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여우의 영화 이야기/내가 본 영화들

제로다크서티..그리고 캐스린 비글로

bluefox61 2013. 3. 4. 11:19
캐스린 비글로는 캐릭터의 감정에 개입하지 않는 감독이다.
이라크전의 폭탄물 해체요원을 그린 '허트로커'나 오사마 빈 라덴을 찾는 CIA 요원들을 그린 '제로 다크 서티'로 세계적인 유명감독이 되기 이전에도 , 비글로는 '블루스틸'이나 '죽음의 키스'' 폭풍 속으로''스트레인지 데이즈' 등의 작품에서 캐릭터의 감정보다는 그가 처해있는 현실과 딜레마를 일말의 동정없이 가혹할 정도로 극단까지 밀어부쳐 묘사하는 스타일의 감독이었다. 

 

                     
'제로 다크 서티'는 9.11테러 현장에 있던 사람들이 가족이나 구호요원들과 나누는 전화통화 내용들을 들려주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아니, 장면이란 말은 정확하지 않다. 관객은 깜깜한 극장안에 앉아 아무 것도 나오지 않는 깜깜한 스크린을 마주본채  테러 현장에서 절규하는 사람들의 마지막 전화통화를 무기력하게 들어야하기 때문이다. 미국 국민들로서는 그 자체가 영화를 보기도 전에 감정이입을 하게 만드는 장치일 수있지만, 감독은 일체의 감상이나 영화적 장치를 동원하지 않고 오로지 전화통화 녹음만을 관객들에게 들려주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
 

논란이 많은 고문장면은 영화 속에서 상당히 오랜 시간을 차지할 정도로 매우 비중이 큰 부분이다. 영화상으로는 CIA 수용소에서 고문을 통해 수감자들로부터 얻어낸 정보가 파키스탄 아보타바트의 대저택에 숨어있는 빈라덴을 찾아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나온다. 고문장면은 스너프 필름처럼 끝까지 보여주는 식은 아니지만, CIA 업무의 일부분으로서 매우 건조하게 묘사된다. CIA 요원들의 고문에 대한 자기고뇌라든지, 고문을 당하는 수감자의 고통과 내적 갈등같은 것은 거의 없다. 고문에 대한 감독의 비판적 시각이 부재한다는 비판이 나오는 것도 바로 이런 점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9.11테러에 대한 보복으로 미국이 어떻게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 전쟁을 시작했으며, 고문과 도청, 이라크 아부 그라이브 감옥의 인권유린, 국제법을 무시하고 유럽 곳곳에 설치한 CIA 비밀 감옥의 존재 등에 대해 이미 보도로 알고 있는 사람들의 눈에 아무런 문제의식없이 고문을 행하는 미국 CIA 요원들의 모습은 괴물을 잡기 위해 괴물로 변해버린 미국을 상징하는 존재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 속에 드러나는 미국 중심적 시각은 어쩔 수가 없다.  비글로의 영화가 영웅주의와는 거리가 멀지만, 빈라덴을 잡겠다는 강박관념에 자로잡힌 CIA 여성요원 '마야'가 결국엔 미국식 영웅의 이미지를 갖게 되는 것이 그렇다.  

영화 마지막에서 마야는 파키스탄에서 작전을 성공적으로 마무리지은 후 귀국행 군수송기에 올라타 홀로 의자에 앉아 멍하게 있다가 울음을 터트린다. 목적을 이루고 난 후 밀려오는 단순한 허탈감 때문에 마야는 눈물을 흘린 것일까. 그 장면에서 관객은 빈라덴은 죽었지만, 과연 무엇이 달라졌는가를 자각하게 된다. 영화 속에 한 지하디스트가 말한 것처럼 지하디즘은 빈라덴이 없어도 "100년동안 지속될"지도 모른다.

 


'제로 다크 서티'는 비글로의 연출력이 무르익을대로 익었음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특히 아보타바트 빈라덴 저택 급습 작전을 기묘할 정도로 고요하게 묘사한 장면에서는 비글로의 놀라운 연출력을 절감할 수있다. 

'제로 다크 서티'는 어쩔수없는 미국적 시각으로, 어떤 이에게는 불쾌감을 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가지 이론의 여지가 없는 부분은 비글로가 당대 최고의 감독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
 
 
캐스린 비글로(61)를 따라다니는 수식어는 여러가지이다.
가장 먼저, 그는 할리우드의 대표적인 액션 영화 감독 중 한명이다. 데뷔작인 1978년작 '셋업(Setup)'부터 오토바이 갱단을 소재로 한 83년 작 '더 러브리스(The Loveless)' , 스타일리시한 뱀파이어물인 87년작 '니어 다크(Near Dark)' , 그리고 그에게 명성을 가져다준 90년작 '블루스틸(Blue Steel)'과 91년작 '폭풍속으로 (Point Break)'를 거쳐 2008년작 '허트로커(Hurtlocker)'에 이르기까지 그는 할리우드의 여성감독으로는 특이하게 액션물의 한길만을 걸어온 사람이다. 그야말로 여장부 중 여장부라해도 과언이 아니다.

두번째는 아카데미 역사상 최초로 감독상을 수상한 여성감독이란 수식어이다. 영어권 영화계에서 활동하는 여성감독들이 여러명에 이르고 이중에는 화제작을 발표한 사람도 여럿임에도 불구하고 , 아카데미 영화상에서 감독상을 수상하기는 2009년도 수상자인 '허트로커'의 비글로가 최초이자 지금까지도 유일하다.

세번째는 제임스 캐머런 감독의 전처란 타이틀이다. '터미네이터''어비스''타이타닉''아바타'의 캐머런 감독은 5번 결혼했는데, 3번째 부인이 바로 세살 연상의 비글로였다. 두사람의 결혼생활은 2년(1989~1991)밖에 지속되지 않았는데, 이후에도 동료감독으로서 두사람의 관계는 그리 나쁘지 않았던 듯하다. 이혼후 만든 영화를 캐머런이 프로듀싱해줬는가하면,   2009년 비글로가 '아바타'를 물리치고 '허트로커'로 감독상을 탔을때 캐머런은 "받을 사람이 받았다"며 축하를 아끼지 않았다.

비글로가 논쟁적인 작품으로 돌아왔다. 소문이 자자했던 '제로 다크 시티(Zero dark City)'이다. 오사마 빈라덴 사살작전을 소재로 한 이 영화는 제작단계에서부터 숱한 논란을 불러일으키더니, 대통령선거 때 표심에 영향을 줄 가능성이 있다는 보수파의 주장에 따라 개봉시기를 10월말에서 해를 넘겨 1월로 연기하기도 했다. 그런가하면 영화 속에서 미군이 고문을 통해 빈라덴 행방에 관한 정보를 알아내는 장면을 둘러싸고 "고문을 긍정적으로 그렸다"는 비판에 휩싸이기도 했다.

다음은 비글로의 타임지 인터뷰이다.

-개봉후 반응이 어떤가. 예상했던대로 인가.
"그렇기도하고 아니기도 하다. 영화가 논쟁을 불러일으키리라고는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줄을 예상하지 않았다.  이 영화가 자랑스럽다. 영화를 완전히 지지한다. 나는 '제로 다크 서티'가 힘의 사용에 관한 질문을 제기한 매우 도덕적인 영화라고 생각한다. 빈라덴색출이란 이름으로 어떤 일이 행해졌는가란 질문을 제기하고자 했다."

-문제의 고문장면에 대해 당신과 출연진은 어떤 입장인가.
"개인적인 차원에서 그 장면은 정말로 힘들었다. 관객들은 외면하고 싶지만 그래선 안된다는 것을 알고있다. 영화 속에서 제시카 채스테인이 시선을 돌리고 외면하듯, 많은 관객들도 그런 반응을 나타내거나 마치 고문실에 있는것같은 느낌을 받은 것같다. 있는대로 솔직하게 묘사하려고 했다. "

-'제로 다크 서티'를 포함해 당신의 영화들은 헤로이즘(영웅주의)에 대해 미묘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들은 근본적으로 매우 인간적이다. 전부 옳지도, 전부 그릇되지도 않다. 인간 본성은 다면적이고 결점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제시카 채스테인이 연기한 인물은 극단적으로 용기있는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고문 장면은 어떻게 연출했나. 마크 볼의 각본대로 한 것인가, 아니면 어떤 예술적인 가미를 했나. 
" 직접적인 묘사에 주력했다. 하지만 영화가 상원청문회 보고서와 같은 수준의 정밀함을 지닐 수는 없다. 영화이고, 배우와 세트가 있다. 10년 추적과정을 2시간 반으로 압축하는데에서 비롯된 편집상의 선택, 인물통합, 누락 등이 있을 수있다."

-정보를 캐내기 위한 심문기법에 대한 묘사를 둘러싼 논란이 많은데..
"명확하게 밝혀진 사실은 영화에서도 명확하게 그려진다. 오사마 빈라덴은 파키스탄 아보타바드에서 살해됐다. 그건 명확한 사실이다. 불투명한 사실은 영화에서도 불투명해질수밖에 없다. 전문가들의 지적에 따르면, 어떤 정보들은 수감된 사람들에게서 나왔다. 상원보고서의 기밀이 해제되면 (그것에 대한 )더 많은 정보를 얻을 수있을 것이다. "

-성장과정에 대해 이야기해달라
"캘리포니아 샌 카를로스의 해변가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영어선생님, 아버지는 페인트공장 관리인이었다. 아버지의 꿈은 만화가가 되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내게 스케치와 캐리커쳐를 그려주곤 했다. 아버지는 자기자신을 극도로 매력이 없는 인물로 생각했고, 자기 캐릭터를 과장해 묘사하곤 했다. 가끔 나는 예술에 끌린 이유가 무엇일까 궁금해지곤 하는데, 아버지가 이유 중 하나인 것같다는 생각을 한다. 6살때부터 그림을 그렸다. 고등학교 졸업후에는 샌프란시스코 예술원에 진학했다. 쿠닝과 대형 캔버스와 오일을 사랑했다. 오일 냄새와 커다란 붓을 사랑했고,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늘 물감을 뒤집어쓰고 살았다. 무릎을 꿇으면 바지에 물감이 너무 두껍게 덕지덕지붙어있어서 바지가 찢어져 버릴 정도였다.  "

-뉴욕 은행금고에서 살았다는 이야기도 있던데.
"1970년대 초반이었다. 교수 한분이 내 작품 슬라이드를 휘트니 인디펜던트 스터디 프로그램에 제출했는데, 내가 덜컥 붙어버린거다. 휘트니에서 준 스튜디오가 지금의 트라이베카 지역에 있는 은행금고였다. 지하 3층이었다. 슬리핑백을 끌고 얼음이 얼것같은 싸늘한 은행 금고로 내려가곤했는데 가끔 총소리가 들여오긴해도 걱정하는 입주자들은 없었다. 멋진 커뮤니티였다. 자기 작업에 대해 끊임없이 대화하고, 서로 상대방에게 도전하곤 했다. 영화에서는 그런 것을 발견하지 못한다. 다른 영화감독들과도 마찬가지이다." 

-지도 교수 중 한 명이 수전 손타그였다고 하던데. 
'그분이 다리를 꼬고 편안히 앉아서 말하기전에 자신의 생각을 모으곤 하던게 지금도 생각난다. 당시 나는 회화에서 개념미술로 옮겼고 환경미술, 거리에서 발견한 거대한 메탈 실린더 같은 물건들을 이용한 작업 등을 했다. "

-1980년대초 '더 러브리스'란 작품을 발표했다. 어떻게해서 미술에서 영화로 방향을 바꿨나.
"미술에서 영화로 축을 옮기면서 가장 큰 차이점은 내러티브였다. 그동안 내러티브가 없는 작업을 해왔기 때문이다. 당시 앤디 워홀과 대화를 나눈 적이 있는데, 미술은 엘리주의적인 반면 영화는 훨씬 더 포퓰리스트적이라고 하더라. 현대미술관에 가서 말레비치와 몬드리안 그림을 보면서 '이 작품의 관객은 너무 한정적이다'란 생각을 했다. 반면 영화는 누구나 쉽게 접근이 가능하다. 정치적인 관점에서 그건 흥분되는 일이었다. 그래서 극영화 분량이 될만한 글을 쓰게 됐고, 그때 쓴 것이 1950년대 모터사이클에 관한 것이었다. 거기에 흥미로운 힘의 도상학(iconography)이 있다고 생각했다. 케네스 앵거의 '스코피오 라이징', 더글러스 서크의 '리튼 온 더 윈드(Written on the wind)'에 큰 영향을 받았다. 서크에게 '더 러브리스'를 보여주기 위해 스위스를 갔는데, 아쉽게도 당시 서크는 시력을 잃은 상태였다. 하지만 그의 아내가 옆에 앉아서 화면에 등장하는 장면을 대신 설명해줬다. 스위스에 있는동안 패트리샤 하이스미스도 만났는데, 그때 내가 돈이 없었기때문에 하이스미스가 자기 작품 중 하나의 판권을  6개월간 공짜로 제공해주기도 했다. 그 작품을 각색했는데, 영화로 만들지는 못했지만 그일을 하면서 영화 각본쓰기의 문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런 다음 '니어 다크'를 썼다.

-'니어다크'는 당시에 상당히 앞선 뱀파이어영화였다.
"좀 이단적인 면이 있었다.  당시만 해도 뱀파이어는 나쁜 남자였는데, 이 영화에서는 착한 남자로 나오니까."

-당신 영화 대부분은 주인공들의 복잡한 관계를 다루는데..
"나는 영화적 수식을 없애고 싶었다. 명확한 선이라든가, 영웅에 대한 아이디어 등등 말이다. 'k19'는 미국인이 아니라 러시아인을 그린 영화란데 매력을 느꼈다. 투자자 사무실에 갔던 일이 생각난다. 나토 기지 근처에서 진짜 일어났던 일이라는 둥 한창 설명을 하는데 투자자가 묻는거다. "그러니까 누가 좋은 사람이란 이야기요?" 내가 말했다. "무슨 소립니까. 러시아인이죠." ,투자자가 또 물었다. "아니, 그러니까 어느쪽이 미국인이냐니깐?"  '허트로커'를 만들때는 전쟁에 대해 이야기할 수있는 기회란게 매력적이었다. 나는 전쟁은 반대하지만, 전쟁에 내몰린 사람에 대해서는 지지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