은 각각의 교황들이 그들의 후계자를 내면서 더욱 골이 깊어졌다. 정통교황으로 인정되는 로마계는 우르바노 6세 선종 이후 보니파시오 9세(1389~1404) 인노첸시오 7세(1404~1406) 그레고리오 12세(1406~1417)로 이어졌고 아비뇽계는 글레멘스 7세에 이어 베네딕도 13세(1394~1417)가 후임 교황이 됐다.


분열의 양상 속에서 교회 일치를 위한 노력은 계속되었지만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 1409년 3월 25일 양측 추기경들은 피사에서 교회회의를 열어 6월 5일 제15회기에서 두 교황은 하나의 성교회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행동은 그 선언을 배반한 까닭에 이교 및 이단의 으뜸이라고 단죄하여 해임하고 26일 양측 합동선거에서 만장일치로 밀라노의 대주교인 필라르기(Pietro Philarghi)를 알렉산데르 5세로 교황에 선출했다. 그러나 두 교황이 사임을 거부하고 공의회 교황을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한 교회 안에 세명의 교황이 존재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결국 공의회는 교황이 3명이 있던 상황에서 정통 교황이 누구냐하는 고민에 빠지게 됐고 결국 3명의 교황을 모두 퇴진시키고 새 교황을 선출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피사계의 요한 23세를 1415년 5월 29일 해임시켰고 로마계의 그레고리오 12세는 1415년 7월 자진 사임했다. 끝까지 사임을 거부한 아비뇽계의 베네딕도 13세는 7월 28일 폐위시키면서 11월에 마르티노 5세를 선출함으로써 이교가 종식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