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이 신나게 뛰어 놀고 있었다. 제 키를 훌쩍 넘어 2~3m는 족히 돼보이는 장벽은 불도저에 밀려 힘없이 옆으로 넘어져 있었다. 아이들의 얼굴에는 모처럼 밝은 미소가 떠올랐다. 아마도 몇개월만에 느껴보는 즐거움이자 자유였을 것이다.
팔레스타인 라파에서 전해져 온 한 장의 외신사진이 마음을 끌었다. 이집트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라파의 분리장벽이 23일 결국 팔레스타인인들에 의해 무력으로 무너져버린 것. 이번 사태는 이날 새벽 복면을 쓴 일단의 청년들이 장벽 일부를 폭파하면서 시작됐다. 일각에서는 팔레스타인 무장정치조직인 하마스 조직원들이 주도했다고 주장했지만 정작 하마스측은 이를 부인했다.
지난 수개월동안 이스라엘의 경제봉쇄 때문에 연료, 물, 의약품 등 생필품 부족으로 고통받아온 가자 주민들의 입장에선, 누가 주도했든 장벽이 뚫렸다는 사실 자체가 무엇보다 중요할 것이다.
최근에는 가자 지구의 유일한 발전소가 연료부족으로 멈춰서면서 주민 150만명 중 절반이 넘는 80만명이 어둠과 추위 속에서 떨며 지냈다고 한다. 손에 손에 빈통을 들고 무너진 국경장벽을 넘어 이집트로 향했던 가자 주민들은 지금쯤 그 통에 식량과 연료를 채워 집으로 돌아왔을 것이다. 하루동안 30만~40만명이 장벽을 넘었다니 ‘엑소더스’라고 할 만하다.
그동안 하마스를 뿌리뽑기 위해 애써온 이스라엘, 미국, 이집트는 물론 마무드 아바스 팔레스타인 대통령까지도 이번 사태에 대해 당혹스러워한다고 한다. 어쨌든 라파 국경장벽 붕괴는 경제봉쇄로 신음해온 가자 주민들의 삶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동시에, 실타래처럼 복잡하게 얽힌 팔레스타인 문제 해결이 2008년에도 역시 쉽지 않음을 다시 한번 증명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국제사회의 관심이 집중된 라파는 가자에서 유일하게 이집트와의 국경검문소가 있는 곳이다. 통행이 비교적 자유로웠던 검문소는 2005년 이스라엘이 봉쇄조치를 단행하고 높은 장벽까지 쌓아버린 뒤 ‘가자의 비극’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존재가 됐다.
장벽에서 라파 쪽으로 약 40㎞까지는 주민거주가 금지돼 있는 일종의 비무장지대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 지역을 ‘필라델피아 통로’란 별명으로 부른다고 한다. 2005년 콘돌리자 라이스 미국 국무장관의 중재에 의해 통행이 재개됐던 검문소는 지난 18일 하마스의 이스라엘 공격을 계기로 다시 막혔고, 이로 인해 가뜩이나 힘겨운 삶을 이어오던 가자 주민들이 더이상 참지 못하고 장벽을 힘으로 무너뜨리는 지경에까지 이른 것이다. 한쪽은 테러리즘 차단을 위해 봉쇄가 어쩔 수 없다고 주장하고, 또다른 한쪽은 장벽을 무너뜨리고 봉쇄를 뚫는 것을 어쩔 수 없는 자구책이라고 주장하는 상황이다.
1989년 독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이후 지구촌은 장벽없는 시대를 맞았던 것이 사실이다. 특히 테크놀로지의 발달과 세계화로 인해 국경의 의미가 과거 어느때보다 희미해졌다. 하지만 21세기에 들어 세계 곳곳에서는 또다시 장벽이 세워지고 있다. 팔레스타인의 장벽과 미국·멕시코 간의 위압적인 콘트리트 장벽이 대표적이며, 태국·말레이시아 국경지역에도 장벽이 세워져 있다.
이같은 장벽은 사람과 물자의 교류를 막을 뿐만 아니라 인권침해 논란을 끊임없이 불러일으킨다. 사람들의 마음 속에 자리잡은 ‘보이지 않는 장벽’이 초래할 피해는 또 얼마나 될지 가늠하기조차 어렵다. 23일 장벽 위를 뛰놀던 가자의 아이들은 과연 언제쯤이나 장벽없는 세상에서 살 수 있을까. 안타깝게도 아직은 요원한 일인 듯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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