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여우의 세상 이야기/지구촌 전망대

드레스덴 성당..그리고 숭례문

bluefox61 2008. 2. 22. 21:31

2차세계대전이 막바지로 치닫고 있던 1945년 2월 13일.`엘베강의 피렌체'`유럽 바로크 문화의 본산'으로 불려온 독일 동부 고도(古都) 드레스덴의 밤하늘에  영미연합군 폭격기 수백대가 나타났다. 전쟁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공습이 거의 없었던 드레스덴의 처참한 파괴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사흘 밤낮으로 드레스덴에 떨어진 폭탄은 무려 65만개. 도시전체가 사실상 거대한 불덩어리가 됐고, 수만명의 시민들이 검은 시신으로 변해버렸다. 폭격 당시 도심지역의 온도가 한때 섭씨 1000도까지 치솟았을 정도였다. 

드레스덴 시민들의 처참한 마음을 그나마 위로한 것은  `성모성당(프라우엔키르헤)'이었다. 성당은 200여년동안 그들의 희노애락을 지켜봐온 `드레스덴의 정신적 지주'였다. 하지만 2월 15일, 폭격을 꿋꿋하게 버텨오던 성당은 결국 무너져내리고 말았다. 수많은 예술가들로부터 `돌로 빚은 종'이라고 극찬받았던 둥근 돔도, 아름다운 천장화와 오색찬란한 스테인글래스들도 한순간에 사라져버린 것이다. 약 6000t의 돌덩어리는 수만,수십만 조각으로  분해돼버렸다. 




드레스덴 시민들의 성모성당 폐허지키기 노력과 집념은 눈물겨웠다. 성당 그 자체보다 더 아름다웠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쟁종식 직후드레스덴의 공산 정부는 거대한 돌무덤을 변해버린 성모성당의 잔해들을 깨끗이 치워 주차장을 건설할 생각이었다. 이같은 계획이 알려지자 분노한 시민들은 시청사 앞으로 쏟아져나와 시위를 벌였고 ,결국 시정부는 시민의 압력에 굴복했다. 드레스덴의 문화재전문가들은 시민사회의 요구에 따라  검게 그을려버린 돌조각들을 거둬들여 일일이 숫자를 붙였고, 폐허 한 옆에 차곡차곡 쌓아 보관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1989년 11월 베를린장벽 붕괴를 촉발한 동독 민주화 시위가 드레스덴에서 시작된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해마다 2월 15일이면 성당폐허에 꽃과 촛불을 바쳐온 드레스덴 시민들에게 그곳은 자연스럽게 평화와 비폭력의 상징이었다. 장벽 붕괴 한달전인 89년 10월, 동독건국 40주년을 맞아 드레스덴 시민들은 민주화를 촉구하는 대규모 시위를 벌였고, 그 불길은 동독 전역으로 걷잡을 수없이 퍼져나갔다. 



독일 통일 10주년이 되던 지난 2000년 드레스덴을 찾았을 때 성모성당은 다시 부활하고 있는 중이었다. 재건작업이 시작된지 7년만에 막 성당의 지하 예배당이 완공된 참이었다. 옛 아름다움을 되찾아가는 성당과 함께 눈길을 끌었던 것은,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마련된 성당잔해 야외 보관소였다. 폭격의 상처를 그대로 간직한 크고 작은 돌덩이들이 위치표시와 숫자를 붙인채 질서정연하게 놓여있는 모습은 그 자체만으로도 감동적이었다. 


드레스덴 시민들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 돌조각들을 모았을까. 60여년전만 하더라도 거대한 성당의 복원은 사실상 불가능한 `꿈'이었을 것이다.기술력도, 돈도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드레스덴 시민들은 아무리 사소한 잔해일지라도 보존되길 원했고, 자기 세대에 안되면 후대에서라도 성당이 복원될 수 있으리란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그 덕분에 성모성당은 붕괴된지 꼭 60년만에,재건작업이 시작된지 13년만인 2005년 찬란하게 다시 태어날 수 있었다.


어제 오후, 숭례문 화재현장을 다시 찾았다. 비올 때를 대비한 장막설치작업이 한창이었고, 약200명의 시민들이 가림막의 창을 통해서나마 불타버린 숭례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가림막은 하나의 커다란 대자보였다. 숭례문의 소실을 안타까워하는 시민들의 심정이 그 위에 빼곡히 적혀있었다. 

우리 사회의 문화의식 부재를 한탄하는 목소리가 높지만, 또 한쪽에서는 문화와 역사를 사랑하는 시민들의 마음이 폭발하고 있었다. 화재현장에서 마구 치워지던 숭례문 잔해들의 보호를 촉구했던 시민들의 움직임 역시 그 한 예다. 숭례문 화재현장에서 깊은 슬픔과 함께 희망 한자락을 느낄 수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