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여우의 영화 이야기/내가 사랑하는 배우들

인터뷰/ 김혜자

bluefox61 2009. 9. 30. 20:27


영화 ‘마더’ 속의 엄마는 달리고 또 달린다. 나가 노는 데만 정신이 팔린 아들 입에 밥 한숟가락이라도 더 넣어주기 위해, 억울한 ‘내 새끼’의 누명을 벗길 증거를 찾기 위해 엄마는 시장통으로, 어둡고 좁은 골목길로, 인적이 뜸한 들판으로 정신없이 달린다. 


그 엄마를 연기한 배우 김혜자(사진)씨 역시 현실세계에서 달리기를 멈추지 않는다. 끔찍한 빈곤과 질병 속에 놓여있는 아이들을 품에 안기 위해서, 그 비극을 세상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서다. 


그는 애당초 그 일을 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50여년 동안 연기자의 길을 열심히 걸어온 배우로서, 자식들을 모두 출가시키고 손자손녀까지 둔 할머니로서 안락한 삶을 누릴 자격이 충분했다. 하지만 그는 지난 20여년 동안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굶어 죽어가는 아이들 입에 빵 한조각, 우유 한모금, 알약 하나 더 넣어주기 위해 비행기를 타러 달려나가곤 했다. ‘해외 여행가는 기분’으로 시작했던 이 일은 이제 그의 삶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기쁨이자 보람이 됐다. 



1992년부터 국제구호기구 월드비전의 친선대사로 활동해오고 있는 배우 김혜자씨를 최근 서울 서교동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영화 ‘마더’로 새삼 ‘재발견’된 ‘국민 엄마’는 자신의 삶을 지탱해주는 두 가지 축으로 연기와 친선대사 활동을 꼽았다. 그는 ‘봉사’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기 꺼려했다. 절대빈곤에 놓인 아이들을 위해 손을 내미는 것은 “인간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자 본분이기 때문”이다.


―1992년부터 시작한 월드비전 친선대사 일이 올해로 18년째다. 무슨 일이든 한 번하면 아주 오랫동안 하는 것같다. 연기는 물론이고 CF도 한 회사 것만 20년 넘게 하지 않았나. 


“나이를 많이 먹거나 건강이 나빠져서 비행기를 더 이상 탈 수 없어질 때까지 월드비전 친선대사 일을 계속할 생각이다. 한동안 아이들을 찾아가지 않으면 너무나 보고 싶어지고, 마치 해야 할 일을 안 하고 있는 것 같은 초조감이 막 든다. 예전에는 내 인생에서 연기가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제는 연기와 아이들을 만나러 다니는 것 , 이 두 가지가 내 인생의 중심이 됐다. ‘일’이 아니라 ‘인생’ 그 자체가 된 것이다.”


― 아프리카 곳곳을 비롯해 아프가니스탄, 방글라데시, 보스니아, 북한 등 전 세계를 찾아다녔다. 여권에 출입국 도장이 몇 개나 찍혀있나. 


“너무 많아서 일일이 세어 볼 수도 없다. 여권도 몇번이나 바꿨는지 모른다. 많은 나라들을 다녔지만, 그 중에서도 북한 어린이들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약 10년 전에 북한에 들어갔었는데, 식량난 때문에 제대로 밥을 먹지 못한 아이들을 보고 너무나 마음이 아팠다. 다른 나라와 달리 맘대로 도와줄 수조차 없는 분단현실 때문에 더 안타까울 뿐이다.” 


― 방문국가는 어떻게 정하나. 


“월드비전에서 정하는 경우도 있고 내가 직접 어떤 나라에 가자고 말하는 경우도 있다. 지난 3월에는 아프리카 수단을 다녀왔는데, 내전으로 인한 다르푸르 현지의 끔찍한 학살상황에 대한 보도가 많이 나오던 시점이라서 직접 가보고 싶다고 월드비전에 제안했었다. 수단의 참상은 말로 다 표현 못한다. 종족 분쟁으로 남자 주민이 거의 다 살해당한 마을도 있다. 자식과 남편을 잃어버리고 눈물조차 말라버린 여자들을 수없이 만났다.” 


― 지금까지 방문했던 나라 대부분이 매우 위험한 곳이었다. 2004년 펴낸 책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를 보면, 안전을 걱정하며 만류하는 가족에게 ‘죽어도 좋다’고 답하는 장면이 나온다. 여전히 그런 마음인가. 


“물론이다. 아이들을 만나러 가다 비행기나 헬리콥터가 떨어져 죽거나, 아이들과 함께 지내다 병균이 옮아 죽는다면 그것 또한 의미있고 보람된 죽음이라고 생각한다.” 


1992년 여름, 김혜자씨는 ‘운명적’으로 월드비전을 통해 또다른 세상을 만났다. 드라마 사상 최고 시청률을 기록한 주말연속극 ‘사랑이 뭐길래’를 끝내놓고 대학을 졸업한 딸과 함께 유럽여행이나 해볼까 하고 들뜬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던 차였다. 어느날 오후 뜻밖의 전화가 걸려왔다.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월드비전 한국 지부란 곳으로부터였다. 월드비전은 그에게 친선대사 자격으로 에티오피아에 함께 가자고 제안해왔다.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에 따르면 “아프리카를 여행지로 택하는 것도 멋있겠다”는 단순한 생각으로 그는 이 제안을 받아들였고, 굶주림에 고통받는 그곳 사람들과 만나는 순간부터 흐르기 시작한 눈물은 17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멈추지 않고 있다. 책에서 그는 “낮에는 난민촌을 돌아보고 밤이면 호텔로 돌아와 따뜻한 물로 샤워하고 푹신한 침대에 누워있는 내 자신이 그렇게도 싫고 위선적일 수 없었다”고 고백했다. 


― 에티오피아의 첫 인상은 어땠나.


“상상하던 것 이상이었다. 어린아이가 몇날 며칠 동안 밥을 못 먹어서 눈곱에 앉아있는 파리 떼조차 쫓을 힘 없이 앉아있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겠는가. 이런 세상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살아온 것이 너무나 죄스러웠다. 다시는 이런 곳을 찾고 싶지 않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하지만 두 번째로 소말리아를 다녀오고 나서부터는 달라졌다. 누가 자꾸 내 등을 떠미는 느낌이 들었다. TV에서도 아프리카 내전 등에 관한 뉴스에 유독 민감해지더라. TV 뉴스 화면에 내가 만났던 아이와 비슷한 아이가 나오기만 해도 눈물이 주룩주룩 나왔다.”


― 그 아이들 중 특별하게 기억나는 아이가 있는지. 


“케냐에서 만난 에쿠아무란 아이다. 6살난 유목민 아이였는데 너무 먹지를 못한 상태였다. 서울에 돌아와서도 그 아이가 마음에 계속 걸렸다. 7년 만인 재작년 케냐에 다시 가서 그 아이와 재회했다. 아이는 13살이 돼 있었는데, 길목에 서서 나를 기다리며 웃고 있더라. 다시 찾아오겠다는 오래 전의 내 약속도 기억하고 있었다. 에쿠아무와 두 동생과 결연을 맺어 생활과 학업을 지원하고 있다.” 


김혜자씨는 월드비전을 통해 전 세계 곳곳에 있는 103명의 아이들을 지원하고 있다. 지원 금액은 1인당 3만원으로, 매달 300만원이 조금 넘는 액수이다. 그는 ‘돈이 좀 생기면 월드비전에 미리 한꺼번에 큰 액수를 맡기는’ 식으로 지원해오고 있다. 현재까지는 2014년까지 103명의 아이들에게 보낼 돈이 비축돼 있는 상태다. 출간된 지 5년된 책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의 판매수익 역시 월드비전으로 돌려놓았다. 그 자신은 이 책으로 정확하게 얼마를 벌었는지 모른다. 판매수익으로 강원 태백의 어린이들에게 공부방을 만들어줬고 결연아동 지원사업에 쓰였다는 정도만 알고 있다. 그와 결연을 맺은 방글라데시 아이들 중에는 어느새 자라서 의과대학에 진학한 경우도 있다. 


물론 현실적인 한계를 느낀 적도 한두 번이 아니다. 그는 “나도 밑빠진 독에 물붓기란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고 말했다. 일회성 지원이나 개인적 자선 이전에 사회구조적 개혁이 이뤄져야 빈곤문제가 해결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그는 “굶어 죽어가는 사람들의 손에 단돈 10달러라도 쥐여주고 난 다음에 그런 말을 했으면 좋겠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밑빠진 독이라도 물을 계속 부어줘야 하며, 나아지는 게 없어보여도 계속 도와줘야 한다. 다같이 손을 잡아주면 언젠가는 해결되지 않겠는가”라는 그의 말 속에 절절함이 담겨 있었다. 


그는 오는 10월 다시 에티오피아를 찾는다. 이번에는 독지가의 도움으로 현지에 ‘김혜자센터’가 설립되기 때문이다. 약 200명의 아이들에게 먹고 잘 수 있는 거처와 교육을 제공하는 시설이다. 그는 “그곳에서 내가 아이들에게 챙겨줘야 할 것이 참 많을 것같다. 연기와 친선대사를 그만두더라도 여생을 다 바칠 곳과 할 일이 생긴 것같다”며 설레했다.