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여우의 세상 이야기/내가 본 세계

콘클라베에 관한 모든 것

bluefox61 2013. 2. 12. 10:33

새 교황을 선출하는 추기경단 회의인 콘클라베는  ‘열쇠로 잠근다’는 뜻으로, 외부와 차단된 교황 선거 장소를 뜻한다. 콘클라베는 교황이 서거한 뒤 15일(필요에 따라 사흘은 더 연장 가능) 안에 열게 되어 있다. 교황 선거를 위해 외부와 차단되는 장소는 바티칸 내 시스티나 성당이다. 


오늘날과 같은 형태의 콘클라베 제도가 도입된 것은 1274년 제2차 리옹 공의회 때이다. 초대 교회 시절의 교황 선출은 로마에 거주한 성직자와 평신도들을 중심으로 행해졌었다. 역대 교황들은 선거법을 변경하거나, 원한다면 추기경단의 일원을 교체하는 일이 인정되었지만, 후계자를 지명하는 것만은 용납되지 못했다. 

1059년 이래, 추기경단이 교황 선출의 임무를 담당하게 되었지만, 1268년 교황 클레멘스 4세의 선종 이후의 교황 선거가 탁상공론만 계속된 채 3년 가깝게 공석이 계속 되어 조바심이 난 로마 시민들은 선거자들을 밖으로 나올 수 없도록 가두었고, 이 이야기가 콘클라베의 기원이라고 한다. 콘클라베라고 하는 말은 라틴어의 ‘쿰 클라비’(cum clavi)에서 유래한다. 



선거방법은 비밀투표이며, 첫날에는 오후에만 , 둘째날에는 오전 오후 두차례 실시된다. 요한 바오로 2세때 규정을 바꿔서 12일이 지나도 합의가 안될 경우, 재적 3분의 2가 아니라 과반을 넘기면 새 교황으로 인정하도록 했다가 , 베네딕토 16세때 다시 3분의 2 찬성으로 규정이 바뀌었다. 합의를 존중한다는 의미에서이다. 투표에는 80세 이하 추기경들만 참석한다. 약 120명이 될 것으로 추정된다. 


투표에서 필요한 표수를 획득한 추기경이 나오면 추기경단 비서와 교황청 전례 위원장을 성당 안으로 불러들일 수 있다. 수석 추기경은 후보자에게 교황직을 수락할지 말지를 묻는다. 

이때 후보자는 절차에 따라 세번을 거절한 뒤 주교급이라면 그 시점에서 교황직을 받게 된다. 만약 사제급이라면 수석 추기경으로부터 주교 서품을 받은 다음, 교황직을 맡는다. 평신도가 선택되었을 경우는, 수석 추기경이 사제 서품을 한 다음 곧바로 주교 서품을 거행한다.


535년 이래, 교황은 취임 시에 자신의 교황식 이름을 결정하는 관습이 내려오고 있다.투표용지를 태운 연기로 선거 결과를 알리는데, 지붕 위 굴뚝에서 검은 연기가 나면 미결, 흰 연기가 나면 새 교황이 탄생했다는 뜻이다. 이때 종도 함께 울린다.



신임 교황은 선출 직후 ‘눈물의 방’으로 이름 붙여진 시스티나 성당 근처 조그만 방으로 안내되어 그 안에서 미리 준비한 세 가지 사이즈로 제작된 교황 전용 의복 중에서 자기 몸에 맞는 옷을 선택해 몸에 걸친다. 그다음 추기경단이 대기하고 있는 성당으로 돌아와 궁무처장으로부터 새로운 '어부의 반지(라틴어: Anulus piscatoris)를 받고 제단 앞에 자리 잡고 있는 의자에 앉아 추기경단 한 사람 한 사람으로부터 축하 인사를 받는다. 그다음에는 부제급 추기경의 최연장자가 성 베드로 광장이 내려다보이는 발코니에 나와 하베무스 파팜, 즉 라틴어로 신임 교황이 선출되었음을 발표한다.


2005년 콘클라베는 4월 18일 오후 4시 30분에 시작됐다.


콘클라베 개막을 앞두고 투표권을 가진 추기경들은 17일부터 숙소인 산타 마르타 호텔에 격리 투숙됐다. 이들은 18일 오전 10시 성베드로 성당에서 특별 미사를 연 뒤 오후에 시스티나 성당으로 이동해 교황 선출 절차에 돌입했다. 

콘클라베에 참여한 추기경 115명을 지역별로 나누면 유럽 58명, 중남미 20명, 북미 14명, 아프리카 11명, 아시아 10명, 오세아니아 2명 순이었다. 당시 이틀에 걸친 투표 끝에 요제프 라칭어 독일 추기경이 새 교황으로 선출됐다. 당시 타임지는 베네딕토 16세가 4차례의 투표 끝에 총 115표중 95표를 얻어 교황에 선출됐다고 보도했다. 

타임지는 라칭어 추기경이 지난 18일 콘클라베의 첫 투표에서부터 앞서 나가다가 2차투표에서는 60표를 획득했다고 보도했다. 이어 다음날 실시된 3차 투표에서 라칭거 추기경은 교황선출에 필요한 총투표수의 3분의 2 이상, 즉 77표에 약간 모자라는 표를 얻은뒤 마지막 4차 투표에서 95표를 획득했다는 것. 그러나 콘클라베의 투표결과는 교황의 명령이 있을 때만 공개되기 때문에 정확히 몇표를 얻었는지는 영원히 공개되지 않는게 일반적이다. 


역사상 가장 긴 콘클라베는 1268년의 콘클라베였다. 무려 3년 동안이나 투표가 계속됐지만, 추기경단은 번번이 교황 선출에 실패했다. 참다못한 일반 신자들은 추기경단이 머물고 있던 건물 지붕을 부숴버리고, 빵과 물만 공급하면서 직접적인 압력을 행사했다. 

이 결과 선출된 그레고리우스 10세는 당시 경험을 살려 콘클라베가 3일내 새 교황을 선출하지 못하면 점심과 저녁식사량을 반으로 줄이고, 5일 지나면 빵과 물, 와인만 제공하는 식으로 규정을 바꾸기도 했다.콘클라베동안 대규모 사상자가 발생한 경우도 있다. 1623년에 열린 콘클라베에서는 한여름 찌는 듯한 날씨 때문에 19일 동안 말라리아로 추기경 8명과 보좌진 40여명이 사망했다.


교황청은 콘클라베가 여름철에 열리는 것을 가장 꺼린다. 이탈리아는 여름이 워낙 뜨거운데다가, 모든 문을 걸어잠근 채 콘클라베가 진행되기 때문에 에어컨 시설이 없던 시절엔 어려움이 많았다. 1241년 여름 콘클라베의 경우, 추기경들이 두통, 탈진, 탈수증, 심장마비 등을 호소하는 일기를 남겼다. 더위로 인해 가장 유력한 후보였던 로베르토 디 소메르코테스 추기경이 사망했는가 하면, 70일 만에 당선된 새 교황은 콘클라베에 지친 나머지 불과 17일후 사망했다. 1912년 콘클라베도 8월에 열려 단 2일 만에 요한 바오로 1세를 선출했지만, 일부 추기경은 “너무 더워서 죽을 뻔했다”고 당시 경험을 회상했다.


1978년 콘클라베에서는 요한 바오로 2세의 선출을 알리는 연기가 흰색이 아니라 회색으로 피어올라서 일대 혼란을 빚기도 했다. 이후 콘클라베에서 흰색연기와 함께 종을 치는 것도 혼선을 막기 위해서다. 교황청 관계자들은 2005년 당시  사상 최초로 하이테크 도청장치와의 전쟁이 벌어진 콘클라베로 기록될 것으로 전망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