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여우의 영화 이야기/내가 본 영화들

세르쥬 노박의 겨울여행

bluefox61 2006. 11. 30. 17:10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문학세미나장. 한 중년 남자가 서있다. 그의 이름은 다니엘 볼탄스키( 다니엘 오테이유) . 프랑스 파리에서 성공했지만 '얼굴없는 작가'로 은둔생활을 하고 있는 그는 세상에 세르쥬 노박이란 이름으로만 알려져 있다. 주변 사람들을 훑고 다니던 그의 시선이 어느 한 아름다운 여성에게 머문다. 여자는 자신의 남편에게 문학계 동료인 듯한 또다른 남자를 소개해주고 있는 참이다. 세미나가 시작되고 잠시 후, 다니엘의 시선은 세미나장 구석 기둥 뒤에서 아까 그 남자와 진한 포옹을 나누는 여자의 눈길과 마주친다. 그는 자신의 노트에 이렇게 적는다. " 그녀는 두려움과 전율을 느끼는 듯했다." 



영화가 '시선의 떨림'으로 시작되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시선은 곧 욕망이다. 그리고 욕망은 대가를 요구하는 법이다. <세르쥬 노박의 겨울여행>이란 무미건조한 우리말 제목( 영화 속에 등장하는 노박의 베스트셀러 소설 제목) 과 달리, 불어 원제는 '욕망의 대가(Le Prix du Desir)다. 에로틱한 분위기가 물씬하다는 점 때문에 제목의 '욕망'이란 단어 속에 '섹슈얼리티'가 포함될 수밖에 없지만, 주인공 다니엘의 행보를 뒤따라가다보면 그(또는 인간 모두)에게 '대가'를 요구하는 '욕망'의 실체가 그리 단순하지 않다는 점을 깨닫을 수 있다. 따라서 '에로틱 스릴러'나 '팜므파탈' 등을 거론한 광고문구에 혹에서 극장을 찾았다가는 예상보다 화끈하게 에로틱하지도, 뒤통수를 치는 기막한 반전이 있는 스릴러라고도 할 수 없는 영화에 실망감을 느낄 수도 있다. 
<세르쥬 노박의 겨울여행>은 시아버지와 며느리의 부적절한 관계란 설정이나 , 한 가정을 파멸로 이끄는 팜므 파탈적인 존재가 등장한다는 점에서는 루이 말 감독의 <데미지>와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 가벼운 '원 나잇 스탠드'를 계기로 하나씩 드러나게 되는 한 남자의 뿌리깊은 욕망, 죄의식, 존재의 허약함, 모호한 도덕적 경계, 운명적 복수, 죽음이란 인간의 치명적 한계성 등이야말로 영화 전체를 묵직하게 짓누르는 핵심 주제란 면에서는 오히려 볼커 슐렌도르프의 <사랑과 슬픔의 여로( 막스 프리쉬의 원작소설 제목은 '호머 파베르')>와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영화는 다니엘이 양아들의 아내인 밀라(안나 무글라리스)와 겉잡을 수 없는 정사에 빠져드는 동시에, 20여년전 자신이 저질렀던 문학적 '범죄' 행위와 맞닥뜨리는 과정을 뼈대로 하고 있다. 밀라의 정체를 알게 된 다니엘이 불가항력적으로 다가온 '파국'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모습에서 유럽영화다운 향취를 느낄 수 있다는 점이 <세르쥬 노박의 겨울여행>의가장 큰 매력. 에로티즘시즘에 대한 지나친 기대만 접어둔다면, 초겨울의 스산한 분위기에 푹 젖어들 수 있다. 
최근 <히든>에서도 과거의 망령에 사로잡힌 신경쇠약직전의 남자를 연기했던 프랑스 중견 배우 다니엘 오테이유가 이 영화에서는 비감어린 지식인 상을 중후하게 연기해냈다. 밀라역의 안나 무글라리스는 칼 라거펠드가 샤넬 시절 직접 발탁한 모델 출신 배우다. 감독 로베르토 안도의 두번째 장편영화로, 지난 2004년 칸 영화제 비평가 주간 폐막작으로 상영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