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네수엘라 수도 카라카스에 전세계 언론의 시선이 쏠려 있다. 오일달러의 힘을 기반으로 국내외에서 거침없는 행보를 보여온 우고 차베스 대통령의 초강수 ‘언론 길들이기’의 파장이 수그러들기는커녕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악화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베네수엘라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민방 RCTV가 지난 27일 자정을 기점으로 전파송출을 중단당하게 된 것을 계기로 지금 카라카스는 연일 차베스 정부에 대한 저항과 지지 시위로 몸살을 앓고 있다고 한다.
지금 베네수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런 상황의 이면에는 겉보기보다 훨씬 더 복잡한 역사적, 정치적, 경제적 배경이 있다. 외신보도만 보면, 차베스가 마치 군대를 앞세워 RCTV를 점령해 강제로 방송을 중단시킨 것같지만 실상은 좀 다르다. RCTV 폐쇄의 법적 근거는 차베스가 집권하기 한참 전인 1987년 제정된 통신법이다. 그러니까 올해초 차베스 대통령에게 의회승인없이 포고령을 내릴 수 있는 무소불위 권력을 부여해준 비상조치특별법과 직접적으로 상관은 없다. 이 통신법에 따르면, 모든 민간 방송국들은 20년마다 한번씩 국가로부터 면허갱신을 받도록 돼있다.
지난 수년동안 반(反)차베스의 선봉에 서왔던 RCTV는 마침 2007년 5월27일로 20년 면허기간이 끝나게 됐고, 차베스 대통령은 이 때를 놓치지 않고 ‘합법적인 절차’에 따라 면허갱신을 거부함으로써 눈엣가시 같았던 RCTV의 54년 역사를 마감시켜버렸다. 그가 새로운 타깃으로 지목하고 있는 글로보비시온TV의 면허갱신 시한은 2014년. 차베스 정부가 이 방송국을 RCTV처럼 당장 폐쇄시키지 않고 관계자들의 검찰 소환조사란 방식을 취한 데에는 바로 이런 법적 배경이 있다.
차베스 언론탄압의 상징이 된 RCTV는 미국에서 이주해온 윌리엄 헨리 펠프스 2세에 의해 1953년 설립됐다. 전신은 펠프스 2세의 아버지가 1930년 세운 IBC라디오 방송국. RCTV는 여러개의 방송사들을 포함한 막강한 언론그룹으로 성장했으며, 그런 만큼 베네수엘라 현대정치사에 깊숙한 영향력을 행사해왔다. 특히 차베스 대통령 취임 이후 RCTV는 날카롭게 대립각을 세워 비판보도를 해왔으며 이 과정에서 군부쿠데타를 공개적으로 지지했었다.
RCTV 등 베네수엘라 보수 우익 언론재벌들의 보도행태에 문제가 많았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언론이) 진정제를 먹고 가만있지 않으면 내가 진정제를 먹이겠다”는 차베스의 오만한 발언은 전세계에서 비판을 불러일으키고 있으며, 그나마 비교적 긍정적인 시선으로 현 정권을 바라봤던 이들마저 등을 돌리게 만들고 있다. 현지 여론조사에도 RCTV 폐쇄엔 반대한다는 의견이 압도적인 다수인 것을 보면, 베네수엘라의 일반 국민 대다수가 이번 사태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독재국가를 빼놓고 어느 나라이건 언론을 강압적, 인위적으로 길들이려는 정권치고 국민의 지속적인 지지를 받은 예가 역사적으로 없다.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도 지금은 높은 지지율을 유지하고 있지만, 숱한 언론인들을 탄압하고 죽음에 이르게 한 사실이 향후 정치적으로 그의 최대 약점과 장애물이 될 가능성이 높다. 공교롭게도 동시에 서울에서 벌어지고 있는 언론자유억압 파문을 지켜보면서, 새삼 드는 생각은 언론이란 누구의 것도 아닌 바로 국민의 것이란 지극히 당연한 진리다. 권력자나 언론인이나 가장 두려워하고 겸손해야 할 대상은 바로 그들을 지켜보는 국민들의 눈이다 . 언론을 바꾸거나 지키는 힘도 당연히 깨어 있는 국민들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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