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여우의 영화 이야기/내가 본 영화들

김지운의 걸작 '달콤한 인생'

bluefox61 2013. 8. 9. 14:56

 

(*2005년에 쓴 글인데 다른 홈피에서 이사오면서 빠트리고 온 것을 옮겨옵니다. 다시 읽으니, 문득 이 영화를 다시 보고싶어지네요

그때나 지금이나 제게 김지운의 최고작입니다)

 

 

 

김지운과 류승완은 , 어떤 면에선 과대평가돼온 감독이었다고 할 수있다.

 

[조용한 가족]과 [반칙왕]을 통해 한국에서는 보기 드믄 블랙유머 감각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김지운은 [ 장화 , 홍련]을 거치면서 동세대에서 가장 개성있고 흥행력까지 갖춘 감독으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늘 기대가 높았던 만큼 , 그의 작품은 또한 아쉬움을 남겼던 것도 사실이다. [조용한 가족]이 잔혹코미디의 장르를 개척하기는 했지만 그 유머는 폐부를 찌를만큼 강렬하지 못했고, [반칙왕]은 한 평범한 회사원이 반칙왕 레슬러로 성공한다는 독특한 설정에도 불구하고 중산층의 존재의미 자체를 건드리는듯하다가 멈칫한 느낌이었으며, [장화,홍련]은 김지운의 이전 작품과 달리 본격적인 호러란 점과 이미지(또는 장식)의 과잉을 통해 한 집안(또는 수연이란 한 인물) 내부의 숨막힐 듯한 공기를 매우 감각적으로 표현해낸 성과에도 불구하고 다소 허약한 내러티브 구조와 기존 공포영화의 ‘깜짝요법’을 반복하고 있다는 점 때문에 비판을 받기도 했다.

 

결론적으로 김지운의 작품들은 어느 누구도 모방하기 힘든 자신만의 개성에도 불구하고 영화 속 캐릭터의 정수를 파고드는 듯하다가는 결국 끝까지 밀어붙이지 못하고 끝내버리는 한계를 드러내왔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길지 않은 필모그래피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이었던 작품은 오히려 옴니버스 영화 ‘쓰리’ 중 한편이었던 ‘메모리스’였다. 호러와 누아르가 합쳐진듯한 이 중편 영화는 돌이켜보면 김지운이 ‘장화 홍련’과 ‘달콤한 인생’으로 나아가는 결정적인 분수령이 됐던 영화였을 뿐만 아니라 , 전형적인 한 중산층 부부의 붕괴를 통해 우리 사회의 물질주의, 도덕관, 결혼제도, 욕망의 맥을 간결하면서도 정확하게 짚었다는 점에 좀더 높게 평가받아야할 작품이었다.

 

 류승완 역시 비슷하다. 단편영화계에서 주목받던 그가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를 가지고 세상에 나왔을때 , 짜깁기라고도 할 수있을 이 영화가 담고있는 생짜 그대로의 에너지와 뚝심있는 연출력은 진정 신선한 충격이었다. 류승완은 이후 ‘피도 눈물도 없이’와 ‘아라한 장풍대작전’ 두편의 작품을 통해 짧은 시간에 한국상업영화의 차세대주자로 기대를 한몸에 받게 됐다.

그러나 액션에 대한 류승완의 남다른 애정은 그의 장점이자 동시에 그의 한계가 돼왔다. 화면 가득히 펼쳐놓는 스타일리시한 액션에 가려, 정작 인물의 깊이는 부족했던 것이 사실이다.

 

 

다시 첫질문으로 돌아간다. 그렇다면, 김지운과 류승완은 정말 과대평가된 감독인가.

‘ 달콤한 인생’과 ‘주먹이 운다’는 두 감독의 성숙과 성장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 과대평가란 비판을 기분좋게 깨부수고 있다.

이미 상업적으로 안정된 감독에게서 새로운 깊이와 폭을 확인할 수있다는 것은 , 새로운 재능을 발견하는 것 못지 않은 기쁨이다.

 

 ‘달콤한 인생’은 김지운의 본격적인 첫 누아르이다. 장 피에르 멜빌의 ‘사무라이’부터 퀜틴 타란티노의 ‘킬빌’까지 , 마틴 스코세즈의 ‘좋은 친구들’부터 브라이언 드 팔마의 ‘스카페이스’까지 수많은 영화들이 혼합된 듯한 이 작품은 , 냉철한 일솜씨로 정평난 조직폭력단의 중간 보스 선우(이병헌)를 중심으로 그 주변인물들이 하나하나 비극적이면서도 어이없는 종말을 맞는 일종의 ‘파멸의 오딧세이’라고 할 수있다.

 

이전 작품에서 내러티브의 허점들이 적지 않게 눈에 띄였던 것과 달리, '달콤한 인생'은 짜임새 면에서 김지운의 발전을 보여준다. 영화의 전개는 앞뒤에서 제시되는 화두와 한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한 댓구를 이루고 있다.

 “흔들리는 것은 나뭇잎도 아니고 바람도 아니고 바로 네 자신의 마음“이란 앞의 화두와 ”너무나 달콤했던 꿈이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것이기에 운다“는 마무리의 화두는 영화를 이해하는 결정적인 단서다.

 

 

 선우는 과연 보스의 여자에 흔들렸는가. 보스는 자신의 여자에 대한 부하의 미세한 흔들림 하나로 그 엄청난 파국을 자초했는가.

‘여자’를 중심에 놓으면, 이 영화의 본질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다. 문제의 여자는 뇌쇄적인 매력을 발산하지도, 주변의 모든 남자들을 적극적으로 파멸로 이끄는 팜므파탈도 아니기 때문이다.

결국 , 이 영화의 핵심은 선우-여자- 보스 강사장(김영철)의 삼각구도가 아니라, 선우와 강사장란 두남자의 관계다. 여자에 대한 선우의 사랑이 과연 그 모든 비극을 초래할만큼 강렬한 것이었는가, 또는 여자가 선우를 그런 파국 속으로 밀어넣을만큼 강력하게 매력적인 존재인가 등을 둘러싼 논의는 이 영화의 핵심에서 아예 벗어난 것이라고 할 수있다.

 

 

강사장은 선우에게 묻는다. “무엇 때문에 흔들렸느냐.” 이것은 “네가 감히 마음이 흔들려 내 애인을 넘보려고 했느냐”는 것을 묻기 위한 것이 아니다. 선우가 능력있는 부하라던데 적당히 벌을 주고 마무리하는게 어떻겠냐는 최고보스의 권유에 그는 이렇게 말한다. “손하나 뭉개는 것으로 끝날 일이 아니다.″ 강사장은 비록 여자문제가 단초가 되기는 했으나, 선우의 내면에 강사장 자신은 물론 조직자체를 위협할만한 ‘어떤 흔들림’이 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선우 자신조차 그런 흔들림을 스스로 인식하지 못했을 수도 있지만, 강사장은 예리하게 이것을 감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와호장룡]의 대나무 결투신에서 , 장쯔이가 올라선 대나무가 사정없이 요동치는 것을 통해 흔들리는 마음을 읽어냈던 주윤발과 비슷한 셈이다.

 

 

 선우는 “무엇 때문에 흔들렸느냐”는 사장의 질문에 대답하지 못한다. 강사장과 선우의 관계가 흥미로운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한때 서로에게 강력한 신뢰를 갖고 있던 두 사람은 어쩌면 편하게 내비칠 수도 있었을(예를 들어 여자에 관한 농담식의 말로 위기를 넘겼을수도 있었을) 속마음을 밖으로 드러내지 못한다. 이것은 서로에 대한 강한 신뢰로 결합돼있어보였던 두 남자의 관계가 사실은 그리 굳건하지 않음을 보여주며, 강사장은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선우보다 빨리, 그리고 명확히 이해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강사장의 이런 동물적인 직감은 , 영화의 마지막 화두와 끝장면을 통해 입증이 된다. 모든 상황이 종료된 후 , 영화는 이런 화두를 던진다. "달콤한 꿈을 꾸었습니다. 그것은 현실에서 이뤄질 수 없는 것이기에 울고있습니다.” 그리고나서, 선우가 스카이라운지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만족스럽게 바라보면서 권투 동작을 하는 짧은 장면으로 영화는 끝난다. 처음엔 조심스럽게 포즈를 의식하며 손을 내뻗었던 그는 어느새 미친 듯이 양손을 흔들어댄다. 겉으론 완벽하게 평온하고 자신을 통제하고 있는 듯 보이는 그의 내면이 가장 섬뜩하게, 가장 인상적으로 드러나는 장면이다. (선우가 거리에서 시비가 붙은 자동차 운전자를 따라가 흠씬 패주는 장면도 그의 숨겨진 내면을 드러내 보여준다.)

 

꿈이야기처럼 지금까지의 모든 이야기는 조직을 화끈하게 뒤흔들어보고 싶은 선우의 달콤한 꿈(또는 상상)이었는가, 아니면 그것은 선우가 ‘파멸의 오디세이’로 발을 들여놓기 이전의 모습인가. 김감독은 양쪽 모두에 가능성을 두는 열린 결말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이 장면 하나만으로도 감독은 선우의 폭발적인 내면, 그리고 강사장이 무엇 때문에 선우를 끝까지 제거하고 싶어했는가를 충분히 설명하고 있다.

 

 영화에서 숨겨진 또하나의 고리는 , 과거 조직내에서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실력파 중간보스의 제거사건이다. 영화에서는 이 사건의 내막과 과정이 완전히 생략된채 인물들의 대사를 통해서만 간접적으로 드러난다. 중간보스를 제거하는데, 선우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것이 분명하다. 그때 선우는 그에게 “돌이킬 수없으니 받아들여라”라고 말했었다. 과거의 에피소드를 통해 , 감독은 선우와 강사장의 관계가 돌이킬 수 없는 파국으로 가리라는 세밀한 복선을 깔아놓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주먹이 운다]는 류승완이 액션과 스타일에 대한 강박감을 버리고 비로소 사실상 처음으로 인물속으로 빠져들어갔다는 점에 점수를 주고 싶다. 권투영화들이 대부분 한쪽 선수의 삶을 따라가는 방식인 것과 달리, 류승완 감독은 처음부터 영화 끝까지 두 선수의 인생과정에 동일한 무게와 시선을 주는 방식으로 , 권투영화의 기존 틀에 신선한 변화를 줬다. 마지막 경기장면에서 관객이 두 선수 모두를 포기할 수 없는 감정상태에 놓이게 된다는 것은 감독의 연출의도가 100% 성공했다는 의미이다. 가족주의를 끌어들였다는 점때문에 신파성의 논란 여지도 있겠지만, 캐릭터의 힘을 제대로 살린 류승완에게 박수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